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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밝음 Apr 02. 2024

마음공부하는 사람

오늘도 내 마음을 공부하며 살아갑니다.

정확히 20년이다. 우연히 엄마를 따라갔던 절에 다니기 시작해서 주말마다 법당에 앉아 있던 세월이 20년이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다니기 시작해서 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열심히 다녔다. 계속 가다 보니 당연한 일상이 되어서 그런 건지 마음공부는 평생 하라는 엄마의 유언 때문이었던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끈을 오래도록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재미있어서 다녔던 것 같다. 친구들도 많고 선생님도 있고 함께 다양한 활동들도 하니 재미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재미와 함께 편안하고 좋은 마음을 함께 느꼈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내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의 한 존재에 대해서 나누고 마음의 작용에 대해 나누는 그 시간이 그저 좋았던 것 같다. 삶에서 고가 찾아오고 마음이 힘들 때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스님의 설법을 떠올리며 버텼다. 부모님의 빈자리 대신에 그 자리를 채워주는 마음공부였다. 




꿈결 같은 행복에 젖어 살아가다가 갑자기 맞닥뜨린 죽음이라는 단어는 나를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묶어두었다. 영원할 것 같은 엄마라는 존재가 한순간 사라지는 경험은 나를 혼란 속에 집어넣었다. 이해할 수 없었고 너무도 이해하고 싶었다. 삶이 무엇인지, 나는 무엇인지. 이렇게 죽음이라는 게 있다면 왜 태어나는 것인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모두에게 정해진 죽음이라는 종착역 앞에서 찰나라는 시간을 부여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너무도 알고 싶었다. 재미로 시작했던 마음공부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없는 숙명이 되었다.


돌고 돌아 이 자리에 와서 보니 어릴 적 내가 안쓰럽다. 튼튼한 자아가 서기도 전에 나라는 것을 없애기 위해 애썼던 무수한 세월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일체유심조를 떠올리며 그 마음을 지우려고 애썼다. 속상한 마음을 알아주지도 않고 내 마음을 무시한 셈이다. 이 생에 잠깐 부여받은 몸이기에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무아(無我) 사상을 새기느라 청소년기 공고히 세워야 할 내가 사라졌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나만의 자아정체성을 만들지 못하고, 나라는 건 없다는 공(空)의 자아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말로 부여된 설법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나이였다. 어떠한 사람의 지식도 그 사람이 경험한 것을 초월할 수 없다고 한 존 로크의 말처럼 어린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의 표면적이고 단편적인 해석으로 새긴 것이다. 깊이도 없이 뭔지도 모르고 나를 살리지 못하고 죽이며 살았던 것이다.


이 생도 제대로 잘 살아내보지 못하고 있으면서 수억 겁의 생을 감당하려고 애썼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에 충실하기보다 윤회에 따른 내 영혼의 여정만을 떠올리며 큰 생을 감당하려고 아등바등거렸다. 내 마음을 무시하면서까지 카르마고 업이라며 그 괴로움을 짊어지려고 애썼다. 무참히 자기기만과 자기 무시를 반복하며 물질계에 있는 나를 외면했다. 


결혼 전에는 무조건 아이를 낳으면 나처럼 어린이법회에 다니게 해서 마음공부를 꼭 시킬 거라고 다짐했었다. 결혼 12년 차가 된 지금의 나는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다. 아직 자신에 대한 앎이 충분하지 않은 아이에게는 어떠한 진리도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어떤 모양이든 자기 꼴대로 열심히 만들어 자라고 성인이 되어서 자기의 뜻에 맞고 자신의 삶에 빛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함께 하리라 믿는다.




여전히 나는 마음공부 중이다. 아마 평생 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내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지금 이렇게 나라는 게 있고 내 마음을 쓰고 있다면 내 마음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카르마를 녹이기 위해 애를 쓰거나 거대한 존재의 나를 떠올리며 지금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지금 내 삶 앞에 주어진 모든 것들을 생생히 보려고 노력할 뿐이고 오고 가는 생각과 마음들이 내가 아니기에 잠시 쉬었다가는 나그네처럼 바라봐 줄 뿐이다. 


지금의 나를 잘 돌보고 지금의 나와 잘 살아가는 게 나의 마음공부다. 아무리 좋은 거라도 나에게 억지로 주입하지 않고 그냥 내가 마음 나는 만큼 한걸음 걸어간다. 벗어날 수 있으면 좋고 그러지 못하면 그뿐이다. 갈망도 아쉬움도 없이 묵묵히 걸어간다.


이해로 이해될 일이 아니라면 살아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버리는 게 오히려 이해하는 길이 되는 것 같다. 20년을 매주 법당에서 보낸 긴 세월도 헛되지는 않은 것 같다. 그 길을 갔기에 그다음 길도 걸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게 새기던 생이 찰나라는 그 말도 마흔이 넘은 이 자리에 와서야 어렴풋이 이해된다. 이 이해도 죽음 앞에서 마주할 찰나에 견주면 겨우 일말의 이해겠지만 체득해서 가져간 내 진짜 앎이 귀하고 소중하다. 그 어떤 진리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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