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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 Feb 13. 2021

결국 평범하지 않은 어떤 삶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고

평범한 사람이 나는 좋아요

평범한 커피점에서 만나요

평범한 옷과 신발을 신고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 말아요

(...)

평범한 사람은 거울을 보다가

갑자기 문득 슬퍼질 때가 있는데요

평범한 사람의 일기장 속에는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차 있어요

왜 누군가는 항상 주목을 받고

왜 내 얘기는 너에게도 들리지 않는지

- 이랑 '평범한 사람' 중에서 -


이랑의 노래 '평범한 사람'은 가장 평범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적어도 노랫말은 그렇다. 하지만 3분 남짓한 이 노래가 끝나갈 즈음 우리에게 이 가사의 주인공은 더 이상 평범한 존재로 남지 않는다. 그 사람이 "거울을 보다가 슬퍼질 때도 있"고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찬 일기를 쓴"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안다. 그 사람의 얼굴을 알지 못하더라도, 어떤 재능과 특별함이 있는지 보지 못했더라도, 이제 우리는 어떤 무심한 집단 속에 그 사람을 묶을 수가 없다. 그 사람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인물의 평범함에서 시작했으나 비범함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작은 아씨들>의 조는 19세기 미국 평범한 가족의 네 자매 중 한 명이지만 결혼이나 사랑보다 꿈을 쫓는 비범한 주관과 용기를 지녔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평범한 독일 청년이지만 문자 그대로 사랑에 목숨을 걸었기에 비범한 캐릭터로 길이길이 남았다. 사회와 시대가 강요하는 평범 속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과 싸워 나가는 단독자들은 우리가 책 속에서 가장 만나고 싶은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비범한 구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인물에 관한 책이 굳이 쓰여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질문이 남는다.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 이유는 <스토너>가 그런 책이기 때문이다. <스토너>는 윌리엄 스토너라는 이름을 지닌 평범한 인물이 1891년에 태어나 1956년에 사망하기까지의 일대기를 다큐멘터리처럼 다룬다. 인터뷰가 없다는 점에서는 다큐멘터리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거리두기'를 행하고 있기도 하다. 서술은 3인칭으로 진행된다. 스토너의 인생에서 발생하는 외부적 사건들과 그에 따른 내적 갈등과 변화들은 일관된 어조와 톤으로 묘사된다. 책의 첫문장조차 윌리엄 스토너가 평범해 마지않는 인물이라는 걸 암시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억되지 않는 인물. 딱히 우리가 닮고 싶은 삶은 아닐 것이다. 농사를 짓는 부모 아래서 태어난 스토너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이런저런 노동을 거들며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다. 부모님의 비범하지 않은 삶을 동경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던 그는 자연스레 밭에서의 노동을 계속하는 미래를 그리지만, 어느날 아버지의 제안으로 컬럼비아에 있는 농과대학에 입학한다. 아버지의 목적은 아들이 농사를 더 잘 짓기 위한 신기술을 배우게끔 하는 것이었으나, 스토너는 대학에서 필수과목으로 수강한 영문학 개론 강의를 통해 우연히 삶의 전환점을 만나게 된다.


아처 슬론이라는 언뜻 괴팍해보이는 교수의 수업에서 난생 처음으로 접한 영문학은 친구가 없던 스토너에게 '시간을 초월한' 것 같고 '죽은 자들이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영문학을 대하는 스토너의 눈이 빛나는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은 슬론 교수는 그에게 교육자의 재능이 있음을 일러준다. 슬론의 한 마디를 계기로 스토너는 졸업 이후에 부모님이 있는 시골로 돌아가지 않고 교육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심한다. 이후로 스토너의 개인적인 삶은 교육자가 되기 위한 공부와 연습, 한 단계씩 교육자에 가까워지는 순간들로 메워진다.


한편 스토너는 적당한 시기에 이디스라는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한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수줍은 감정을 능숙하게 다루지는 못하더라도 나름의 용기로 청혼까지 한다. 그러나 평범하게 시작한 이들의 결혼은 첫날부터 실패한 것임이 드러난다. 스토너에 비해 편안하고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온 이디스는 남편이라는 존재와 함께 맞아들인 낯선 삶의 양식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랑의 행위조차 거부하는 이디스는 자신만의 불행으로 인하여 서서히 표정이 굳어간다. 이후 스토너가 죽는 날까지 둘은 한 번도 갈라서지 않고 한 집에서 살지만 거의 한 순간도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결혼에 관해서는 불행했던 스토너이지만, 사십대에 이르러 한 매력적인 여성을 만나는 행운을 얻기도 한다. 이번에는 일방향이 아닌 상호적인 사랑에 성공한다. 상대는 스토너의 수업을 수강하던 총명한 학생 캐서린 드리스콜이다. 이디스의 오랜 무심함과 까칠함, 일터에서 반복되는 크고작은 일들로 지쳐가고 잔주름이 늘어가던 스토너는 캐서린과의 관계를 통해 그야말로인생의 황금기를 맞는다. 스토너가 캐서린과 함께 보내는 시간들은 이 책, 다시 말해 윌리엄 스토너의 인생 전체에서 가장 빛나고 깨끗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행운이 으레 그렇듯 스토너와 캐서린의 사랑도 머지않아 끝을 맞이한다. 외부적 힘에 의해서다. 좁은 대학 사회에서, 아내와 딸이 있는 사십대 교수 스토너와 이십대의 젊은 강사 캐서린의 관계는 악의적인 소문으로 둔갑되어 퍼져나간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얄팍한 언어 안에서 이들의 관계는 빠르고 쉽게 납작해진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비범한 가상의 인물들과 달리, 스토너는 캐서린과 이별을 하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행한다. 문학작품의 주인공 치고는 보잘것없는 선택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다음의 대화내용에서 우리는 어떤 용기를 발견하게 된다.



"만약 내가 모든 걸 던져버린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떠나기로 한다면...... 당신은 나랑 함께 가주겠지, 그렇지 않소?"

"그래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는 걸 당신은 알고 있겠지, 그렇지 않소?"

"네, 알아요."

"내가 그런 행동을 하면......" 스토너는 자신에게 설명하듯이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이...... 우리가 했던 모든 일과 우리의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오. 내가 교단에 설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한 일이고, 당신은...... 당신도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겠지. 우리 둘 다 지금과는 다른 사람, 우리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사람이 될 거요.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거야."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번 일에서, 적어도 우리 자신의 모습은 지킬 수 있었소. 지금의 모습이...... 우리 자신의 모습이니까."



스토너와 캐서린의 사랑이 '끝났다'는 표면적인 사실 이면에는 서로를 영혼까지 사랑한 두 사람이 그 감정을 영원히 박제하기 위해 상대방을 물리적으로 떠난 것이라는 진실이 존재한다. 이 고유한 사랑에 있어서는 세간의 시선에 지는 것이 오히려 이기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처럼 진실이란 그것을 소유한 주체들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며 거친 시선으로는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어둑어둑하고 비밀스러운 곳에 영원히 보존되곤 한다.


캐서린과의 이별 이후로 스토너의 삶은 서서히 소실점을 향해 간다. '하루는 하나의 삶과도 같다'는 독일 속담처럼 매일 새롭게 깨어나고 잠들기를 반복하지만, 죽음을 향해 가는 환자의 심장 박동처럼 전체적으로는 진폭이 줄어드는 모양이다. 스토너 개인은 어리숙하고 수줍었던 청년시절에 비해 무뎌지고 무심해졌지만 여전히 외부와 타자에서 오는 불행은 통제 범위 밖이다. 과거의 한 사건으로 인해 스토너를 오랫동안 미워해온 로맥스 교수는 그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를 멈추지 않고, 어린시절 반짝거리는 눈빛을 지녔던 총명한 딸 그레이스는 이디스의 불행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듯 지치고 어두운 얼굴로 변해가며 알코올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윽고 스토너는 자기 자신의 육체에 대한 통제 또한 불가능해지는 노후의 순간을 맞는다. 말기 암을 진단받고 인생을 서서히 정리하는 스토너의 내면은 무척 고요하게 묘사된다. 여기까지 윌리엄 스토너의 인생을 차근차근 따라온 독자라면 그가 온전히 홀로 맞는 죽음의 순간에 어떤 아름다움과 공허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들은 무척 아름다워서 길게 옮겨두고자 한다.



그는 다시 숨을 쉬었지만, 그의 몸 안에서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차이가 느껴졌다. 자신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지식 같은 것을. 세상 모든 시간이 자신의 것인 양 느긋해도 될 것 같았다.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리자 그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학생들 몇 명이 뒷마당 잔디밭을 가로질렀다. 어딘가로 서둘러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모두 세 쌍이었다. 여학생들은 팔다리가 길었으며, 가벼운 여름옷을 입은 모습이 우아했다. 남학생들은 즐겁고 경기로운 표정으로 여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잔디밭에 거의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걸었다. 그래서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았다. 그는 시야를 점점 벗어나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오랫동안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한 여름날 오후에 어딘가 멀리서 아무것도 모른 채 터뜨리는 웃음소리.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그의 의식 가장자리에 뭔가가 모이는 것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좀 더 생생해지려고 힘을 모으고 있었지만, 그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자신이 그들에게 다가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원한다면 그들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그의 것이었다.


(...)


그는 책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 책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장을 펄럭펄럭 넘기며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책장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짜릿한 느낌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그의 살과 뼈를 훑었다. 그는 그것을 어렴풋이 의식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그를 가둬주기를, 공포와 비슷한 그 옛날의 설렘이 그를 지금 이 자리에 고정해 주기를 기다렸다. 창밖을 지나가는 햇빛이 책장을 비췄기 때문에 그는 그곳에 쓰인 글자들을 볼 수 없었다.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육신에 남은 마지막 에너지마저 스러져 가는 순간에 스토너의 눈길이 머무는 곳은 생동하는 젊음과 욕망, 기쁨의 기운으로 가득 찬 여름날의 풍경이다. 일생에서 거의 유일하게 사랑했던 두 사람인 캐서린과 딸 그레이스는 곁에 없지만 고독했던 청년시절의 그에게 최초로 빛을 보여주고 인생을 끌어갈 동기가 되어준 '책'을 만지며, 종이의 촉감을 마지막 감각으로 지닌 채, 스토너는 눈을 감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사람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에 가깝게 묘사한 작품임을 증명하듯 스토너의 죽음을 묘사한 마지막 문장 이후에 어떤 이야기도 독자에게 제공되지 않는다.


앞서 읽었던 <스토너>의 첫 문장을 이렇게 바꾸어 말해볼 수도 있다. '1800년대 말 미국의 흔한 블루칼라 가정에서 태어나 영문학에 매료되어 꾸준한 노력 끝에 박사학위를 따고, 대학 교단에서 강의를 하다 노년에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딱히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거나 회자되지 않는 삶을 산, 실패한 결혼과 성공적인 사랑을 한 번씩 겪었던 윌리엄 스토너.' 그의 인생에 관한 몇백 페이지 분량의 묘사와 설명을 지나오고 나서도, 스토너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요약한 이 한 문장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의 속성 중 하나로 '누구에게도 얘기가 들리지 않고 일기장 속에만 질문이 가득한' 점을 언급한 이랑의 노래가사를 다시 떠올려본다. 대부분의 인생은, 허무하게도, 한두 줄로 요약이 가능하다.


혼자 있는 조용한 밤마다 <스토너>를 조금씩 읽었다. 스토너가 세상에 지는 듯한 순간에는 애가 탔다. 고독한 그의 삶을 엿보는 동안 얕은 죄책감과 깊은 즐거움이 있었다. 타인의 삶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경험 없이 뭉뚱그려 판단해왔던 순간들에 대한 희미한 죄책감과, 보편적인 듯 보이는 삶들 중 결코 보편적인 삶은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확인하는 확실한 즐거움이었다. 우리가 농담처럼 말하곤 하는 '고난 총량의 법칙'을 떠올렸다. 누구의 인생에도 얼마만큼의 고난과 얼마만큼의 행복이 있으며 행운과 불운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온다는 것. 선인과 악인을 만날 것이지만 그들이 당신의 인생에 끼치는 영향력은 어느 정도 당신의 마음과 행동에 달려 있다는 것. 


인생은 가구 조립과는 다르기에 스토너의 인생을 완독한 독자라 하더라도 남은 삶을 어떻게 조립할지에 대한 유용한 힌트는 얻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개인적으로 발견한 스토너의 멋진 자질 중 하나는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아주 어려운) 태도이지만, 그것을 통해 그가 조금이라도 행복할 수 있었냐는 질문에는 자신있게 답할 수 없다. 행복에 관한 담론이 넘쳐나고, 인정과 찬사가 어느 때보다 상위가치가 된 요즘 시대에 스토너 같은 삶을 꿈꾸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서글퍼질 즈음 스토너를 창조해낸 작가 존 윌리엄스의 코멘트가 희망을 남겼다. "나는 그가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스토너의 삶을 슬프고 불행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삶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어느 정도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그 일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했으니까요."


앞으로도 어떤 인생은 무수히 말해질 것이고 어떤 인생은 누구의 관심사에도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한 남자의 일생을 정성스럽게 읽어냄으로서 비로소 우리는 그를 약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이해를 위해 칠십 억 인구의 삶을 일분씩만 들여다 보기에도 일생은 너무나 짧다. 대신 <스토너>는 다른 삶이 지닌 디테일을 직접 보지 않고도 그곳에 있음을 되새기게 한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작품이다. 타인의 삶에 존재하는 이유와 진실은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깃든 경이로움이 있기에 사실은 어떤 삶도 평범하지 않다. 이러한 문장들을 마음에 품은 채 주변의 여러 얼굴들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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