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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영 May 25. 2020

프랑스 책벌레가 말하는
‘나의 인생책’(下)

골치 아프지만 사랑스러운 벗, 책에 대하여.

*이 글은 지난주에 업로드된 '프랑스 책벌레가 말하는‘나의 인생책’(上)'에 이어지는 글로, 남편인 에두아르가 쓰고 내가 번역한 글이다.




이번엔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샤를이 창문 커튼을 닫느라 등을 돌리고 있는 사이, 그녀는 갑자기 "아이고!”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그렇게 죽다니! 이 얼마나 기막힌 노릇인가!      


플로베르는 샤를의 첫번째 부인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리고 이어진 두번째 결혼. 우리가 종종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엠마’는 샤를의 두번째 부인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덤덤한 문장입니까?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그 덤덤함이 잔인하게 느껴졌습니다. 플로베르는 샤를의 두번째 결혼을 다음의 한 문장으로 정리해 버립니다.      

      

그리고 셔츠는 한결같이 갑옷처럼 가슴께가 불룩했다. 

        

이것이 바로 플로베르입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순수함과 어리석음, 더디게 흐르는 나날 속에서 잊혀지는 기쁨과 고뇌, 언제나 똑같은 일상을 아이러니컬하고 끔찍하게 표현합니다.

      

똑같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제 항상 똑같은 날들이 하나씩 줄지어 지나가는 것인가! 셀 수도 없이 많은 날들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채로 이어진단 말인가!       


아내를 잃은 비통을 엠마의 아버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루하루 세월이 흐르고, 겨울이 지나 봄이 오고, 또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서 천천히 조금씩, 눈곱만큼씩 풀어지더군요. 사라지고, 떠나가요, 아니, 차라리 가라앉았다는 편이 낫겠네. 왜냐하면 가슴 깊숙한 곳에는 여전히 뭔가… 뭘랄까, 묵직한 덩어리 같은 것이 얹혀 있으니까요.    


하늘 아래에서 생생하게 벌어지는 진흙탕 같은 나날의 붕괴와 웅대하고 하찮은 사랑의 이야기. 각 페이지에 등장하는 플로베르의 풍부한 언어와 생각, 문장, 표현방식, 단어, 세상에 있을 법하지 않은 만남의 희열, 이 모든 것을 기억해 두고 인용하고 싶은 책이 바로 《보바리 부인》입니다. 지나치게 완벽하고, 지나치게 총체적인 이 책에 집중하다 보면 기진맥진해져 배가 고파지곤 합니다.


《보바리 부인》은 제가 열네 살일 때, 영국 요크셔에 있는 한 시골 마을의 녹슨 철로 옆 학교에서 처음 읽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은 중학생인 저를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시골구석의 탄광마을로 6개월이나 유배(?)보냈었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오가는 학교 식당의 배식줄에 서서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합니다. 그때 저는 책의 1부를 읽다 말고 일찌감치 집어던졌습니다. 

그 후로 한참이 지나 학교 숙제로 《보바리 부인》의 요약본을 읽어야 했습니다. 어렸던 저는 엠마를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죽인 플로베르에게 ‘이게 대체 뭐야? 그래서 어쩌라고?’ 화를 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한창 등산에 빠져있었고 개학도 얼마 남지 않았던 터라 《보바리 부인》의 원본을 집어들 용기가 없기도 했습니다. 

보들레드와 프루스트의 매력적인 글에 매순간 도취했던 저였지만 《보바리 부인》에서는 그런 매력적인 순간이라고는 단 한 곳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책이 존재할 수 있는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불안정한 어린 독자였던 저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플로베르가 그의 연인 루이즈 콜레(Louise Colet)에게 쓴 서한집을 읽으면서 비로소 어릴 적 그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플로베르는 그의 연인에게 《보바리 부인》의 저작 과정을 세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삶의 이면,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보내는 수많은 나날로 채워진 삶을 플로베르는 그가 가진 역량으로 즐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플로베르와 화해한 저는 《보바리 부인》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습니다. 샤를과 엠마는 서로 다른 인간상을 보여줍니다. 어떠한 열정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샤를과 지나치다 못해 빗나간 열정으로 삶을 망쳐버린 엠마를 플로베르의 냉철한 언어로 읽어내리며, 삶의 형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항상 책과 함께인 에두아르




여기 프루스트나 플로베르의 소설 만큼이나 섬세하고 정교한 소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말하고 싶은 이 소설에는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한 삶이 있습니다. 바로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입니다. 

복잡하게 뒤엉킨 미로 같은 마음을 슬픔이나 괴로움, 그 어떠한 신음도 추함도 없이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결혼식이라니! 정말 환상적이지 않습니까?

사실 저는 이 작품을 영화로 먼저 봤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어찌나 기분이 상쾌하던지 원작 소설을 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이미 삼십대 중반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결혼하지 않은 채 늙어가고 있는 한 남자의 마음에 행복이라는 부푼 꿈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지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나름대로의 괴로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애씁니다. 인생의 해답을 찾으려 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아주 흔하지만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답을 찾기 쉽지 않은 질문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쉽게 그 답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한 삶’일 테니까요. 저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무척 행복했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책, 《오만과 편견》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만과 편견》을 이미 읽으셨다면 이와 비슷한 행복을 선물하는 프랑스의 극작가 마리보(Marivaux)의 희극을 추천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우리가 가장 행복할 때는 바로 사랑이 싹트기 시작할 때(그 설렘이란!)와  그 사랑이 결정화(結晶化, cristallisé)될 때가 아닐까요? 마리보의 희극에는 그런 행복이 가득합니다. 

성미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문학작품은 열린 가슴 안에 행복을 선사합니다. 저는 가끔 제 제자들에게 이런 종류의 행복함을 선물할 작정으로 마리보의 작품을 강의합니다. 아이들은 책상 밑 스마트폰의 해로운 SNS와 잡담을 멈추고 강의에 집중합니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볼 때와는 다른, 뭔가에 부푼 듯한 표정을 봅니다. 행복에 젖은 아이들을 보는 것만큼이나 행복한 문학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가슴 뛰는 일입니다.     


행복을 거론하다가 갑작스런 반전인 듯하지만, 이번엔 에밀 졸라(Émile Zola)의 《제르미날(Germinal)》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에는 19세기 프랑스 노동자의 처절하게 비참한 삶이 잔혹할 만큼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프루스트를 친구로 두고 보들레르의 시를 암송하며 고독한 영혼인 듯 젠 체하던 저에게 ‘역겨우니 정신차려!’라 외치며 빰을 때리듯 다가온 작품입니다.

작가 모파상(Guy de Maupassant)은 ‘도덕 또한 가진 자의 소유물’이라고 했습니다. 비참한 현실을 맞닥뜨려야 하는 삶에서 비껴선 저와 같은 사람들은 비참하고 끔찍한 삶을 머릿속으로만 상상하고 가공해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얼마나 역겨운 사치입니까?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비참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 어디에나 실존했고 여전히 실존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거장 졸라는 너무도 사실적으로 가감없이 들려줍니다. 운이 좋아 직접 경험할 수 없었던 비참한 삶을 이 작품들을 통해 들여다봅니다. 내가 아닌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이의 삶과 제 삶을 생각하고 도덕과 정의, 이상과 현실, 제법 그럴 듯한 감상적 역겨움에 대해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일이란 없는 법입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무슨 말을 써야 할지 그저 막막하기만 했는데,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니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제 부인의 책에 제 글이 너무 많은 분량을 차지하면 안될 것 같아, 몇 권의 책을 아주 간단히 다루고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며칠 전부터 원고의 진행상태를 이상하리만큼 다정하게 물어오는 주영이 무섭기도 합니다. 저는 주영이 친절하거나 다정할 때 무척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제 그녀가 한국어로 혼잣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제 욕을 하는 것 같았지만, 모르는 척했습니다.

      

에른스트 윙거(Ernst Jünger)의 《강철 폭풍 속에서(In Stahlgewittern)》. 
세계 제1차대전의 실상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충격적이지만 신선하게도 ‘전쟁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전쟁에 참가했던 작가 윙거는 치열한 전쟁터 속에서도 인간성의 아름다움과 용기에 대해 말합니다. 그 속에서 단련된 영혼을 그립니다. 제게 전쟁과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생각을 제시해 준 작품이었습니다.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한 여인의 감정을 미묘하게 잘 분석한 작품,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비둘기의 날개(The Wings of the Dove)》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책입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강요되는 ‘경건’이라는 고약함을 생각하게 해 준, 라 파예트 부인(Madame de La Fayette)의 《클레브 공작 부인(La Princesse de Clèves)》. 이 책에서는 지성과 감성적 표현의 극치를 맛보며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이밖에도 라틴어를 좋아하고 가르치는 저에게 로마 원로원의 혁명을 체험시켜 준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의 《카틸리나 반박문(In Catilinam)》과 아우구스투스 후임자들의 타락과 부패를 알려 준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의 책들을 제 인생책으로 꼽겠습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인생책’이라는 말을 되뇌어 봅니다. ‘인생’이라는 단어는 ‘책’이라는 단어와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이란 우리네 인생과 함께하는 좋은 벗인 것 같습니다. 때론 다정하게 다독여주고 때론 따끔하게 충고하며, 어떨 때는 생각지 못한 고민을 털어놓아 당황하게 만듭니다. 책이란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그런 조금은 골치 아프지만 사랑스러운 친구입니다. 저는 그런 친구가 제법 많고 앞으로도 계속 사귀어 나갈 생각입니다.      


아, 침실에서 “더러!”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는 이 한국어 문장을 무척 자주 들어서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습니다. 침대 밑에 숨겨놓은 제 양말을 회오리바람이 발견한 모양입니다.

저는 맹세컨대, 그 양말을 어제 반나절밖에 신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폭풍으로 변하기 전에 이 사실을 얼른 설명하러 가겠습니다.         




● 지금까지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사전 연재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프랑스 책벌레이자 우주 최강 오지라퍼 남편을 둔 한국 욕쟁이 부인의 '미치지 않기 위해 쓴 남편 보고서'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는 6월에 출간 될 예정이니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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