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감자'만큼 인류의 생사와 역사에 깊이 관여해온 작물이 또 있을까 싶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서양, 특히 유럽의 식문화에서 빼놓고 말할 수 없는 식재료는 단연 감자다. 그러나 감자가 처음부터 환영받던 것은아니었다. 하나를 캐면 줄줄이 딸려 나오는 괴상한 덩이뿌리 식물에 익숙지 않았던 유럽인들은 이를 '악마의 식물'이라 부르며 불경하게 여겼다. 심지어 종교재판에서 무시무시한 유죄 판결을 받고 화형에 처하기까지 했으니, 피고인 감자로써는 영문 모를 설움이 많았을 것이다.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상황은 곧 역전되었다. 아무래도 국민들의 배곯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각 나라의 국왕들은 하나만 심어도 쉽게 번식하는 감자가 훌륭한 묘책이라고 생각했다. 감자에 대한 편견과 인식을 바꾸도록 선전하는 동시에 감자 보급에 힘씀으로써 식량난을 해결하고 부국강병과 경제 안정을 꾀했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의 여러 상황들과 잘 맞아떨어져 유럽은 전에 없던 경제 호황기를 누리게 된다. 고작 감자 하나가 무슨 우리네 역사를 바꾸기까지 했겠냐고 누군가는 볼멘소리를 하겠지만, 어찌 되었던 인류의 생존에 한 뼘 정도는 이바지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유럽인들의 식탁에서 사랑을 담뿍 받았던 감자는 요즘 내 식탁 위에도 자주 출몰하고 있다. 덕분에 생애 첫 요리책까지 샀으니 가히 기념비적인 존재감이라 해야 할지도. 물론 시작은 단출했지만 말이다. 퇴근길에 불쑥 감자전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새 내 손엔 묵직한 감자 한 봉지가 털렁털렁 매달려 있었을 뿐이고. 그날 저녁을 감자전으로 포식한 후에도 남아 있는 처치 곤란한 알감자들이 그저 처량했을 뿐이고. 어떻게든 이 녀석들을 해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감자 요리 레시피가 잔뜩 수록된 요리책 한 권을 모셔왔을 뿐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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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미역국, 감자밥, 감자 드라이 카레, 감자 그라탕.. 쪄 먹고 볶아 먹는 것 외에도, 생각보다 감자로 시도해볼 수 있는 요리는 다양했다. 당분간은 다른 재료에 눈길이 안 갈 정도로. 지난 저녁엔 감자스프를 해 먹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나에겐 감자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변주법이 있으니 망정이지, 화성에서 생감자로만 500일 넘게 버텨야 했던 '마크 와트니'는 얼마나 지겨웠을까 몰라. 신물이 나서 아마 향후 몇 년간 감자는 쳐다도 안 봤을 거야.
감자, 생존의 문제에 직결하다
마션(2015), 리들리 스콧 감독, 멧 데이먼 주연
영화 <마션>은 화성을 탐사하던 탐사대가 거센 모래폭풍에휩쓸리자 급하게 철수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주인공 '마크 와트니'는 홀로 화성에 남겨지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팀원들은 그가 죽었으리라 판단하여 그를 두고 지구로 복귀해버리고 만다. 완벽하게 낯선 행성, 극한의 생존 조건. 극적으로 살아남긴 했지만 앞으로 며칠, 아니 몇 시간이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막막한 상황. 그러나 와트니는 특유의 긍정 마인드와 해박한 과학 지식으로 무장한 채 단 하나의 문제에 집중한다. 바로 '생존의 문제'에 말이다.
결국 이 영화는 생존에 관한 이야기다. 물리적·정신적으로고립된 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고 삶을 유지해가는가 하는. 그리고 이는 생명이 위태로운, 결코 웃지 못할 상황에서도 어떻게 유머 한 톨 쥐어짜며 용기, 희망, 의지와 같은 '인간성'을 놓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로 확장된다.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군만두만 먹고 버틴 것처럼, 와트니는 화성에서 손수 키워낸 감자로 삶을 연명한다.
화성이 자신의 식물학자적 능력을 두려워하게 될 것, 이라며 너스레를 떨던 와트니는 세계 최초 아니 우주 최초로 '화성 농부'가 되어 감자 재배에 도전한다. 과학자 정신이 아닌 그저 먹고 살아남기 위해서. 문과인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각종 수식과 화학식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결국 그는 감자를 심고 수확하는 것에 성공하고야 만다. 이렇게 와트니가 감자와 씨름하며 고군분투하는 걸 보다 보면 웃픈 실소가 나오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먹고사는 문제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먹먹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먹고, 산다'는 것. 어찌 됐든 오늘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 여기에까지 생각이 닿다 보면 묘하게 영화와 오버랩되는 한 그림이 있다. 지극히 평화롭지만 이상하게도 처절한 생존의 어떤 순간을 그려낸 작품, 우리에겐 이미 익숙한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의 <만종>이다.
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The Angelus), 1857–1859
어스름한 해질녘의 저녁 빛 사이로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두 남녀가 있다. 허름한 옷차림과 아무렇게나 놓인 갈퀴, 손수레, 무언가 담긴 바구니와 자루.. 작품의 초기 제목이 '감자 추수를 위한 기도'였던걸 보면 아마도 이들은 감자를 수확하는 농민 부부일 듯하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바구니에는 감자가 담겨 있고 주변에도 캐다 만 감자들이 잔뜩 널브러져 있다. 그런데 이들이 일하다 말고 갑자기 기도에 빠진 까닭은 무엇일까?
밀레는 이 그림에 대해 '어릴 적, 할머니는 들에서 일하다가도 종이 울리면 일을 멈춘 채 가엾게 죽어간 이들을 위해 삼종기도를 드리곤 했다. <만종>은 그때를 떠올리며 그린 그림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유년 시절 자신이 자랐던 농촌의 풍경과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았던 농부들의 삶을 그림에 녹여낸 것이다.
그렇게 '농민 화가'라 불리며 농촌의 일상을 사실적이고 담담하게 그려낸 밀레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이 있다. 그건 공교롭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감자'다. 이쯤 되면 감자를 '생존 푸드' 또는 '먹고사니즘의 아이콘'이라 불러야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먹고사니즘: '먹고사는일이중요하다'는가치관.기본적인생계를유지하는것이힘든시대에유행하는신조어)
그림 속 농민들은 먹고살기 위해선 부지런히 일하며 땀 흘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듯하다. 자신들의 일용할 양식이 될 감자를 직접 땅에 심고, 물을 주고, 키워내고, 수확하는 그들의 모습에선 묘하게도 시적이고 숭고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아가는 순수하고 소박한 장면이 이리도 감동적일 수 있는 건가. 생계를 위한 노동의 혹독함을 유난스럽지 않게, 과장되지도 않게 그려낸 그의 담백한 그림들은 그래서 유독 여운이 짙다.
먹고사니즘의 기쁨과 슬픔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사람들(The Gleaners), 1857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순수문학에 대해 배우면서 '목가적이다'라는 표현이 무슨 의미인지 한동안 골몰했던 기억이 있다. 농촌에서의 삶과 체험이 부재한 우리 세대에게 어느 시, 어느 소설이 목가적이다- 라는 선생님의 설명은 다소 뜬구름 잡는 얘기처럼 들렸다. 그러다 우연히 밀레의 그림들을 접하고선 그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아, '목가적'이란 건 이런 거구나! 밀레의 그림 한 점이면 될 것을, 왜 우리의 선생님들은 그리도 침 튀겨 가며 일장연설을 펼쳤던 걸까.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본 밀레의 그림은 그때와는 사뭇 달랐다. 마냥 목가적이고 평화롭다기보다는 먹고살기의 기쁨과 슬픔이, 먹고사니즘의 고뇌가 몇 방울 묻어있는 듯했다. 그건 아마도 나 역시 그들처럼 먹고살기 위해 노동의 최전선에 뛰어든 사회인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좌) 영화 <마션> / (우) 밀레, 낮잠(정오의 휴식), 1866
종종 '먹고살기 바빠서' 라던가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하는 말을 하기도, 듣기도 한다. 맹목적이고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제자신의 모습을 푸념하듯 늘어놓는 말이겠지만, 주어진 삶을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다는 의미로 들리기도 한다면 너무 감상적인 관점이려나.
그래도, 생존을 위한 우리의 일상은 이따금씩 숭고하고 아름다운 구석이 있다. 일을 하고, 밥을 지어먹고,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것을 배우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뜰히 일구고 더 살만한 내일로 가꿔가는 우리의 먹고사니즘은 충분히 '목가적'이다. 소박하지만 서정적이고 퍽다정스럽다. 낯선 행성에서의 처절한 사투에서 승리하여 결국 살아남은 어느 사내의 미소처럼. 일을 마치고 '오늘도 수고했다'는 햇살 한 줌의 위로를 받는 밀레의 그림 속 인물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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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감자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감자로 부흥기를 누렸던 나라 중 하나인 아일랜드는 아이러니하게도 감자 역병으로 인해 전에 없던 대기근을 겪는다. 불황과 배고픔으로 고통받던 아일랜드인들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새로운 기회의 땅 미국. 그들은 이방의 땅에 정착하여 다시금 삶의 터전을 꾸려나갔다.그렇게 살아남은 아일랜드 이주민의 후손에는 케네디, 레이건, 클린턴, 그리고 월트 디즈니와 맥도날드 창시자와 같은 미국의 역사적 인물들이 즐비하다고 하니 '감자의 먹고사니즘'은 예나 지금이나, 지구 그 어딘가에서나 화성에서나 꽤 의미심장한면이 있다.
먹고사는 문제는이렇게 삶을 기쁘게도 슬프게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고 가기도 하는 걸까. 생존의 문제는 본질적으론 단순하지만 그 양상은 참 다채롭구나. 그리고 이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예외는 아니겠지. 나 역시 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나는 오늘도 부지런히 먹고 부지런히 살아간다. 푹 삶은 감자처럼 마냥 마닐마닐하지만은 않은 인생일지라도 요리책을 뒤적이듯 매일을 변주해가다 보면 먹고 살 만한 날도 오겠지. 그런 걸 두고 부르는 말이 '인생의 맛'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