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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에스더 Jul 13. 2024

다큐멘터리 번역하다 토하는 이야기

다큐의 굴레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천신만고라는 출산을 하고도 어느새 둘째를 생각하는 엄마들처럼, 작업할 때마다 후회하면서도 계속 받는 장르가 있다. 다큐멘터리다. 내 아무리 나이 먹고 진지한 인간이 되었더라도 나의 뇌 구조와 언어 감각은 다큐멘터리의 그것과는 판이해서 매 작업이 고달프다. 1년 넘게 다큐멘터리만 번역한 적이 있는데 단언컨대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



그 와중에 BBC 다큐멘터리는 소재가 참신하고 기획력이 훌륭해서 작업할 때마다 배우는 점이 많다. 그러면 뭐 하나. 인종, 문화, 종교 등 갖가지 주제를 다루는 동안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너무 고생스러웠다. 다큐멘터리 번역은 속이 울렁일 정도로 어렵다. "차라리 청양고추 100개 먹을게요! 하루 종일 두리안 냄새 맡을 테니 이것만 안 하게 해주세요!"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그럴 때마다 다시는 다큐멘터리를 안 하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면서도 다음 의뢰 나온 다큐멘터리 샘플을 훑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응원한다, 금붕어 라이프!)



이게 다 번역가는 일을 골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전문 번역가도 SF, 로맨틱 코미디, 판타지 등 여러 장르를 오가겠지만 나같이 "드라마 번역가"를 표방하는 사람도 결국에는 드라마부터 영화, 다큐멘터리, 리얼리티 쇼, 스포츠 방송, 시사... 그 폭넓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해야 입에 풀칠할 수 있다.



이렇게 다큐멘터리와 내외하는 까닭은 1)어렸을 때 책을 안 읽은 역사 2)진중한 생각과 달리 그렇지 못한 말투에 있다고 본다. 집에서 미드 보던 친구가 "이거 네가 번역했지?"라고 전화할 정도로 자막 번역에는 번역가의 말투가 묻어난다. 그러니 아무래도 차분한 사람이 정적인 다큐멘터리를 잘하고, -편견으로 들리지 않길 바라지만- 진중한 성격인 사람의 번역이 훨씬 매끄럽다. 나처럼 평소에 유치한 공상을 좋아하고 장난기 장전하고 말하는 사람은 다큐멘터리와 상극이다.



영상 번역 업계에서 최고 요율을 받으며 자부심마저 느끼던 회사와도 결국에는 다큐멘터리 때문에 결별하게 됐으니 악연이 깊다. 난 다큐 인간이 아니라 드라마 인간인데... 물론 어디까지나 내 얘기다. 나만큼 장난을 좋아하고 다큐멘터리를 힘들어하면서도 작업할 때만큼은 180도 돌변해 완벽하게 일을 마치는 분들이 많다. TV에서 외국 다큐멘터리 하나를 즐겁게 보셨다면 피눈물 닦아가며 고생했을 번역가들을 한 번씩 생각해주시기를. 나도 다큐멘터리와 친해지고 싶다. 이 짝사랑은 언제 끝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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