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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순자 Mar 26. 2024

화장을 그만하겠다는 엄마

운산 최순자(2024). 화장을 그만하겠다는 엄마. 국제아동발달교육연구원 공명재학당. 2. 15.


연초에 구순을 앞둔 엄마 생일날 찾았다. 이전에는 밖에서 식사하며 축하했다. 올해부터 엄마가 걷기 힘들다. 침대에 누워있는 엄마 옆에 앉자 엄마는 화장품 얘기를 꺼낸다.


“아야, 냉장고 안에 있는 화장품 갖고 가라.”

“아직은 갖고 있다가 밖에 나가실 때 화장해야지.”

“이제 화장하고 나갈 일 없다.”

“손주 결혼식이라도 있으면 화장하고 가셔야지.”

“이제는 돈이나 보내지 내가 어떻게 간다냐.”


하룻밤 묵고 돌아오는 날 화장품을 놓고 왔다. 엄마는 앞으로 화장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차마 가져올 수 없었다. 화장품을 떠나보내고 늙어감을 더 절절히 느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시골에서 농사지으면서도 오일장에 갈 때나 외갓집에 가는 날에는 늘 화장을 곱게 했다. 방물장수에게 산 커다란 구루므통에서 영양 크림을 찍어 바르고, 한 손에 분곽을 들고 다른 손으로 ‘톡톡’ ‘톡톡’ 거리며 볼과 이마에 발랐다. 두 갈래 무명실을 발에 걸고 실을 교차해 가며 눈썹을 뽑아 초승달 같이 단장했다. 마지막으로 빨갛게 입술도 바르고 위아래 입술을 움직여 화장을 갈무리했다.


아버지는 당신에게만 예쁜 아내이기를 바랐을까? 그런 엄마를 보고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쯥쯥쯥” 했다. 엄마는 2년 전 손주 결혼식 때까지 화장했다. 한복을 입은 채로 잘 오르지 못한 계단도 성큼성큼 걸었다. 장손이 늦게라도 장가가는 게 힘이 났던 것 같다.


이후 엄마는 집에서 두 번 넘어져 대퇴골과 허리를 다쳤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이다. 근육이 다 빠지고 가느다란 뼈만 남아 있다. 집 안에서 걷는 것도 보조기에 지탱한다. 그러니 이제 외출은 쉽지 않다.


린 틸먼의 <어머니를 돌보다>를 읽었다. 저자는 엄마가 97세에 죽기 전 살이 다 빠져 마치 ‘판자’ 같았다고 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만, 언젠가 엄마도 그럴 것만 같다.


설 명절 때 엄마를 찾았다. 엄마는 화장품 얘기를 다시 꺼낸다. 마지못해 냉장고를 열었다. 문 제일 아래 칸에 화장품 상자가 있다. 냉장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신경 쓰였다. 못내 꺼내 봤다. 스킨, 로션, 영양 크림, 립스틱, 분, 화장솜이 들어 있다. “엄마, 로션은 바르셔야지.”라고 하자 “이젠 질이 들어 안 발라도 괜찮아야.”라고 한다. “응, 그래.”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엄마 옆에서 강아지처럼 하룻밤 잤다. 다음날 마음 한쪽이 서늘함을 느끼며 엄마가 쓰다만 화장품 상자를 가져왔다. 엄마가 다시 화장할 날은 없을 것 같다. 혹시라도 가능한 날이 온다면 새 화장품을 선물해 주고 싶지만. ⃨


뿌연 안개가 앞을 가린다. 화장품 상자는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엄마 분 냄새를 맡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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