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그런 이유로? 바로 그런 이유니까요!
그러니까, 약 한 달을 꼬박 야근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도저히 못 참아. 차를 마셔야겠어.”
저녁식사도 거르고 일하다 시침이 두 자릿수를 가리키고도 한참 지나서야 털레털레 회사를 나서며 중얼거렸습니다.
곧장 집으로 와 외투만 벗어던진 채로 우유 한잔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물을 끓였습니다.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않은 것도, 내일의 출근을 위해서는 곧 잠에 들어야 할 시간인 것도 당시의 저에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지금 당장 차를 마시겠다는 집념만으로 물을 끓이며 차와 잔을 고르는 시간 1분, 다기를 덥히고 차가 우러나는 시간 약 3분 만에 한밤중의 찻자리를 펼쳤습니다. 그리고는 자리를 잡고 앉아 느긋하게 향과 맛을 즐기며 한 주전자를 끝까지 비워냈지요.
그날 야근 후 마신 차는 무척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것들 중 가장 맛있는 차도 아니었고 인생 최고로 맛있게 우린 차도 아니었지만 마지막 한 방울까지 100% 만족스럽지 않은 순간이 없었을 정도였어요. 저도 모르게 아, 살 것 같다, 하며 크게 심호흡하고서야 비로소 왜 이렇게 간절하게 차를 마시고 싶었는지, 무엇이 부족했는지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카페인이라고요? 아닙니다. 30분이라도 더 자고 싶은 상태였는걸요. 하루 종일 물 한 모금도 못 마실 정도로 바빴으니 수분 섭취를 필요로 했나? 역시 아닙니다. 그랬다면 생수 한 병을 해치웠겠지요. 그 순간 저에게 가장 필요하고 간절했던 것은 바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있는 여유”였습니다.
일상이 괴롭지 않은 직장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과 사람에 이리저리 치는 생활을 평소에는 그럭저럭 견디고 넘어갈 수 있어도 그 정도가 과해져 심신이 모두 지쳐갈 때면 돌연 허탈하고 허무해집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러고 있나, 이런다고 무엇이 달라지나. 다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것인데, 제대로 먹고 제대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지요. 제가 겪은 직장생활의 딜레마는 그랬습니다. 지갑이 전보다 두둑해지니 더 풍요롭게 살 줄 알았는데 남은 것은 피로에 찌든 몸과 마음, 턱없이 부족한 시간뿐이고, 꿈꾸던 여유로운 생활과는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었어요. 개운하게 스트레스를 풀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어서 충동적으로 무언가 사버리는 것으로 대체하고는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고요. 맛있는 차들이 상미기한을 넘기고 점점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되어가는 것을 맥없이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 년에 한두 번, 운이 좋게도 날씨가 화창하고 기온도 적당하며 공기도 맑은 데다 할 일이 많지 않은 마법 같은 날을 만나면 출근했다가도 오후 반차를 쓰고 차를 마시러 나가곤 했습니다. 이직 준비하는 거 아니냐는 팀원들의 농담 섞인 말을 뒤로하고 유유히 회사 밖으로 걸아나가 한낮의 볕을 쬐며 한가로운 공원을 잠깐 산책했고 좋아하는 찻집에 찾아가 맛있는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낸 후 맛있는 디저트를 한두 개 사들고 집에 돌아와 달달하고 포근하게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다도는 사무실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환경과 처지에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차를 즐기고 그로 인해 마음을 다듬는 것이 다도라면 사무실이라고 못할 것도 없지요. 짬 내어 텀블러에 티백 하나 퐁당 우려 마시는 것은 제대로 된 다도가 아니라며 혀를 차기에는 삭막하고 피곤한 사무실에서의 차 한 모금이 정신을 맑게 하고 나를 정돈하는 효과를 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어요.
그러나 평소 사무실 다도를 즐기는 사람이라도,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사무실에서는 일하는 틈틈이 텀블러 하나 가득 우려 둔 차를 홀짝 거리고 퇴근 후에는 기분 내며 찻자리를 예쁘게 차려 마셔도, 한낮의 자연광을 만끽하며 느긋하게 차 마시는 시간이 그립습니다. 사람으로 북적이지 않는 한가로운 평일 낮의 찻집이 간절하고요. 추운 겨울날 주머니의 핫팩은 전기장판보다 못하고, 학창 시절 수업 도중의 쉬는 시간은 방학보다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핫팩이나 10분의 쉬는 시간이 아무 소용 없어지지는 않지요. 사무실 다도와 차를 위한 휴가도 같은 맥락입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이 일상의 혼탁한 공기에서 충분히 맑은 공기를 오래, 그리고 많이 마실 수 있게 해주는 도구인데, 제게는 그게 ‘차’였습니다. 차를 마시면 이런 점이 좋았거든요.
차는 일단, 맛있습니다. 얼마나 맛있냐면 집중하게 될 만큼 맛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사람이 무언가를 먹고 마실 때 집중하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그냥 이런 맛이구나, 배가 불러온다, 하면서 먹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요? 무언가를 먹을 때 내가 어떻게 하고 있었지 하고 문득 의문이 든 것 자체가 이미 그 시간이 인상 깊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차를 마실 때는 집중을 합니다. 입술에 닿으며 처음 입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목넘김 이후의 여운까지 감각의 가로축, 세로축, 또 시간축까지 온갖 방면으로 자극하는 음료입니다.
순간에 기꺼이 집중하도록 만드는 것은 꽤 많이 중요합니다. 그 순간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한 우선순위가 완전히 달라지지요. 심지어 내가 원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집중하는 시간이니 그 효과는 좀 더 강력합니다. 편안한 자연광과 잔잔한 음악, 좋은 풍경처럼 지금 이 시간을 더 즐겁게 집중할 수 있는 좋아하는 환경이 갖추어져 있다면 금상첨화네요. 이렇게 자진해서 집중하다 보면 당연히 일상에서 나를 괴롭히는 생각들이 기세를 못 펴고 물러나 있지 않겠어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는 사무실 다도를 하며 짧게 툭툭 털어냈다면, 가끔 좋은 곳에서 좋아하는 차를 느긋하게 마시며 복잡한 머릿속과 무거운 마음을 비우고 깨끗하게 쓸고 닦아 다시 새로운 것들을 채울 수 있게 만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내가 온전하게 행복해지는 시간을 한껏 누릴 수 있다는 여유와 만족감이 있어야 인간은 힘을 내서 살아갑니다. 제게는 그런 시간을 만들어주는 확실한 활동이 있고, 그게 무엇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차라서 더 좋습니다. 저는 언제 어디서나 차를 마시며 일상 속 비일상적 감각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때로는 일상에서 더 멀리 벗어나기 위해 차만을 위한 시간을 따로 마련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