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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 Jul 28. 2022

논알콜 회식



“너 한 잔만 마신 것 맞지?”

LP바에서 음악에 맞춰 머리를 흔들고 있으면 친구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묻는다. 대부분 대답은 예스다. 그럴 때면, 맥주를 한 잔만 마셔도 신나게 놀 수 있는 능력이 작은 축복이라고 느낀다. 나는 쉽게 취하는 인간이다. 말하자면 음주가무의 가성비가 끝내주는 것이다. 하지만 쉽게 취하는 능력이 장점으로 받아들여지는 시공간은 흔치 않다. ‘술 마시는 능력’이 이토록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가 한국 말고도 있을까 싶다. 여느 한국인처럼 나 또한 자발적이지 않은 술자리를 숱하게 지나왔다. 대학생 새내기 때 선배들이 건네는 소주를 마셨던 것이 시작이었다.


일학년부터 이학년까지 활동했던 사진학회는 사진보다 술이 자랑거리인 집단이었다. 학회모임을 줄여 ‘학모’라고 부르던 회의가 있었다. 학모가 끝나는 시간은 어슴푸레한 저녁 즈음이었다. 술을 마시러 갈 시간이었다. 종교적인 제의라도 되는 것 마냥, 매주 정해진 시간에 다같이 술을 마시는 것이 학회의 전통이자 자부심이었다. 이상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지만 그중 최고로 이상했던 문화는 다음과 같다. 테이블당 4명씩 앉은 채로 안주는 딱 한 가지를 시켰다. 4명이서 정확히 소주 4병을 비워야 다음 안주를 시킬 수 있었다. 술도 안 마시고, 음식도 안 먹으면 그만이었겠지만 지기 싫은 마음에 열심히 술을 마셔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경쟁심이었다.


우리는 최초로 룰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열심히 그것을 따랐다. 주량이 세고 술을 즐기는 친구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소주를 꿀떡꿀떡 넘기곤 했지만 그런 경우는 소수에 불과했다. 인생이 소주보다 더 쓰다는 걸 알기에는 어린 나이였기에 소주의 맛은 비릿하고 쓴 맛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테이블 당 4병’이라는 목표에 큰 기여를 할 수 없어 미안했던 나는 물잔에 몰래 술을 버리거나, 서너 잔쯤 마셨을 때쯤 테이블에 엎드려 자는 척을 했다. 조금만 취했어도 그냥 그렇게 했다. 어떤 친구는 아무도 안 볼 때 어깨 뒤로 소주잔을 넘겨 바닥에 쏟아버리는 잔꾀를 부렸다. 그리하여 그가 앉았던 자리 뒤쪽 바닥에는 투명한 액체가 흥건했다.


반쯤 취한 채로 학회 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는 골고루 흑역사를 나눠 가졌다. 멀리서 보면 귀엽고 웃긴 시절이었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사진을 찍고 싶어 학회에 들어왔다가 술자리를 견디기 힘들어 탈퇴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건 왠지 씁쓸했다. 술에 약한 신체를 지님으로써 얻게 된 얕은 패배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번이 십 년도 넘게 차이나는 선배들이 찾아오는 술자리에서는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알콜 냄새 가득한 혼돈 속에서, 나는 왜 맑은 정신으로 즐겁게 놀 수는 없는 건지 한참 생각해보았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면 대개 “그럴 때가 있었다고요? 요즘 그러면 큰일 나는데!”라는 반응을 듣곤 한다. 대학가에서의 술문화는 지난 십년 사이에 상당히 개선되었다. 이천년대 초반까지는 엠티에서 음주를 강요당한 신입생이 사망하는 사건도 심심찮게 일어났던 걸 안다. 한두 세대 전과 달리 지금의 청년들은 개인이 비교적 존중 받는 문화 속에서 이십대를 보내는 셈이다. 개성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비합리적인 요구는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Z세대의 정확한 정의라면, 나는 그 세대가 부럽다.


천천히 변화해 온 사회이지만 여전히 많은 성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상대방이 얼마나 많은 술을 마실 수 있는가다. 선천적으로 알코올 대사물질을 잘 분해하지 못하는 몸을 가진 한국인들이, 주량이 쎄다는 점을 엄청난 장기로 생각하다니. 이것은 도무지 쉽게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가능하면 편하고 좋은 사람들과 있을 때에만 술을 마시고 싶다. 상대방의 말을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회식이나 미팅 자리에서가 아니라 말이다.


…라고는 하지만 나도 잘 보이고 싶은 자리에서는 열심히 술잔을 비운다.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술을 잘 마시는 사람에게 크고작은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서다. 미리 숙취해소제를 먹고 가서 꽤 오래 버티는 날도 있다. “술 좀 마시는데?”라는 상대방의 말은, 약간 긴장하고 많이 취한 상태에서 들으면 무게감이 몇 배로 크다. 일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고 싶은 나의 마음은 이상한 형태로 발현이 되어서, 회식자리에서 무리해서 속도를 내고는 다음날 두통을 맞이하곤 한다. 반면에 친구들과의 자리에서는 맥주 한 잔으로도 만족스럽다.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때는 논알콜 맥주조차도 얼굴이 달아오르게 할 만큼 즐겁기 때문이다.


회식자리에서 논알콜을 마셔도 괜찮은 세상을 상상해본다.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몇 병을 비우는지와 무관하게 말이다. 그런 세상은 아마도 헛된 약속과 구토와 쓸데없는 스킨십이 대폭 줄어든 세상일 것이다. 이것은 몸의 차이가 온전히 존중되는 사회에 대한 바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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