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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에스더 Mar 18. 2024

쌍욕도 받아드려얍죠. 나는야 정신 노동의 달인.

연예인도 정치인도 아닌데 대중에게 동급으로 욕먹는 사람

쌍욕도 받아드려얍죠. 나는야 정신 노동의 달인.

드라마 번역가라는 타이틀로 첫 글을 올렸지만 나는 이게 얼마나 생소한 직업인지 잘 안다. 허세 부려 드라마 번역이라고 썼으나 내가 하는 일을 크게 둘러 말하자면 영상 번역이라는 일에 속한다. 출판 번역, 산업 번역과 더불어 대표적인 번역 분야 중 하나로 TV나 OTT, 기내, 극장 등에 상영되는 각종 영상물을 번역하는 일이다. 글자 수에 제약이 없는 다른 번역과 달리 16자 제한 + 두 줄에 사활을 걸어야 하므로 두 줄의 승부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나도 캐리처럼 살 줄 알았지.



영상 번역에는 고유한 기술이 필요하다. 회사마다 다른 번역 프로그램을 쓰는 경우가 많아 흡사 프로그래머처럼 각 회사의 툴을 다룰 줄 알아야 하고 OTT면 OTT, 방송사면 방송사, 하청 업체면 업체마다 선호 또는 금지하는 룰이 많아 몇십 장에 달하는 번역 방침을 꿰고 있어야 한다.



A사: 저희는 16자에서 한 자도 넘으면 안 됩니다.

B사: 16자가 넘어도 두세 개까지는 괜찮습니다.

C사: 보조용언 띄어쓰기를 반드시 지켜주세요.

D사: 저희는 보조용언 상관없습니다.

E사: 외래어는 국립 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에 꼭 맞춰주세요.

F사: 어색한 외표법 대신 널리 알려진 표기로 부탁합니다.

G사: 자극적인 단어는 꼭 순화해주세요.

H사: 욕이나 19금 단어 살려주세요. 찰지게요!

I사: 의역은 가급적 피해주세요. 원문에 충실히요.

J사: 자연스럽게 의역해주세요.



왕의 남자 속 광대 공길이처럼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줄 위에서 춤춰야 하는 직업. 그냥 잘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기에는 결과물을 판단하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대중이 없는 이 바닥.


영상 번역은 단순히 캐릭터를 면밀히 관찰해 주인공의 말을 번역하는 것 이외에 기술이 들어가는 일이다. 줄을 나눌 때는 가독성과 의미군을 고려해야 하고 극장 영화는 넓은 스크린 때문에 자막을 짧게 써야 하고 자막용 번역과 더빙용 번역은 아예 다른 방식으로 작업한다. 당연히 시청자는 모른다. 대충 영어 회화만 할 줄 알면 드라마 번역쯤은 우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명백한 오류가 아님에도 악플러들은 "내 마음에 안 드는 번역"이면 커뮤니티에 줄기차게 글을 올린다. "요새 영어 못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어떻게 번역가라는 사람이 번역을 저따위로 하냐. 내가 해도 저것보다 낫겠다."


밑도 끝도 없이 번역가를 까내리는 그들에게 정말 번역이 그리 쉬워 보이는지 묻고 싶다. 출발어의 문법을 명확히 아는 동시에 뉘앙스를 제대로 간파하는 센스가 있는지, 도착어의 말맛을 살려 효과적으로 문법에 맞게 옮기는 역량이 있는지, 각기 다른 배경을 빨리 소화할 수 있는 폭넓은 문화 이해 능력까지 그들은 갖춘 걸까. 영상 번역가는 드라마나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전문 다큐까지 다루기 때문에 문화, 역사, 종교 등 폭넓은 지식이 필요한 일이다.


간단히 예를 들어 LA 폭동이 왜 일어났는지, 왜 호주에 영국인 이민자가 많은지, 유타에는 모르몬교도가 왜 많은지, 각국의 성차별 문제는 어떤지, 전쟁 이후 미국과 베트남 사이는 어떤지, 왜 유모차가 아닌 유아차를 써야 하는지, 미얀마와 버마의 차이가 뭔지, Body Positive가 뭔지 꿰고 있어야 하는 직업.


영상 번역의 또 다른 특징은 데드라인이 짧다는 것인데 몇 달간 번역할 수 있는 출판 번역과는 달리 드라마는 2-3일, 다큐멘터리는 5일, 영화는 일주일 등 때에 따라 다르지만 정말 바쁜 곳에서는 60분짜리 드라마를 매일 납품해 달라는 의뢰를 하기도 한다. 시청자들이 가장 욕하는 오역이나 저품질 문제가 여기에서 탄생한다. 그런 시스템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 일면식 없는 번역가를 인신공격하는 그들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래서 번역가 처우가 개선되어야 한다. 양질의 번역을 위해. 시청자를 위해. 번역은 기술이다. 외국어만 잘하면 되는 일이 절대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일 절대 못 한다. 현실은 노트북, 모니터, 컴퓨터 두세 대씩 끼고 폐인처럼 책상 붙박이 모드. 잘못 보면 24시간 게임만 하는 백수.



변명 아닌 변명을 더 하자면 빠르게 돌아가는 방송계 특성상 충분한 시간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드라마 한 시즌에 번역가 다섯 명 이상이 투입되기도 하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낮이며 밤이며 소통하면서 공통 사항을 통일하기도 한다. 이마저도 번역가 간 소통이 안 되는 업체에서는 결과물이 중구난방이 된다. 신문에 나는 OTT 번역 문제 등이 여기에서 나온다.


최근 번역을 맡은 한 외화는 각 시즌에 걸쳐 등장인물이 100명이 족히 넘는데 나를 포함한 번역가 셋이 100여 명의 호칭과 말투 전체를 통일했다. 각 사람이 물건이나 장소를 부르는 명칭을 통일해야 하는 것은 물론, 이를 시즌이 마무리될 때까지 잊지 말고 유지해야 한다. 1년 뒤 시즌 2가 나온다? 다시 외운다!


-제임스는 부모를 부를 때 엄마, 아빠로 (어머니, 아버지 X)

-마이클은 아버지, 어머니로

-제임스와 마이클은 서로 이름 부르는 반말로

-제임스와 마이클 누나 세라는 서로 존대로

-마이클과 매형 스티븐은 1화에서만 존대로

-제시카가 케이티랑 대화할 때는 '나' 존대로

-제시카가 카일리랑 대화할 때는 '저' 존대로

곱하기 100이다.


이쯤에서 영상 번역가의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다. 이마저도 첫 시즌을 맡으면 다행이지, 역사 깊은 드라마의 다섯 번째 시즌 그것도 24개 에피소드 중 어중간한 13화를 번역한다고 생각해보면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한 드라마를 한 사람이 통으로 맡는 거 아니냐고? 굵직한 업체의 굵직한 드라마가 아닌 이상 드문 일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번역하다 보니 실수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시스템. 간혹 2주 정도 시간을 넉넉히 받는 경우도 있지만 그 2주를 한 드라마, 한 영화에만 할애한다면 번역가는 손가락 빨며 투잡 쓰리잡을 뛰어야 한다.


Did you eat?이라는 간단한 문장을 예로 얼마나 많은 번역이 나올 수 있는지 확인해보자.


밥 먹었니?

밥 먹었느냐

밥 먹었어?

밥 먹음?

밥 먹었슈?

밥 먹었어요?

밥 드셨어요?

진지 잡쉈수?

밥은?

식사했어?

식사하셨어?

식사는 했고?

식사는 했나요?

식사는 하셨소?

끼니는 때웠냐?


이렇게 끝이 없고 발화자의 성향이 어떤지, 상대가 누구인지, 둘의 관계가 뭔지, 표정이 어떤지, 앞뒤 배경이 무엇인지에 따라 번역은 천차만별이 되기 때문에 고려할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내가 맡는 작품 하나하나에 열과 성을 다 쏟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40분짜리 드라마 한 편에 100만 원쯤 준다면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허투루 임하는 번역가는 단 한 명도 없다. 극 중 여자와 남자가 데이트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반말을 할지, 계속 존대를 유지할지에 다섯 명이 모여 일주일 동안 고민한다. 시청자가 읽는 자막 한 줄 한 줄은 번역가의 고민과 걱정이 그대로 녹아든 자막이다.


드라마, 영화, 영상 번역가는 1차로 자체 감수 하며 나에게 까이고, 2차로 내부 감수자에게 지적당하며 까이고, 업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 까이고, 유명한 작품에 실수 한 개라도 했다가는 온라인에 박제되어 온 국민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인다. 누군가의 밥줄이 끊기는 사태다. 미용사가 하루 커트를 못할 수도 있고, 제빵사의 빵이 하루 퍽퍽할 수도 있고, 사진사의 사진이 과노출로 망할 수도 있다. 번역가에게도 관대한 대중이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영상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밥을 벌어먹고 산다.

나는 정신노동의 대가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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