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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작 Jan 02. 2022

달력



새해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새해인사, 다이어리, 새 달력, 일출 보는 것, 카드, 다짐 등...

오늘은 달력에 대해 얘기해 볼까 한다.



 학창 시절, 우리 어머니는 갈비집을 하셨다. 홀에는 4인 테이블이 8개였고, 방은 1호, 2호, 3호실이 있었다. 내실과 주차장까지 더하면 꽤 큰 규모였다. 덕분에 중고등학교 때 도시락은 늘 갈비와 밥이었다. 하지만 소풍 때는 창피하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의 김밥을 부러워했었던 것 같다. 좋은 점은 정육점을 함께 해서 다양한 고기와 대형 냉장고 안의 콜라도 실컷 맛볼 수 있다는 거였다. 정육점과 식당 사이에는 카운터가 있었고, 벽면에는 보석당이라고 적힌 달력이 있었다. 크기는 B3 정도였고, 습자지로  만들어졌으며, 하루가 지나면 한 장씩 뜯는 스타일이었다. 365장이나 되니 아주 얇었나 보다. 파란색은 토요일, 빨간색은 일요일, 평일은 검정 숫자가 적혀있었다. 십이지간 동물 그림과 음력 날짜도 있었으며, 그 밖에 시계 수리, 결혼 예물 같은 글자도 빼곡히 적혀있었다. 소위 시즌이라 불리는 결혼 피로연과 입학, 졸업식이 있는 날이면, 빨간 파란 날의 흰 여백에는 볼펜 자국 또한 가득이었다. 그 이유를 들자면, 당시 서울 시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가게는 점심 저녁 시간 전후로 단체 예약 손님이 꽉 찼었다. 기계공학과 11시 반, 짱구네 다섯 시 반, 강남 예식장 2시…. 이렇게 쓰다 보면 종이가 성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장사를 마치고 밤 11시가 넘어 달력을 찢을 때면 테이블마다의 손님 얼굴과 메뉴가 떠오르기도 했다. 나는 중학교 3학년쯤부터 카운터를 보았다. 내성적이었기에 쑥스러웠고 손님에게 무뚝뚝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몇 번 왔던 사람들의 인사에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말 그대로 추억이자, 경험의 한 조각이었다.      



 작년 그러니까 이틀 전, 나는 묵묵히 사무실 책상을 정리했다. 굴러다니는 이면지며, 벽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포스트잇이며, 뜯고 분쇄기에 넣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해졌다. 그런데, 탁상달력만큼은 다시 뒤적이면서 1년을 돌아보게 되었다. 전업주부였을 때는 아이들 학부모 상담, 학습발표회, 중간고사 이런 것들이 다였었는데, 직딩맘이기에  달랐다. 기업 이름과 컨설팅 날짜. 교육 일정이 좁은 칸 안에 숨 막힐 듯, 과중한 하루였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과감히 재활용 종이 바구니에 던져버렸다. 모닥불 위로 장작 던지듯이.

 슬슬 기업이나 학교들이 탁상달력을 돌릴 때가 되었다. 아날로그이지만 어서 받기를 바랐다. 식구들 생일과 비대면 수업 일정도 적어 넣어야 했다. 넓고 얇지 않아도 좋았다. 흑호의 해라고 해서 동물 그림이 그려 있지 않고, 서른한 칸의 빡빡하고 딱딱한 종이여도 좋았다. 탁상달력은 머릿속 과부하를 달래주는 것 같았다. 휴대폰 엣지의 달력은 누르고 눌러야 완성되는 것이어서 편하기도 하지만 의무감이 들었다. 트랜드에 뒤지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탁상달력이 좋았다. 글자를 쓰기에 좁지만 쓰다 보면 그것도 공간 활용이 되었다. 좁은 책꽂이도 쓰다 보면 유용한 것처럼. 탁상달력은 계획과 시간과 장소가 색깔별로 정리되어, 머릿속에 그대로 입력되었다.      



 어머니는 해마다 네모 은행, 세모 은행에서 달력을 가지고 오시는 것 같았다. 소파 위에 걸려지는 은행 달력에는 나의 탁상달력보다 훨씬 더 과중한 일정이 들어차 있었다. 가족 열세 명을 비롯한 친지와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볼 때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끔 한 달이 지나도록 한 장을 찢는 건 잊으셨지만 그 많은 일정이 아웃풋 된다는 사실은 더 놀라웠다. 이제 김밥 싸 달라할 애들은 다 시집 장가갔고 시즌이라고 해봐야 연중 병원 일정밖에 없는 어머니. 아들딸들 좋아한다고 어릴 적 먹었던 반찬을 해주실 때면 반찬 위로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사랑합니다라고 자주 고백하지 않는 무뚝뚝한 딸을 위해서, 묵묵히 돼지갈비를 구워주셨다. 나의 생일.




_그림 출처:북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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