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자등록과 기획력의 필요성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사업자등록증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까? 표면적으로는 보았을 때는 맞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사업자등록을 하기 전과 후에 제일 크게 달라진 점이라면 세금계산서를 발행할 수 있냐 없냐의 차이인 듯하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중요할까?
나의 대답은 예스다. 굳이 사업자가 없어도 명함 하나 파서 회사인 것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고 사업자가 없다고 해서 일을 받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업자가 없다면 중간에 에이전시나 영상제작 스튜디오와 같은 회사가 끼지 않는 이상 클라이언트로부터 일을 다이렉트로 받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가장 큰 이유는 앞서 말했던 세금계산서 발행 유무의 차이다. 경험상 중간에 마진을 남기는 영상제작회사나 에이전시를 끼지 않고 다이렉트로 일을 받으려면 무조건 사업자가 있어야 하는 경우가 90프로 이상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공공기관이나 정부부처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회사는 대부분 세금계산서 발행을 선호하기 때문에 중간에 에이전시 같은 회사를 끼고 그들과 프리랜서 계약을 해서 일을 진행하지 않는 이상 일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아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기업에서는 직접적으로 프리랜서를 고용하지 않으면서 왜 에이전시나 스튜디오는 프리랜서를 고용할까?
기업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개인에게, 그것도 회사 타이틀도 없는 일개 프리랜서에게 일을 맡기기란 생각보다 많이 부담스러울 것이다. 사회에서는 대외적으로 보이는 부분도 굉장히 중요하다.
오죽하면 유튜브에서 내 포트폴리오만 보고 일을 맡길 것처럼 연락을 준 곳도 1인 기업이라는 얘기를 듣더니 좀 더 규모 있는 회사와 해야 할 것 같다고 거절당한 사례도 있으니 말이다.
(어차피 포트폴리오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컨택했으면서 이제 와서 1인 기업이라 부담스럽다니... 개인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면 에이전시나 스튜디오에서 프리랜서를 고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쉽게 말하면 하청에 하청이다.
맨 위에 클라이언트인 갑이 있다면 에이전시는 을, 그 밑에 스튜디오까지 끼면 병, 본인은...? 당연히 정이다.
에이전시 같은 경우는 광고대행을 통으로 맡아서 진행하기 때문에 영상 같은 경우는 내부 인력이 있다면 직접 진행하지만 없는 곳도 많다. 그러다 보니 전체 브랜드 기획을 하면서 영상이 필요한 케이스가 생기면 그때마다 일의 규모에 따라 스튜디오나 프리랜서에게 까지 기회가 오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만일 스튜디오까지 끼게 된다면?
안 그래도 작은 견적이 수수료라는 명목으로 있는 대로 깎여서(대놓고 깎는 게 아니라 이미 깎인 견적으로 의뢰가 들어온다.) 본인에게 돌아오는 수익은 크게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 나도 개인적으로는 스튜디오에서 일을 받는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정말 일이 없어서 놀고먹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웬만하면 거절하는 편이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지 않냐고?
물론 프리랜서 초반에는 가리지 않고 다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포트폴리오와 경력도 꽤 쌓였고 이제는 어느 정도 들어오는 일의 초반 분위기를 봤을 때 걸러야 하는 프로젝트는 눈에 보인다.
내가 스튜디오나 영상제작 전문회사(포스트 프로덕션)의 일을 꺼리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 꼽을 수 있다.
(아예 전부 다 거절하진 않는다. 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첫 번째.
앞서 얘기했던 대로 견적이 많이 깎인다. 일이란 건 하청에 하청을 타고 타고 내려올수록 견적금액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영상제작회사라면 당연히 내부에서 영상을 다 만들어야 하는데 프리랜서에게 일을 맡긴다는 건? 본인들의 욕심에 일단 받고 나서 내부 인력으로 정 힘들면 싸게 후려쳐서 프리랜서에게 맡겨야지.
라는 생각을 아.마.도 할 것이다. 적어도 내가 겪어본 회사들은 말이다. 혹은. 아예 처음부터 그냥 일만 받아서 수수료 떼고 프리랜서에게 맡길 생각으로 일을 받는 경우도 있다.
세 번째.
두 번째 이유를 거듭 얘기해야 하는데 본인들이 하다가 도저히 마감을 맞출 수 없는 경우 급하게 프리랜서를 찾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급한 게 쳐내야 하는 일이 대부분이고 그런 일은 항상 맡게 되면 일주일, 이주일 안에 쳐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거 정말... 제대로 잠 못 자가면서 매일매일 컨펌해야 하는 아주 지옥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종합해보면 값도 싸고, 기간도 적은데, 힘들기만 하면서 심지어 만든 영상을 내 포트폴리오로 쓸 수 없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정말 내가 일이 없어 몇 달 동안 놀고먹고 배도 곪지 않는 이상 웬만하면 하청에 하청인 일은 받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견적도 크게 깎이지 않거니와 광고대행사와 인연을 잘 닦아놓으면 후에 또 다른 일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실제로도 그랬다)
앞으로 오래오래 프리랜서 생활을 할 계획이라면 가능하면 사업자를 등록하라고 감히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덧붙여서 하나 더 필요한 덕목이 있다면..
기획력을 갖추라고 얘기하고 싶다. 하청에 하청으로 들어오는 일이라면 규모가 큰 프로젝트의 어느 한 부분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면 사실 기획력은 필요 없다. 그냥 시키는 일만 퀄리티 잘 내서 납품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물론 그렇게만 해서도 실력이 워낙 좋아서 꾸준히 일을 높은 금액으로 받아가며 하시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을 때 그런 분들은 한 분야에서 굉장히 높은 실력으로 이미 검증을 받은 사람들이다. 나쁘게 말하면 기획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부족한 작업자, 좋게 말하면 한 분야에서 굉장히 뛰어난 스페셜리스트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나의 위치는 어디쯤에 있을까?
본인 스스로 생각했을 때 나는 절대로 스페셜리스트는 아니었다. 뭔가 이것저것 대부분 그럴싸하게 잘 만들어는 내지만 무언가 한 분야만 독하게 파고들어서 소름 끼치게 잘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지는 않았다고 스스로 판단한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에는 어떻게 보면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가 작용 할런지도 모르겠다.
이쯤에서 생각해보는 나의 장점.
하나를 유별나게 잘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것들을 평균 이상으로는 잘 해낸다. 그게 스스로 판단한 나의 실력이었다. 현재 내가 만들고 있는 2d 기반의 인포, 애니메이션 영상 같은 경우는 어떻게 보면 나와 찰떡궁합이었다.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이 영상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컨셉 기획부터 시나리오 구성, 스토리보드, 아트웍 디자인, 애니메이션, 배경음악 작업 등등 꽤 여러 가지의 공정과 단계를 거쳐서 완성해내야 한다. 뭔가 하나를 잘하기보다는 전부 다 할 줄 알아야 했다. 처음 일을 받아서 할 때부터 스스로 기획과 시나리오, 스토리보드 등을 레퍼런스를 찾아가며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다.
무심코 해본 도전에서 나의 적성을 찾아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인의 능력이 어디에 특화되어있는지 일단 스스로 먼저 판단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러고 나서 어떤 루트를 가야 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영상디자인 프리랜서에게 디자인과 애니메이션 능력은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기본 소양일테고 본인 스스로 기획과 구성력, 커뮤니케이션하는 데 크게 어려움이 없다고 느껴진다면 과감히 사업자를 내고 사회로 뛰어들어보아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