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전 <고려 미•색> @국립고궁박물관
높고 파란 하늘과 선선한 바람이 쾌적했던 가을의 어느 날,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벨기에 왕립예술역사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전시를 다녀왔다.
고궁박물관 자체도 크지 않은데 그중에서도 기획전시실 한 칸만 차지한 아주 작은 전시였다. 전시된 문화재는 단 8점. 그도 그럴 것이, 이 전시는 벨기에 왕실예술역사박물관이 소장한 한국문화재 중 복원이 필요한 것들을 가져와 조치 후 돌려보내기 전에 일반에 잠시 공개하고자 열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걸 다시 보려면 벨기에까지 가야 한다.)
전시된 8점의 문화재 중 2점이 금속공예품, 나머지 6점이 고려청자였는데 신기하게도 모두 상감청자였다. 2점의 사발에는 운학문이 새겨져 있었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물가의 풍경을 담은 점이 흥미로웠다. 보름달처럼 만든 벽에 구현한 그림도 이번 전시 기물들에서 반복적으로 보이는 버들문이다. 이번에 한국에 오게 된 것들이 특히 그랬는지, 아니면 벨기에 왕실이 사들인 취향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만약 취향이라면 상감청자에서 보이는 회화가 특히 직관적이기 때문은 아닐지 짐작해 보는데 물가 풍경을 쏙쏙 골라낸 걸 보니 제법 풍류를 좋아하셨군요, 하며 혼자 쿡쿡 웃었다.
복원이 목적이었던 이번 전시 문화재들 중에서도 메인은 이 <청자 상감 포도 동자 무늬 표주박 모양 주자>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기존 처리 중 미흡한 부분을 바로잡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형태를 추측해 새로 만든 부분도 많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손잡이와 주둥이, 뚜껑은 색감과 광택, 질감에서 몸통과 차이를 보인다. 모두 새로 제작한 것들로 동시대 다른 유물들과 비교하여 원형을 추측했다고 한다.
모 전기포트가 떠오르는 모던한 라인의 주둥이와 한껏 멋 부린 꼬임 형태의 손잡이는 디자인 관점에서도 훌륭하지만 저걸 터지지 않고 구워낸 당시 고려의 도자 기술도 대단하다. 또 눈에 들어온 건 손잡이와 뚜껑에 만든 작은 고리. 아마 뚜껑 분실 방지용으로 매듭을 묶어 손잡이와 연결했을 텐데 (마치 애플펜슬 꽁다리 분실 방지를 위한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매듭이 어떤 색과 모양이었을지는 철저히 관람객이 펼치는 상상의 몫이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봤던 기물은 이쪽이다. 위의 주자보다 굴곡이 더 크게 잡힌 표주박 형태로, 세요와 대비되는 풍만함 덕분에 아방가르드한 느낌마저 준다. 입구는 몸통과 같은 원형처럼 보이지만 사실 바깥 부분을 육각으로 깎은 것이 화룡점정이다. 유약이 자연스레 흐르며 생긴 두께 차이도 멋스럽다.
기물마다 어디를 복원했는지 설명되어 있어서 기술된 부분을 유심히 봤다. 인상 깊었던 점은 킨츠기(金繼ぎ - 옻 혼합 접착제로 붙인 후 금가루 등으로 채색하여 마감하는 일본식 금칠 수리기법)한 과거의 보존처리를 전면적으로 제거한 것, 그리고 제거가 쉬운 소재로 복원했다는 내용이었다. 킨츠기는 복원 기술의 일종이지만 그 자체로 금분으로 수리자국을 일부러 드러내며 새로운 요소를 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최대한 원래 모습에 가깝게 하고자 하지만 지금의 복원이 정답이 아닐 수 있기에 제거하기 쉬운 소재로 선택한 것에서 전문가들의 고민이 느껴졌다.
(사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킨츠기가 아니라 긴쓰기가 맞다. 그러나 은분으로 마감하는 긴츠기(銀繼ぎ)도 있기 때문에 킨츠기로 구분하여 표기하는 쪽을 선호한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있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고, 국외소재 문화재의 적절한 복원 및 보존처리가 필요하다는 것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노력들이 있었을 거고, 그 덕분에 세계의 여러 박물관에서 다양한 나라의 문화재를 좀 더 좋은 상태로 볼 수 있었겠지.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타국에 있는 문화재들을 구경할 기회가 종종 있으면 좋겠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이번 전시의 도록을 홈페이지에 공개하여 누구나 다운로드할 수 있게 했다. 코로나 이후 예술·문화 분야에 대한 대중 접근성이 많이 떨어졌는데, 양질의 예술이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국립박물관의 이런 행보가 반갑다. 실물을 직접 보는게 가장 좋은 경험이겠지만 아무래도 벨기에에 직접 가는 것보다는 편한 선택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