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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밝음 Jun 05. 2024

다른 걸음으로 같은 곳을 향해 걷는 우리들

오리부부와 전우애

날씨가 슬슬 더워진다. 아직은 괜찮지만, 더 더워지면 걷기 운동이 어렵다. 하루에 한 번 동네를 산책하는 게 보람이자 즐거움이다. 내향형 기질이라는 합리화와 효율이라는 고급스러운 핑계로 일단 덜 움직이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성향이다. 그렇다 보니 몸에 순환이 부족하거나 척추 문제가 있을 때가 많다. 처음에는 건강을 챙길 목적으로 시작했던 산책이다. 그런데 매일 하다 보니 왜 시작했는지는 잊히고 나가서 걸을 때의 기분이 좋아서 매일 걷는다.


멀리 나가지는 않고 집 주변 동네를 걷는다. 한 개의 동 밖에 없는 작은 동네지만 깨나 여기저기 걸을 곳이 많아서 오늘의 코스를 정하는 것도 난제다. 큰 공원도 있고 뒷동산도 있고 오르막 구간도 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는 기념공원 안이다. 우리 동네는 UN 참전용사들이 잠들어 있는 기념공원이 있다. 말 그대로 묘지인 셈이다. 이 동네에 산지 이십 년이 될 때까지 자발적으로 가본 적은 없었다. 전사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에 굳이 갈 일은 없었다. 나에게 그곳은 그냥 UN 관련 행사를 하는 장소이고, 낯선 관광객들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알기 위해 방문하는 시티투어 코스일 뿐이었다.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공원에 들어가보게 되었다. 장시간의 독박육아는 외출 없이 불가능했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어디로든 걸어야 하루가 끝났다. 그래야 나도 사람 사는 냄새를 맡고 아이도 투정이 덜했다. 이리저리 온 동네를 다니다 보니 한 번도 가지 않던 UN 공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은 내 예상과 다른 곳이었다. 상상하던 그런 묘지의 느낌이 아니었다. 여기가 한국인지 스위스인지 구분이 안 되는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단정하고 정성스럽게 조경된 식물들, 각양각색의 국기들, 푸른 잔디밭과 시원한 호수. 어느 길로 걸어도 마음이 평온하고 차분해지는 곳이었다. 공원 오른편의 메타세쿼이아 길을 걸으면 예도단이 칼을 높이 들고 나를 축복해 주는 기분도 들었다. 이곳의 가장 키 포인트는 오리들이다. 호수에 사는 오리들은 한가로이 물에서 놀다 가끔 뭍으로 올라와 여기저기 산책한다. 아이가 어릴 때 이 오리들 덕분에 자주 놀러 왔었다. 통통한 엉덩이, 자랑스럽게 튀어나온 노란 주둥이, 옆에 사람이 있든 말든 제 갈 길을 가는 오리들은 우리 모자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이제는 아이들이 커서 유모차를 끌고 올 일은 없어졌다. 대신 나의 최애 산책 장소가 되었다. 공원 문을 들어서면 시끄러운 도시와 별개의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서는 느낌이 든다. 기념 공원이다 보니 일반 공원과 달리 음식 섭취나 시끄러운 소리로 떠들고 뛰는 행동이 금지되어 있다. 예쁜 잔디밭이 있지만 돗자리를 깔거나 앉아서 쉴 수 없다. 하물며 슬리퍼를 신고는 입장이 불가하다. 모든 게 이곳에 잠들어 있는 참전용사들을 위한 애도의 행위다. 그래서 더 깨끗하고 조용한 공원이다.




얼마 전 오리 두 마리가 나와서 뒤뚱뒤뚱 걷고 있었다. 평소처럼 크게 돌던 코스 대신에 오리들을 따라 중간길로 들어섰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발을 떼며 먹이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각자 가도 될 법한데 나란히 함께 걷는 오리들을 보며 우리 부부가 생각났다. 맞춰서 한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데 걸음이 달라 누구는 이쪽으로 누구는 저쪽으로 갈 때도 있었다. 한 사람은 빠르게 걷는데 한 사람은 따라오는 게 버겁기도 했다. 성향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속도도 다른 우리들. 다를 수밖에 없어 힘들지만, 서로를 배려하고 맞추려는 노력이 더 깊은 사이를 만들었다.


결혼은 연애와는 판이하다. 같은 사람을 사랑하지만 전혀 다른 사랑이고, 내어줄 수 있는 마음과 받는 기쁨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결혼하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이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내가 상상하던 아름다운 결혼생활이 아니었고 힘든 일도 많이 겪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서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이래도 저래도 서로의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가서 행복했던 길. 함께 웃고 함께 울어서 더 의미 있었던 날들. 분명 결혼은 잃은 것 보다 얻은 것이 훨씬 많다.


우리 둘 다 결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이 결혼에 대해 만족해한다. 그렇지만 둘 다 다시 태어나면 독신으로 살아보고 싶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렇지 않았다. 이 결혼에 흡족하지 않다면 더 나은 녀석과 더 나은 조건으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혼에 대해 후회 없이 경험했기 때문에 혼자 살아보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할 거야?"

라는 식상한 질문을 그에게 던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 기쁘다.

후회 없이 산다면 우리는 결혼에 대해서도 서로에 대해서도 미련이 없을 것이다.


우리 결혼 목표는

결혼에 대해 미련 없을 만큼 지지고 볶고 사랑하고 경험하는 것. 

희로애락의 그 어느 것도 빠짐없이 누리는 것.

바로 그것이다.


다음에는 오리 부부를 보러 함께 와야겠다. 

삶이라는 풍파를 함께 싸우고 이겨내는 나의 사랑스러운 전우!

전사들이 있는 이곳에서 우리의 전우애를 다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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