어린 시절을 함께한《악의 꽃》,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 글은 남편인 에두아르가 쓰고 내가 번역한 글이다.
햇살 좋은 날이나 바람이 세찬 날, 테라스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주영이가 급하게 거실로 뛰어들어와 외칩니다.
"문장이 떨어진다!”
햇살과 바람은 자주 그녀에게 문장을 선물하는 듯합니다. 그런 날이 아닌 오늘도, 주영은 지난여름부터 아팠던 허리를 불편한 의자에 고정한 채, 인내심 있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을 쓴다는 건 끝이 없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한 문장을 쓰기 위해 한 시간을 보내고, 하나의 이미지와 한 개의 단어를 5분 넘게 떠올리는 일.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배가 고파지지 않는 이상, 아무도 제지할 수 없고 멈추게 할 수 없는, 일상과 상관없는 것들을 생각하는 일, 이처럼 매력적인 일이 또 있을까요?
만약 그녀가 아닌 제가 작가였다면 우리 집은 어떤 꼴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바닥에는 종이 다발이 흩어져 있고, 먹다 남은 저녁은 집안 여기저기에서 냄새를 피우고 있겠지요. 온갖 책들은 서부극에 등장하는 4륜 마차처럼 나를 둘러싸고 아니, 《늑대개 화이트 팽(White Fang)》의 마지막처럼 포위한다고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물론 주영이 혼자 살았다면, 집안은 전쟁 후 폐허 같았겠지만, 그녀에게는 다행히 남편이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사물의 느린 침략 앞에서 맥을 못 추는 덜렁쇠입니다. 덕분에 보름에 한 번, 그녀는 무시무시한 토네이도급 폭풍으로 변신합니다. 그 폭풍은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니며 물건을 뒤엎고, 잘 보이지도 않는 먼지들을 쫓아다닙니다. 폭풍은 집안 모든 가구들을 번쩍이게 만들고, 작은 장식품들을 미비하게 이동시키거나 예상치 못한 곳으로 이동시키며 저에게 소리칩니다.
"다음 문장을 한국어로 완성하시오! 나는! 나는 OOOO!”
저는 그 문장의 주어를 바꾸어 완성합니다.
"너는 마자아해! 마니 마니!”
가끔 맞아도 별로 아프지 않은 가벼운 물건들이 제 머리 위로 날아오기도 합니다. 역시 동쪽에서 날아온 폭풍은 제피로스(Ζέφυρος/Zéphyros)와는 다릅니다.
매일 저녁 6시, 제가 라틴어와 그리스어 수업을 마치고 집에 들어올 때에도, 회오리바람은 불고 있습니다. 부엌에서 슥삭슥삭 작은 소음이 새어 나옵니다. 식기나 나무 조각이 부딪치는 소리, 물소리, 알 수 없는 물건들의 미비한 소리…. 그 작은 회오리가 온 집안을 휩쓸고 다니지 않는다면, 우리 집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공되지 않은 채 혼란 속으로 빠져들 것입니다. 이 작은 회오리바람 덕분에 집안은 생기를 띱니다. 그녀에게 덜렁쇠 남편이 없었다면 그녀는 회오리바람으로 변신할 필요 없이, 버려진 전쟁터에서 글을 쓰고 있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불안정하게 쌓아 놓은 책들과 바닥을 나뒹구는 먼지 덩어리 속에 웅크리고 앉아 수업 준비를 하고 있던 어느 날, 그녀가 말했습니다. 자기는 저에 대해 글을 쓰고 있으니 (이 사실을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인생책 몇 권에 대해 글을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출판사 편집자의 주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들은 이렇게 저를 글쓰기의 세계로 끌어들였습니다. 주영의 말대로 문장이 다가오는 시간들을 노리며 머리를 쥐어짜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머리를 식혀보기도 합니다.
인생책이라….
제 어린 시절을 함께한 《악의 꽃(Les Fleurs du Mal)》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이 두 작품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꼽을 수 있겠습니다.
먼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그의 문장들을 여름 별장의 바닥 꺼진 높은 다락방에서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한없이 뒤엉킨 문장 속에 녹아있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아름다운 감수성에 전율했습니다. 저는 프루스트의 문장 속에 나를 완전히 내맡겼습니다. 콩브레의 계단, 마르셀이 그의 어머니와 헤어져야 했던 그 계단은, 매일 밤 어머니와 헤어져야 했던 순간을 연상케 했습니다. 어린 소년의 사랑에 대한 무한한 갈구를 이 이상 더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요? 사물의 부조리를 글로 극복할 수 있다는 열망과 아름다움에 대한 처절한 저항, 행복이 손에 잡힐 듯해 희망에 부푸는 신비한 순간들, 우아한 패배와 반항을 어떻게 이렇게 잘 묘사할 수 있을까요? 감탄했습니다.
열다섯 살이었던 저는, 제가 프루스트처럼 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에 절망하기도 했지만, 저의 좌절은 프루스트의 것과 닮아있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외롭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프루스트는 언제나 저와 함께하는 친구가 되어 주었으니까요.
평론가들은 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끝으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그의 글쓰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작가 프루스트는 찾지 못했지만, 독자인 우리는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좋아하던 소녀에게 고백했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무슨 근거로 진정한 사랑이라 믿을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의 사랑에 대한 증오를 우리는 어떤 집요함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특별하지 않은 일상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사무실을 오가는 당일치기 여행을 하며 책상 앞에 앉아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착각의 희생자는 아닐까요? 이런 잡다한 질문에, 프루스트는 어김없이 답해 줍니다. 누군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외로운 여름 나절을 보내는 것이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한다면, 저는 조금 과장해서라도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프루스트와 함께라면 당신은 지금의 고통에서 멀어질 겁니다’라고.
바칼로레아를 치러야 했던 해, 우리는 보들레르(Baudelaire)의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을 공부했습니다. 이 책 속에는 마치 예전부터 존재해 온 손톱 모양이나 눈동자 색깔 같은 이유 없는 슬픔과 혐오가 가득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한 번의 수확을 마치면,
삶은 고통이다
이것은 잘 알려진 비밀이다
그것은 진정한 우울이다
낮은 하늘이 뚜껑처럼 무겁게 드리워
기나긴 권태 속에 신음하는 영혼을 짓누를 때…
-《악의 꽃》 ‘우울(Spleen)’ 중에서
파리의 어렴풋한 공기 속을 걸으며 저는 그의 시들을 암송하곤 했습니다. ‘음악은 종종 내게 바다처럼 다가온다’ 보들레르가 한 말입니다. 보들레르의 고귀한 멜로디의 시들은 저를 흔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저는 요동했습니다. 한없이 펼쳐지는 시의 파도 속에서 저는 제 안의 어둡고 비겁하게 오염된 영혼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그의 언어는 저의 이마를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의 시 ‘시체(Une Charogne)’를 통해, 이 세상 모든 죽음을 직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태양은 그 썩은 것을
마치 알맞게 익힐 셈인 냥 내리쬐고
덩어리 진 모든 것을 한데 모아
몇백 배로 만들어 대자연에게 갚으려 한다
-《악의 꽃》 ‘시체(Une Charogne)’ 중에서
그의 또 다른 시에서 부재하는 현실의 부드러움을 대면했습니다.
보라! 저 운하 위에서
잠자는 배들을
유랑은 그들의 타고난 기질
당신의 작은 욕망을
가득 채우려
그들은 세상 끝에서 온다
-《악의 꽃》 ‘여행으로의 초대(L’Invitation au Voyage)’ 중에서
저는 이 시구들을 가슴으로 읽어내리며 운율의 멜로디를 즐겼습니다. 제목과 달리 ‘악의 없는 섬세함’으로 가득한 《악의 꽃》은 너무 일찍 잃어버린 저의 선천적 멜랑꼴리를 상기시켜주는 작품입니다. 덕분에 저는 예술가는 되지 못했지만,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 마지막 회차인 8화에서 지나치게 완벽하고, 지나치게 총체적인 책 《보바리 부인》,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건네는 책 《오만과 편견》 등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