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졸업을 하려면 여러 조건 중 영어점수가 있어야 하는데, 그 영어 점수가 죽어도 죽어도 안 나오던 시기가 있었다. 이미 졸업을 위해 필요한 수업 정규과정은 다 이수했고, 논문도 제출해 놓은 상태, 영어 점수만 커트라인을 넘으면 되는데, 그게 참 안 되더라. 점수가 높지도 않았다. TEPS 600점 이상. TOEIC 기준으로 700점. 보통의 시험 100점 만점으로 본다면 70점 정도? 근데 그게 미친듯이 안 넘었다. 아니 못 넘었다. 시험을 연달아 1년 넘게 매달 치뤄서 열번 넘게는 본 것 같은데, 그 중 596점 맞은 적도 있고 590, 588점 이런 식이었다.. 독해 같은 경우는 10점 짜리 한 문제도 있었으니, 한 문제 차이로 커트라인을 못 넘고, 졸업을 못하고, 인생이 곤두박질 치는 것만 같던 시절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 서울대에대학원으로 들어가 열심히 공부하고 배우고 연구했으나, 졸업을 못 하는 굴레에 단단히 갇혔다. 자존감은 없어지다 못해 바닥을 치고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서울대 대학원에 들어가기만 하면 인생이 바뀌는 줄 알았다. 그런데 문제는 들어갔으나 나오질 못하네?졸업 시기를 한 학기, 한 학기 연장할수록 가족, 친구, 교수님, 선배후배들 눈치가 보였고 모두를 피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거울을 볼 때마다 그 점수 하나 못 넘는 내 자신이 이해가 안 되고 용서도 안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굴레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아마 안 될꺼야.' 라는 생각 속에 자신을 밀어넣었던 것 같다. 언제나 강단 넘치던 내 인생인 줄 알았는데, 이런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야 느껴본다. 되짚어 생각해보니 몹시 낯설다. 원하는 시험 성적이 반복해서 안 나오다보니 자신감이 없어지고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으로 마음을 가득 채웠던 것 같다. 졸업을 유예하는 한 학기, 1년, 2년의 기간이 인생에 정말 짧은 순간이라 조금 쉬어가도 된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격하게 공감하지만, 그 때의 나 역시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 시기 나는 연예인의 자살 뉴스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예전에도 있었던 뉴스들이었지만 졸업을 연기하고 학교를 다니며 영어 시험 하나를 위해 그 기간을 보내던 시기라서 그 소식은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무서웠다, 내 자신이. 독하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봤는데 한 순간에 나른해지더니 끔찍한 생각에 공감이 되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왔다. 대학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영어 시험은 집에서도 준비할 수 있고 시험볼 수 있으니,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정신적, 마음의 안정이 필요했던 것 같다. 시골 부모님 스타일의 우리 엄마, 아빠는 그렇게 돌아온 딸을 그냥 아무 말 없이 보듬어줬다. 그래서 시험은 언제 볼거냐, 실험실은 어떻게 할 것인지, 자취방은 어떻게 하고, 취업을 할 것인지, 박사 과정을 진학할 것인지 어느 하나의 질문 없이.. 그래, 잘 왔다 하셨다...
매달 시험을 보며 여름을 보내고, 그 해 졸업을 위한 마지막 기간의 시험까지 커트라인을 못 넘고 나니 허무해졌다. 없던 자존감, 자신감이 남은 게 있었던 마냥 더욱 갉아 먹히는 것 같았다. 매달 보는 시험에 따라 점수 나오는 하루 이틀은 죽을 맛, 다시 마음 잡는 2~3일, 억지로 공부하는 기간 등의 반복에 단단히 지쳤다. 그리고 때려치우기로 마음 먹었다. 아, 진짜 못 하겠네..."TEPS"라는 미개 생명체가 나를 좀 먹듯이 갉아먹고 있었다. 지나고 보니 삶에 이런 순간들이 있다. "시험"이란 이름으로 "취업"이란 이름으로, "합격"이란 이름으로, "돈"이란 이름으로. 각각 다른 이름을 갖고 나타나서 나 자신을 좀 먹는 순간들.. 아직도 모르겠다, 그런 순간들을 슬기롭게 버티는, 지나가게 하는 묘안이 있는건지..
엄마한테 주먹밥집 장사를 해야겠다고 말했다. 장사를 꼭 한 번 해 보고 싶었다. 사람 좋아하니 너무 잘 할 것 같았다. 엄마가 그래 하시며 일단 주먹밥집에서 2년은 일해보라고 하셨다. 객기 넘치는 딸에게 우문현답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솔직히 속으로 백번 생각했다. '내가 주먹밥집 하려고 그 고생하며 서울대 대학원까지 갔나, 에라이...' 그런데 결정적으로 돈이 없었다. 대학 생활 내내 아르바이트, 과외를 해서 용돈을 벌었고, 대학원 시절에는 적은 월급을 받았고, 그 마저도 뛰쳐 나온 시기에는 돈이 없었다. 모아 놓은 용돈도 3~4개월이 지나니 바닥이 보이고, 엄마 아빠한테 손 벌릴 수도 없는 노릇. 현실 앞에 학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무 힘도 없었다. 집 앞의 파리바게트에서 저녁 아르바이트를 모집한다는 전단지를 보고 "우와, 날 위한 알바인가보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반가웠다. 그렇게 아주 오랜만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관악산 다음의 이력이 파리바게트가 될 줄은 몰랐지만 그렇게 또 새로운 삶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