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절된 생각
꽤 남은 삶이라는 착각은 살아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볼멘소리를 하는 이유도 그리고 외면하지 못하는 하루의 슬픔도.
이 세상은 영원한 것이 없는, 당장 내일도 끝날 수 있는 시간만을 살고 있을 뿐이었다.
한 남자
아릿해진 눈으로 창밖의 비를 보고 있었다. 나는 늘 내 마음을 달래주는 오지랖의 비를 좋아했기에. 그런데 처음엔 약하게 떨어졌던 비는 쿵쾅거리는 천둥을 동반하더니 그 소리가 점점 커져 주위의 차분함을 방해했다. 나는 왠지 시끄러워 창문을 닫고 침대에 앉아 맞은편 큰 거울과 마주쳤다. 덥수룩한 머리, 둥근 얼굴, 가냘픈 눈과 두꺼운 입술. 그리고 술을 좋아해 라면을 볶아 안주로 먹기 좋아하는 나는 군대를 나와 알바로 근근이 살고 있었다. 그러다 잦은 손님과의 마찰로 지금은 백수, 내 이름은 한필구로 올해 스물여섯 살이다. 나는 오래된 연인, 햇살보다 눈부신 여자친구가 있었다. 청초한 얼굴에 야리야리한 그녀. 나는 침대 옆 작은 서랍에 담긴 그녀의 사진을 날마다 꺼내 보았다. 그러면 사진 속 천진난만한 모습에 이끌려 보고만 있어도 절로 미소가 번지며. 나는 시무룩했던 얼굴이 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와 만남이 시작된 건 고등학교 3학년 시절, 풋풋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해 겨울 고 3 끝 무렵 잦은 눈으로 날씨가 추위로 집요할 때, 난 절친으로부터 지금의 여자친구, 박여정을 소개받았다. 첫눈에 호감이 있었는데, 그건 단발머리, 한쪽으로만 들어간 보조개, 하얀 피부의 그녀가 나의 이상형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보고 맑게 웃으며 내 얘기를 곧잘 들어주는 그녀. 그 모습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벚꽃과도 같았다. 그래서 우린 솔직하게 마음을 나누었고, 학업과 친구와의 갈등, 그리고 미래에 대한 포부까지도 얘기했더랬다. 얘기하면서 많은 부분에서 생각이 비슷했던 여정은 나와 그렇게 닮아있었으니. 난 공부를 잘했던 그녀와 같은 대학을 가려 막바지 용을 쓰며 열심히 공부도 했었다. 그러나 결국 같이 입학하진 못했고, 그저 그 주변에 집을 얻어 그녀를 응원하는 게 다였다. 하지만 봄 같은 그녀는 변함없이 내게 따뜻했고, 졸업 시기엔 사회 출발에 대한 강한 의지를 불태우며 보란 듯이 빠른 취업을 했다.
약간의 섭섭함이 있다면 그녀가 주위 사람들에게 나와 사귄다는 것을 티 내지 않고 거리를 두는 것인데 나는 그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녀는 미래에 대한 꿈이 컸고, 그 꿈을 꼭 성공하길 바랐으니까. 사랑한다면 그 정도쯤이야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 쏜살같이 벌써 7년이 지나고. 나는 지금도 여정에 대한 마음이 변함이 없다. 아니, 그녀에게 향한 애정이 더 커졌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녀를 만나기 쉽지 않고. 어쩌면 내가 백수이고 그녀는 회사를 다니고 있는 탓에 스스로 주눅 드는 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녀가 날 만날 시간조차 내지 않는지도.
그래서 그럴까. 설마 우리 사이가 이제 권태기가 시작한 것인가. 그래서 나는 여정에 대한 감정을 조금은 절제하며 묶어두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곁에 두려 안간힘을 쓰면 쓸수록 내게서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기에.
아, 하나 그렇게 다짐해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 사랑.
나는 마지막,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그녀의 집으로 다시 찾아갔다. 어느덧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한 것이다. 그때, 그녀가 집을 나와 어디로 가는지 길을 나서는 중이었고. 짧은 쇼트커트에 어울리는 하얀 코트. 여전히 그녀의 성격을 보여주는 깔끔한 정장 스타일이다.
'나의 사랑, 여정'
그렇게 차려입은 여정은 바삐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가는 내내 미간을 찌푸리며 표정이 좋지 않다. 그 이유는 뭘까.
나는 그녀의 등 뒤로 한 템포 느리게 계속 따라갔다. 따라가니 간 곳은 추모관. '추모관이라니...' 나는 여정이 누구의 죽음을 그리워해서 온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곳을 들어서니 나이를 막론하고 나란히 죽은 이들이 정열 되어있었다. 죽음이란 생각보다 가깝다는 말이 생각나며. 환하게 찍은 사진이 무색하게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여정은 두리번거리다 누군가의 사진에 꽂혀 내려다봤다. 내려다보는 시선은 미묘한 감정선이 얽혀 그녀를 복잡하게 하는 것도 같으니. 나는 그녀의 초점을 따라 나의 시선도 옮겨갔다. 그런데 거기엔 익숙한 이름, 다름 아닌 나, 한필구가 아닌가. 뭐지? 밑에 연도를 보니 최근 보름 전임이 명시되어 있고. 내가 이미 죽었단 것인데... 나는 말문이 막힌 채 짐짓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환영이 겹치듯 내 뇌를 뚫고 '윽' 하는 사이 어떤 장면이 투시됐다.
그러고 보니 그날의 기억. 찰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그 시간.
나는 그날, 마지막으로 자전거를 타고 여정을 보러 간 날이었다. 그런데 마주 오는 차가 신호를 무시했고 나를 향해 얄짤없이 정면으로 충돌했었다. 슬라이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촘촘해진 기억. 나는 분명 차를 피해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당연한 것이 언제든 내 의지로 여정을 볼 수 있었기에. 그런데 내가 죽어 영혼이라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 이제 그녀 곁에 머물 수 없는 것을. 나는 극한 고통에 울부짖으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 여자
내 이름은 박여정. 입맛이 까칠해 잊어버리곤 하는 식사시간.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나는 밥을 살기 위해서 먹는다. 그러니 마르고 말라 광대가 튀어나오고, 눈도 움푹 패어 그다지 인상이 좋지 않았다. 그런 나를 아는 엄마는 밥상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놓곤 하는데. 그렇다 해도 나는 몇 숟갈을 뜨다 끄적거리고 숟갈을 내려놓는다. 그만큼 먹는 것은 나의 즐거움이 되지 못한다. 사회생활도 마찬가지라 울며 겨자 먹기로 4년 차가 되었고 이제 내 나이는 스물여섯이 되었다. 그럼에도 친구가 없는 나는 어두운 것을 좋아해 밤이 되어도 방에 불을 켜지 않는다. 캄캄한 방에서 홀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나는 그만큼 혼자가 이유 없이 좋은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누군가 내 주위를 돌고, 매일 뒤따라와 나를 살피는 것만 같다. 그건 내가 어디를 가든 쫓아왔다. 퇴근을 할 때도 이상한 시선이 느껴지는데. 뒤돌아보면 어떤 이가 움츠려 나를 보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회사로 보내진 호소 짙은 낯선 편지들과 꽃들. 심지어 자신을 떠나지 말라는 글로 도배되어 있는 애절함. 평소 뼈만 남았다고 뒷담을 하던 회사 사람들은 낄낄대며 나를 놀리고. 도대체 시작도 끝도 모르는 선물은 장난인가도 싶어 기가 찼다. 그런데 편지 말미에 이름 한필구. 여태껏 나를 따라다니던 사람이 이 사람이었나 싶은데, 나는 그가 누군지 당장 떠오르지 않으니 더 소름이 끼친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