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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꿀권리 May 20. 2021

엄마에게 곁을 내드리지 못했다

엄마가 그립습니다.

 


“딸을 무슨 대학을 보내. 공부 잘하는 남동생이 셋씩이나 있는데 누나가 돈 벌어서 동생 공부 가르쳐야지 니 아빠는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형님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부모가 첫째부터 가르치다 형편이 안 되면 할 수 없지만 딸이니까. 공부를 못하니까 하며 안보내는 건 부모가 책임을 회피하는 거죠. OO 가 첫 째니 대학 보냅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내가 대학을 들어갈 즈음 아버지는 암으로 오랫동안 누워 계셨고, 남동생 3명과 여동생이 있었다. 큰 아버지는 우리 부모님을 걱정해서 하신 말씀이지만 듣고 있던 나는 큰 아버지가 야속했다.고개를 숙이고 흐르는 눈물을 꺽꺽 참아냈다.



부모님은 내게 그 흔한 기지배라는 말도 한번 하지 않으셨다. 동생 3명과 내 수업료를 동시에 주실 여력이 안됐는데 그러면 엄마는 동생들을 모아 놓고 누나를 제일 먼저 주고 둘째는 언제, 셋째는 언제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힘들다는 푸념이나 내색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교복도 항상 다림질해서 주시고 집안 일도 시키지 않으셨다. 그런 엄마를 보고 고모들은 “시집가서 어쩌려고 저렇게 집안일 하나 안 시켜”하며 엄마를 탓했다. 엄마는 “대학 갈 때 여자라고 봐주나요? 아들은 공부하라고 다해주면서 딸은 일 시키면 안 되지” 하시니 설거지 한번 안 해도 엄마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남동생 셋과 서울에서 살았다. 집에서 도와줄 형편이 되지 않아 내가 입시 학원 강사 수입으로 의식주를 해결했다. 부모님은 표현은 안 하셔도 묵묵히 동생들을 데리고 있는 내게 늘 미안해하시는 눈치였다. 나는 주변에서 가고 싶은 대학을 못 가는 친구들을 많이 봤고. 시험 쳐서 갈 수 있는 인문계고등학교도 포기하고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해서 일찍이 돈을 버는 친구들을 많이 봤다, 더구나 오빠나 남동생은 공부를 계속하는데 딸이라서 못하는 것도 흔하게 봤다. 어려운 형편에 부모님 덕분에 공부도 할 수 있었고, 남동생을 더 위하는 것을 본적이 없어서 당연히 내가 동생들을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 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고 동생들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장학금으로 집에 도움을 안 받았기에 별반 불만이 없었다. 



엄마는 어려워진 살림살이에도 한 번도 짜증을 내거나 힘들다고 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넉넉하게 살다가 아버지 병환으로 가세가 기울었으니 더 힘들고 많이도 불안하셨을 텐데 어찌 그리 하실 수 있었는지 내가 결혼 생활 30년을 지내고 보니 정말 대단하셨다. 늘 한결같이 마을을 지키는 느티나무 같으셨던 엄마다. 항상 같은 시간에 아침밥을 20년 넘게 주셨다. 아버지 랑 심하게 다툼이 있으신 날도 아침밥을 거르거나 소홀이 한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동생들 앞에서 내 잘못을 지적하거나 혼을 내신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물론 남동생들도 각자 따로 혼나거나 꾸중을 들은 적은 있지만 내가 보는 앞에서 혼내시는 것을 본적이 없다. 중, 고등 학교 6년간 전교 1등을 하던 남동생이 있다는 것도 졸업식에 가서 알았다. 공부를 잘한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엄마가 한 번도 동생을 더 칭찬하거나 다른 형제와 비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동생들이 결혼을 하고 며느리들이 (세명) 생신 때 선물을 사오면 누가 사온 거냐고 물어도 그냥 “얘들이 사왔지” 하시고 누가 사온 거라고 하지 않으셨다. 혹여나 더 맘에 드는 것을 내색하여 다른 며느리가 서운해할까 봐. 그러셨다. 동생들과 지낼 때 나에게는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며느리에게는 고맙다! 수고했다! 는 말을 자주 하셨다. 하루는 좀 서운하다는 마음이 들어 엄마에게 물어봤다. 엄마는” 재들이 학교 다닐 때 공책 한번을 사줬냐 따뜻한 밥 한그릇을 해줘 본적이 있냐? 지금 만나서 서로에 대한 감정이 생기는 건데 마음을 표현 안 하면 어떻게 아니? 너하고는 다르지. “ 



이 날 엄마의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나에게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으시는 엄마는 속으로 미안함과 대견으로 맘이 무거우셨구나. 엄마가 미안 해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렸어야 했다. 그런 맘으로 동생들과 지냈으면서 왜 엄마에게 그 말을 못했는지 모르겠다. 간간이 내려가서 뵙는 부모님은 여행도 함께 다니시고 게이트볼도 함께 치시며 두 분이 잘 살고 계신다고 믿고 있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랑 마주 앉아 소소한 이야기들을 해보지 못했다. 나는 표현력이 부족하고 덤덤한 성격이라 부모님이 잘 지낸다고 하시면 그런줄 알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후회가 된다. 나이들어가며 마음도 약해지셨을 거고 그동안 남편에게 못한 말을 딸에게는 하고 싶으신 이야기가 많았을 텐데…… 5남매 키우시고 아버지 병 수발로 힘들었던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게 내가 먼저 곁을 내드렸어야 했다. 50년을 지켜본 엄마는 먼저 나약함을 보이실 분이 아니다. 아니 하고 싶어도 살갑지 않은 큰 딸이 딸이 아니라 아들처럼 느껴져서 못하신 거 같다. 나는 엄마가 한결같이 흔들리지 않는 큰 느티나무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내 할 일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나이를 들어 보니 엄마 맘을 너무 헤아리지 못했다. 내가 먼저 시어머니 흉도 보고 투정도 부리고, 남편 흉도 봤으면 엄마가 맞장구를 치셨을까? 내가 먼저 곁을 내드렸 어야 했다. 지금 남편에게 툴툴거릴 게 아니라 엄마 랑 했어야 했다. 어버이 날 단 하루 만이라도 엄마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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