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밝음 Jul 22. 2024

겉핥는 만남들

만남은 속에서 이루어질텐데 말이죠.

최근 통화 목록을 열어보니 부재중 전화 흔적만 가득하다. 모조리 스팸 전화다. 그런 쓸 때 없는 전화들 올 때마다 넘기고 차단시키는 것도 은근 에너지 소모다. 개인정보는 어디서 그렇게 많이도 털렸는지. 이삽십년 온라인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놀았으니 그럴만도 하겠다 싶다.


이년전까지만 해도 대안교육 보내며 같이 운영 일하던 부모들과의 전화 흔적으로 가득했는데, 학교를 옮긴 이후로는 파리만 날리고 있다. 가끔 안부를 묻기도 했지만 각자 다른 학교를 다니니 그마저도 점점 소원해져간다. 당연한 일이다. 새로운 삶은 또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좋은 일이니까.


그래도 전혀 외롭지 않다. 고요한 나의 통화 목록이 좋다. 오히려 이 고독함의 바다에 깊숙이 빠져있는 지금이 행복하다. 이런 나를 보니 천성이 전화통 붙들고 노는 거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싶다. 일을 해야하니 필요했던 소통이던 것이다.




이십대 때부터 통화하는 걸 그닥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하물며 남자친구와도 밤새 통화를 하거나 그런 적이 별로 없다. 어릴 때부터 편지 주고 받는 걸 더 좋아했고, 이메일이나 문자를 훨씬 편하게 여겼다. 콜포비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전화라는 수단을 사용하기를 꺼리는 편이다. 


전화(call)과 공포(phobia)의 합성어인 콜포비아는 전화가 오면 불안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상을 말한다. 워낙 SNS로 소통하는 게 익숙해지다보니 그런 사람들이 늘어간다. 최근 미국 경제지 월 스트리트 저널에서는 《전화에 응답하는 것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휴대폰으로 하는 근로자》라는 제목으로 이런 증상을 기사화하기까지 했다. 그 제목에 공감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걸 보면 한 두 명의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변해가는 시대에 따른 사회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사람들과의 소통에서는 언어적 소통 뿐만아니라 비언어적 소통도 중요하다. 아니, 더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다. 만남이 차단된 채 딱딱하고 전자파 가득 나오는 휴대전화와 뜨겁게 만나야 하는 전화통화. 이렇게 귀만 기울이는 무선상의 만남은 언제나 에너지를 가득 빼앗아간다. 


직접 보지 못해 알아챌 수 없는 상대방의 정보를 얻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하고, 모호한 메시지를 해석하기 위해 더 많은 생각을 가동시켜야 한다. 이야기 하다가 화장실을 다녀올 수도 없고, 이야기 하다가 잠시 잠깐 창밖을 올려다볼 수도 없고, 이야기 하다가 차 한잔하며 상대방의 말을 곱씹어 볼 수도 없다. 이런 여백 없는 소통은 나를 힘들게 한다. 확인과 반응에 자유권이 있는 SNS와 달리 하염없이 상대방에게 반응하고 대화를 이어가야하는 소통 감옥에 갇힌 것도 별로다. 상대방과 연결된 기분을 느끼기보다 차단과 박탈의 기분을 더 느끼니 전화가 즐거울리 없다. 




쉽고 빠르게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SNS 수단이 생기면서 만날 수 없는 아쉬움을 해소해주던 전화는 천대 받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서든 대화할 수 있고, 만나지 못해도 살아가는 일거수일투족을 서로 훔쳐보며 살아간다. 그러니 자꾸 겉핥기 인맥만 늘어간다. 매일 소통하며 살아가지만 서로를 깊이 알지는 못한다. 자주 연결되지 못해도 한 번이라도 더 직접 만나야 서로를 알아갈텐데 귀한 만남 대신 형식적 소통만 이루어지는 요즘이다.


가끔 우리의 마음이 공허해지는 이유가 이런 소통의 삶 때문이지 않을까. 아는 사람도 많고 연결된 사람도 많다. 만남으로 다져진 깊은 소통을 할 사람은 곁에 없다. 내 마음 이야기할 수 있고, 그 마음 들어줄 수 있는 만남이 늘어나면 좋겠다. 만나기 위해 오고 가는 수고까지도 포함한 애정 깊은 마음. 사람과 사람은 시간과 노력으로 깊어진다. 

작가의 이전글 살아온 이력의 굳은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