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rsat Sep 21. 2020

엄마는 왜 안웃어?

쵸코파이 시엠송 같기를 바라는 마음

웃음 에너지가 그립다



생각해 보니 나는 잘 웃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도 뭐가 그리 좋다고 낄낄대며 웃기도 잘했다. 심지어 어쩜 웃을 때 그렇게 환하게 웃냐며 내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고 말해 주는 사람도 많았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 입가에 머무는 미소로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며 웃을 수 있는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요즘 들어 ”웃을 일 없는데 너 때문에 웃는다 “라는 이야기를 가끔 할 때가 있다. 그만큼 나는 웃지 않는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조차도 남과 이야기할 때 나오는 이야기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웃지 않기 시작했다. 특히 가족들에게 유난히 나는 웃지 않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가족들과는 웃을 일이 생기지 않았고 웃을 일이 없어졌다. 언제 웃었는지 기억에도 가물거릴 정도다. 가족과 웃을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현재의 나는 그러하다. 웃으면 복이 와요. 웃음은 만병통치약이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웃음치료 등 웃음은 좋은 에너지가 가득한데 나는 이 좋은 에너지를 느끼지 못하고 살게 된 것인지 마음이 무거워진다. 삶이 나에게 웃음을 빼앗아 가버린 것인지 내가 삶 속에서 웃음을 잃은 건지 모르겠다.




우리 부부는 참 지겹게도 싸운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처럼 애 넷을 키우며 참 다사다난한 일들이 벌어지면서 여러 가지 이유에서 감정에 상처를 주는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진다. 그러다 보니 거의 365일 중 300일은 냉랭하고 좋지 않은 분위기인 것이 현실이다. 이런 분위기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100% 영향이 가게 되는 것이 안타깝지만 대부분의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지게 된 이유를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도 아이들이다. 거기에 온종일 내가 처했을 수많은 아이들과의 전쟁에서 지친 나의 마음과 몸 상태는 오롯이 가족들에게 표출이 되고 힘들게 일하고 들어온 남편은 안중에도 없게 된다. 행여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감정에 휘말리게 되는 사건들이 겹치기라도 하면 나의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 예민함의 강도가 최고치에 다다르기까지 하는 상황도 종종 생긴다. 그런 나의 온몸엔 육아에 찌들어서 항상 짜증의 전력이 강하게 흐르고 있다. 자칫 손을 대면 내 몸의 고압에 감전되어 더 극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남편은 생계를 위해 경제 활동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줄 아냐며 그런 나를 비방하고 비판을 일삼는다. 이런 둘의 냉랭한 기운에서 빠져나가는 에너지 소모량은 엄청나게 크다. 남편은 나 이외에 가족들의 마음을 참 잘 이해해주고 알아차려 그 마음을 헤아려 준다. 사 남매는 그런 아빠를 잘 따르고 좋아한다. 코로나로 인해 10개월 동안 24시간을 온전히 아이들과 붙어 지내는 상황이 크고 작은 마찰들이 쌓여 서로의 감정이 골이 깊어지며 내 마음을 몰라주는 가족 특히 남편이 야속하고 밉기만 하다. 나의 얼굴과 말들은 짜증과 화가 가득한 표정과 말투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사 남매는 그런 나를 밉다고 싫다고 한다. 심할 땐 엄마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할 때도 있다. 웬만한 것은 아빠가 모두 할 줄 알고 해 준다는 생각도 깊다. 집안에서 나는 항상 악역의 아이콘이다.     



엄마의 진짜 마음



요즘은 지인들과 카톡의 대화나 전화 통화로 소통하는 경우가 많다.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에게 남편이 아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조금 있으면 너희 엄마 웃는다.?” 가족들은 나에게 카톡 하고 전화할 때만 웃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양쪽의 입꼬리가 살포시 올라가 있다는 것을 자신인 나도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사실 남들은 나에게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 때를 부리거나 귀찮게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의무적으로 밥을 해주어야 하거나 학습적인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나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힘들고 지친 나의 마음을 같은 마음이라며 공감해주고 알아주고 서로 위로의 말로 격려를 해준다.  와중 오가는 대화에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웃고 있다. 지인과 통화를 하고 대화를 마무리 지으며 인사를 하는 나에게 “이제  웃는다. 전화 끊으면 이제  웃는다. 웃지 않을 거야!” 하며 막내딸이 혼잣말하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더니 “엄마! 그런데 엄마는   웃어?” 하며 물어보는 것이다.  말에 나는 “웃을 일이 있니? 웃을 일이 없다. 없어.”라고 대답해 버렸다. 결국, 막내의 말은 엄마는 남들과 이야기할 때는 웃는데 우리 가족에게는   웃냐는 이야기인 것인데 나는 차갑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버린 것이다.   




누군가는 나만 웃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람들 대부분이 그냥 삶에 찌들다 보니 여유가 없어 본인들도 웃을 일이 별로 없다고 한다. 어느 날 순간적으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서도 나는 웃는 모습이 아닌 무표정 아니면 짜증이 나서 찌푸려져 있는 표정을 짓고 있다. 가족들과 웃을 일을 만들고 찾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스스로가 상처 받고 지쳐 있는 나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웃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무리 내 마음을 표현하고 수없이 알아달라고 외쳐도 알아주지 않는 가족, 남편이 야속하고 밉기만 하다는 생각이 나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어서 가족에게는 웃지 않는 아내, 웃지 않는 엄마가 되어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나는 웃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고 웃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유머러스하기까지 한 사람이다. 이런 내가 그저 나의 삶이 힘들도 지쳐 있다는 이유로 웃지 않는 사람이 되어있다는 것이 슬프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다.      

고성을 지르고 짜증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나도 가족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 짓고 소리 내 웃고 싶다. 아직 나의 마음이 미성숙한 탓인지 초코파이 선전에 나오는 시엠송처럼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만 봐도 알아주길 바랬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표현하고 말을 했으면 됐다고 생각해버리고 나를 알아주지 않는 남편과 가족에게 웃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쩌면 나 혼자 마음으로만 이야기하고 끝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가족들도 나에게 수없이 이야기했지만 그들의 말이 내 귀에는 들리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성숙한 나의 마음에서 비롯되어 가족들에게 웃지 않는 사람이 되어있는 것은 아닐까?   




가족이기에 나의 위치에서 헤쳐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남편에게 격려의 말 위로의 말이 듣고 싶은 것이었을 것이다. 내가 짜증을 내고 화가 가득 차 있는 모습에서 저 여편네 또 시작이구나! 이놈의 집구석은 평온할 날이 없구나!라는 생각으로 나를 질타하기 바쁜 그에게 단지 오늘 하루도 고생했다. 애썼다. 짜증이 날 만했겠다. 화가 날만 하다. 아이들과의 충돌에서도 그저 나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보다는, 네가 소리 지르고 아이들을 혼을 내면 더 큰소리로 대항하기보다는 내가 한숨을 돌릴 수 있는 말 한마디가 그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또한 기대에서 비롯된 나의 욕심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가족을 향해 웃을 수 있는 환경을 내가 만들어야 하는데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나의 이기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결과 일지도 모르겠다. 막내딸의 질문에 다시 말하고 싶다. “엄마도 웃을 줄 알아. 엄마도 잘 웃어. 막내딸이 엄마 많이 웃게 해 줘. 너 때문에 웃는다.”라고 말하며 활짝 웃어주고 싶다. 이 마음이 가족을 향한 나의 진짜 마음이다.          

    





작가의 이전글 내 마음은 총각무 김치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