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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지 Apr 16. 2020

그 책 읽었어?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스스로를 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한 적 있는가?

이 책을 읽고 나면, 모두가 입을 모아서 이야기하더라. 본인은 차별주의자라고.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243p


먼저, 약 2년 전에 이 기억이 날아갈까 새벽에 다급히 노트북을 두드렸던 글을 소개한다.



말(言), 잠깐 흘러가는 그 소리에, 왜 그리도 예민하냐고 하는 사람들에게


무뚝뚝한 경상도 여자아이들이 퍽이나 적응하기 힘들어했던 서정적인 국어 선생님 계셨다. 선생님은 감정적이신 만큼 기분에 따라 종종 행동하셨고, 하루는 "옜다, 기분이다, 오늘은 수업하지 말고 재미있는 게임이나 하자꾸나"라는 말에 아이들은 쾌재를 부르며 교과서를 덮었다. 그 게임은 바로 마음속 깊은 곳,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반 앞에 나와서 훌훌 털어내는 것이었다. 서른 명의 아이들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대체 누가 시작하고 누가 이어나간단 말인가,


부끄럽고 오글거리는 것을 마주하기 죽기보다 싫었던 18살의 아이들은 잔뜩 신이 난 선생님을 실망시킬 수 없다는 생각을 했나 보다, 누군가가 스타트를 끊었다. 가벼운 이야기부터 시작되었지만 점차 분위기는 가라앉았고, 몇몇은 코를 훌쩍이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내 마음속을 휘젓고 다니는 이야기는 가장 마지막에 나왔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머리숱과 눈썹이 풍성한, 막막한 상황에도 잘 웃는 아이였다. 늘 담요로 몸을 칭칭 감고 있었는데 한 번 잠들면 얼마나 잘 자는지, 자고 있는 그 친구를 깨우면 ‘여긴 어디 나는 누구’의 표정이 이런 표정이구나 알게 된다. 그 표정이 귀엽고도 신기해서 옆자리 짝꿍일 때는 자고 있는 그 친구를 깨우는 게 제일 재미있었다. 물론 선생님이 깨우라고 할 때도 있었지만, 괜히 일어나서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며 깨우기도 했다. 손에 샤프를 쥐어주면 그 친구는 그 샤프를 쥐고 다시 책상과 물아일체가 되었다.


나오자마자 이야기를 바로 시작하는 아이들과 달리, 그 아이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고를 반복하며 뜸을 들였다. 그게 용기를 내는 순간이었음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나는 오빠가 한 명 있는데,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달라. 정신과 연결된 뇌가 조금 아파서 치료를 받는 중이야. 나는 오빠를 매우 아끼고 사랑해. 한 번도 원망하거나 미워해본 적 없어. 나는 우리 가족을 정말 사랑하거든. 오빠가 다른 사람보다 좀 부족하다고 생각은 했어도, 나한테 아주 소중한 존재니까 결코 다른 사람하고 바꾸지 않을 거야.


날 정말 힘들고 슬프게 하는 건, 우리 오빠가 아니야. 오빠를 놀리고 괴롭히는 사람들도 아니야. 오빠와 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 장애인, 이라는 말 때문이야. 장애인의 정확한 사전적 의미는 모르겠지만 '문제가 있는 사람'을 부를 때 사용하잖아. 난 오빠를 장애인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 우리 오빠는 조금 아픈 사람이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고. 장애인이라는 이름 말고 멀쩡한 이름 석 자를 가지고 있단 말이야.


게다가 이 말을 욕이나 장난으로 사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제일 속상해. 너희들은 모르겠지, 이 장애인아!라는 욕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기고 말잖아. 장애인, 병신, 이라는 말이 왜 욕이 되어야 해? 남들과 조금 다른 게 비난과 기피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거야? 무슨 자격으로 비난을 하는 거야. 나에게는 정말 소중한 사람인데. 나에게는 정말로 사랑하는, 너희들의 형제자매와 같은 존재인데….


그동안 지나온 것들에 대해 책임을 물으려고 이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야, 날 동정해달라고도 꺼낸 게 아니야, 이제부터라도 그 말에 대한 무거움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나 같은 상처를 다른 사람들이 입지 않았으면 해서, 용기 내서 말해본다. 들어줘서 고마워, 같이 울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다른 데 가서 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사적으로는 좋아, 그 사람이 내 이야기로 바뀔 수만 있다면.”


그 순간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만드는 과거의 내 행동이 떠올랐다.


그 친구는 내 뒷자리에 앉아있었고, 수업 종은 쳤으나 선생님이 오시기 전 그 짧은 시간이었다. 자리에는 앉아 있어야 했고, 가만히 있기에는 심심했다. 나는 그 당시의 내 짝꿍에게 장난을 걸었다. 표정을 엽기적으로 구기고, 양팔을 부자연스럽게 하며 얼굴을 교과서에 대고 입으로 책을 넘기려고 했다. 누가 더 웃기고, 누가 책을 많이 넘기나, 대충 그런 식의 놀이였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나는 입으로 ‘장애인 놀이, 장애인 놀이’를 반복하여 말하며 낄낄거렸다.


아, 얼마나 가볍고도 생각 없는 행동이었나


그 이후 선생님께서 들어오시고 수업이 끝났는데, 그 친구에게 말을 걸려고 뒤를 돌아보니 친구는 자리에 없었다. 친구가 돌아오고 나는 웃으면서 말을 건넸지만 그 아이는 굳은 표정으로 내 말을 받아주지 않았다. 머쓱해진 나는 이상함을 잠시 느꼈지만 이내 그 생각은, 그 아이가 엎드려 잘 때 고개가 바닥을 향해있던 것처럼, 양팔은 머리를 두른 채 울타리를 친 것처럼, 숙면하듯이 내 머릿속에서 깊숙이 잠식되어갔다.


이러한 과거의 일 때문에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잠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나를 계속해서 의심도 해봤다. 내가 정녕 그런 행동을 했었단 말인가, 아닐 거야, 부정할수록 또렷이 떠올랐다. 내가 먼저 시작했고, 다른 친구를 끌어들였으며, 내 행동은 확연히 눈에 보였을 것이다. 같이 놀이를 했던 그때의 짝꿍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 기억은 나를 내내 괴롭혀 결국 나는 그 친구에게 사과를, 아니 사과라는 핑계로 내 마음의 짐을 덜려고 했다.


친구는 자신은 기억이 안 난다며, 그런 일이 있었냐고,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말 몰랐던 것인지, 다시 상기하기 싫었던 건지, 그 사과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던 게 티가 났는지, 혹은 내가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똑같은 말을 내게 되풀이해줄 뿐이었다. 과거는 흘러갔고 고칠 수 없다고, 고칠 수 있는 건 앞으로의 일들뿐이라고, 네가 내 이야기로 그런 감정을 느꼈다면 그걸로 되었다고, 내가 용기 내어 반 앞에 나가 이야기를 한 게 보람 있노라고. 그제야 나는 마음이 불편해서 하는 사과가 아닌 진짜 사과가 하고 싶어 졌다. 진심으로 아프게 해서 미안했다. 내가 무지해서 그런 것이었다고, 그 무지함을 용서해달라고, 말해야 했지만 나에게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일 그 정도의 용기밖에 없었다.


그때의 기억과 감정은 너무나도 생생해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내 가슴을 후벼 판다. 솔직히 아직까지도 입버릇처럼 나오는 병신, 이라는 말은 생각지도 못 하게 물처럼 쏟아져 주워 담을 수가 없다. 하지만 뒤따라오는 아차, 싶은 후회와 그 친구의 이야기에 대한 기억은 앞으로도 오랜 시간 기억해내고 떠올리고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차별의 가장 핵심이 되는 말(言)에 대한 조언과 충고, 또는 맹비난과 싸움이 빈번히 일어나는 SNS와 온라인 상의 일들을 보고 있자면 종종 묻고 싶다. 아직까지도 반성 중인 내가, 내 경험을 앞세우며 아는 체를 하기엔 부끄럽지만, 왜 그리 단어 하나에 예민하게 구냐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질문은 하고 싶다.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 소녀가 당신의 주변에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지.



2018년 3월 4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강지원 드림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작가가 그 충격으로 쓰기 시작한 책이 바로 '선량한 차별주의자'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선량하고 차별을 하지 않으려 적어도 노력이라도 하는 사람이라고 인지하며 살아가지만, 결국에 차별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 속 수많은 형태의 차별들의 모양, 그것을 대하는 다수의 태도, 그 속에 당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다수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불편함을 느껴본 적 없는 점을 불평등한 것이다 주장하면 그 주장이 불편하게 느껴져 반발하고 싶어 질 것이다. 나 또한 그러했고, 그 친구에게 사과하기까지 자기부정의 시간 때문에 오래 걸렸다. 기울어진 땅 위에서는 평평하다고 생각하는 지평선마저도 기울어져 있다. 의식적으로 밑으로 내려가 있는 시소의 끝 부분을 있는 힘껏 올려내야 비로소 평등해진다. 그 친구가 용기 내어 서른 명의 아이들 앞에 선 것처럼.


프로 불편러, 역차별, 왜 굳이 옷을 벗고 거리로 나가야 했느냐, 동성애 영화는 보고 싶지 않다, 대한민국이 싫으면 대한민국을 떠나라, 어쩔 수 없다 답은 건물주뿐이다, 라는 마음 깊이 분노가 차오르고 논점이 흐려지는 것 같지만 반박할 수 없던 터무니없는 주장들에, 이제는 차분히 설득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또한 노력할 테니, 당신도 나와 같이 차별을 그만두자고.

선량한 차별주의자(2019), 244p, 김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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