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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Jan 07. 2023

저녁 7시마다 새 건전지를 넣고 싶다

무한체력이 절실한 직장맘의 어느 하루 스케치

오후 5시 50분, 퇴근 10분 전이다. 회사일은 여기까지. 오늘은 저녁을 간단히 먹고 쓰다만 글을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향한다.


밑반찬과 그저께 끓여둔 미역국으로 저녁을 간단히 해결할 생각이었는데, 딸이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한다. 엄마가 만들어준 매운 떡볶이가 오랜만에 먹고 싶다는 아이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다. 체력은 이미 바닥을 찍은 상태, 오늘 저녁도 꽤 힘들겠다는 서늘한 느낌이 든다. 일단 떡볶이를 만들 만큼의 힘이 필요하다. 힘낼만한 것을 찾는데 사과는 다 먹었고 빵도 안 보인다. 문득 냉장고 문짝에 꽂혀있는 땅콩버터가 눈에 띈다. 잠시 힘내는 데에는 기름지고 짭조름한 땅콩버터가 요긴하긴 하다. 숟가락 하나 가득 퍼서 입에 넣는다. 간간히 땅콩알갱이도 씹힌다. 기운이 좀 나는 것 같다.


땅콩버터의 효과가 떨어지기 전에 얼른 요리를 마쳐야 하니 마음이 급하다. 서둘러 웍에 물을 붓고 고추장, 간장, 설탕, 참치액, 케첩을 넣고 떡볶이 국물을 만든다. 어묵에 뜨거운 물을 붓어 기름기를 제거하고, 양배추는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떡국떡은 물에 씻어 채반에 받쳐둔다. 파를 넣으면 더 맛있지만 오늘은 피곤하니 생략한다. 양념물이 작은 거품을 내며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손질한 재료들을 모두 넣고 국물맛에 충분히 우러나게 될 때까지 강불에서 끓이다가 중불로 낮추어 국물을 졸인다. 떡이 익으면 아이를 불러 간을 보게 한다. 맛이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시간을 더 투입해야 한다. 제발 맛있어라, 제발.


"오! 맛있어요. 엄마."


다행이다. 까다로운 딸의 입맛에 맞는단다. 기왕 차리는 밥상인데 딸한테 사랑이나 받자는 생각이 든다. 딸이 좋아하는 니모 캐릭터 그릇에 떡볶이를 담고 우유 한잔과 함께 일식 돈가스집에서 쓰는 1인용 사각쟁반에 받쳐 내어 준다. 일식 쟁반이 마음에 든다는 딸의 말에 피곤이 조금 가신다. 이제 나도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땅콩버터를 먹어서 인지 떡볶이 냄새를 너무 많이 맡아서 인지 배가 안고프다. 귤 2개로 저녁을 끝내야겠다.


고작 떡볶이 하나를 만들었건만 싱크대에 설거지가 산처럼 쌓여 있다. 밥그릇과 수저들은 식기세척기에 넣고 기계에 안 들어가는 웍과 몇몇 주방도구들을 씻어 정리한다. 이럴 때마다 거금을 들여 식기세척기를 산 나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어 진다.


벌써 8시가 훌쩍 넘었는데 아직 해야 할 일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예정에 없던 저녁준비로 혼미해진 정신을 빨리 붙들어 메어야 오늘 내에 나머지 일들을 해결할 수 있다.


"딸! 숙제는 다했지? 담임선생님이 불우이웃 성금 챙겨 오라시던데 얼마 가져가면 되니? 내일도 체육복이야? 그럼 지금 빨래해야 하니까 얼른 체육복 빨래통에 넣어. 감기약 먹었어? 참, 엄마가 이번달 용돈 줬던가?"


아이 상태를 말로 확인하면서 눈과 손으로는 온라인 장보기를 한다. 방방이 흩어져 있는 수건들을 모아 아이 체육복과 함께 세탁기를 돌린다. '아차, 나 아직 안 씻었네. 수건이 또 나오겠구나. 이건 내일 빨자. 다음에는 뭘 해야 하지?' 할 일을 적어둔 수첩을 펴서 확인한다. 체크카드 신청, 학원 등록하기가 남았다. '너무 피곤하고 귀찮다. 내일 할까? 안되네. 학원 등록은 오늘까지이네. 해야겠네.' 토독... 토도록... 핸드폰으로 송금을 완료한다. 핸드폰으로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게 해 준 IT기술자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10시가 다 되었는데 친구와 전화로 키득거리는 딸의 목소리가 귀에 꽂힌다. 늦었으니 그만 수다 떨고 잠자리에 들라고 아이 방을 향해 소리를 친다.


10시 반이다. 샤워하고 머리 말리고 소파에 앉는다. 집에 들어온 지 3시간 만에 엉덩이를 붙여본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다. 낮에 쓰다만 글쓰기를 마무리해야 하는데 졸리다. 이럴까 봐 아까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잠깐 눈을 붙였는데, 눈꺼풀이 속절없이 내려간다. 힘들다. 정말 방전됐다. 노트북을 가지러 갈 수 없다. 글은 내일 점심에 이어서 쓰고 자야겠다.  




내 에너지의 수명은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딱 12시간 동안이다. 나의 체력은 퇴근 즈음이면 수명을 다한 형광등처럼 깜빡거리다가 집에 들어서는 순간 한꺼번에 팍 하고 꺼진다. 그래서 저녁 7시 이후에는 살살, 쉬엄쉬엄, 조근조근 움직여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저녁 7시 이후에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그 세상의 일을 해낼 수 있게 에너지가 딱 세 시간만 더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매일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운동을 더해야 하나? 더 할 시간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보약을 먹어야 하나? 몸에서 받아야 효과가 있다는데 갸우뚱이다. 갑자기 새 건전지로 갈아 끼운 뒤 힘차게 북을 치는 분홍색 토끼인형을 클로즈업했던 모 건전지 회사의 오래된 광고가 생각난다. 건전지, 이거 좋다. 나도 그 토끼인형처럼 등을 열어서 저녁 7시마다 새 건전지를 갈아 끼워 넣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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