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평가를 마치고 아이들의 시험지를 하나하나 넘기며 훑어보고 있었다. 채점하기 전에 마음의 준비랄까? 주어진 문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푼 친구가 있는가 하면, 풀다만 친구도 있고, 하나도 적지 못한 친구가 있었다. 그렇게 훑어보다가 한 친구가 쓴 문구가 눈에 띈다. "선생님, 제가 수포자라서요. 죄송합니다."라고 쓰여있어다. 그것을 보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쓰라리다. 이름을 보니 혜정이다.
혜정이는 마음이 곱고 예쁜 친구이다. 하루는 손등에 상처가 난 상태로 수업에 들어갔는데, 그걸 보더니 슬그머니 밴드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 아이였다. 다음날에 수업을 하러 들어가니 밴드가 또 하나 놓여있었다. 혜정이의 마음에 고마움이 물씬 풍겼다. 복도에서 만나면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아이였고, 교실에 들어가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아이였다.
그런 밝은 아이가 수업만 시작되면 눈에 빛을 잃는다. 낯빛이 어두워지며 조용해진다. 수업을 진행하는 나를 바라보려고 노력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인다. 그래도 첫 수업에는 열심히 필기를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필기하는 것조차 포기했다. 아이들이 문제를 푸는 시간에 혜정이에게 다가간다. "많이 어렵니?"라고 물으니, 수줍게 웃으면서 "하나도 모르겠어요. 저 수학 너무 어려워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힘없이 대답한다. "그래도 뭔가 노력해봐"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말을 하는 내 목소리는 무미건조했으며 듣는 혜정이에게는 공허한 메아리였으리라
수학이라는 과목의 특성상 한 교실에서의 편차가 무척 크다. 이는 기실 수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과목이 그런 것일 테다. 영어나 국어는 물론 예체는 과목인 음악, 미술, 체육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가 있는 반면 나처럼 미술시간만 되면 죽을상이던 사람도 있게 마련이니깐. 내가 수학선생님이라 수학에서 크게 느끼는 것도 있겠지만, 사회적으로도 수학에 대해서 더 강한 잣대를 갖고 있는 것은 또한 사실일 것이다. 영포자, 국포자라는 말은 없어도(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색하다) 수포자라는 말은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지 않은가?
분수의 덧셈과 뺄셈을 모르는 아이에게 이차방정식을 가르쳐야 한다. 근의 공식을 모르는 아이에게 지수함수의 활용을 가르쳐야 한다. 이차함수를 모르는 아이에게 미분과 적분을 가르쳐야 한다. 중1 과정을 모르는 아이에게 고2 과정을 알려주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 그 아이에게 수업시간에 필요한 한 가지 개념을 가르치려면 그 이전 과정 몇 개를 가르쳐야 하고 그것을 다 가르치려면 진도는 나갈 수가 없다.
시험성적으로 순위가 매겨지고, 그 성적으로 상급학교를 진학한다. 성적이 좋지 못한 아이들은 학습 무기력에 빠지거나, 자존감이 낮아진다. 그 무기력감이 한 해 한 해 쌓이다 보면 자신이 초라해지는 우울감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성적으로 그 아이의 전부가 결정되는 듯하다. 그게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아이들도 알고 사회도 알지만, 소용이 없다. 때론 아는 것이 소용없을 때가 없다. 서글픈 일이다. 성적이 좋은 상위권 아이들은 마음이 편할까? 또 그건 아니다. 상위권 아이들은 좋은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 한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그게 또 애처롭다. 한 문제를 틀리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인데, 틀린 한 문제로 울고불고한다. 그 한 문제로 2등급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답안지에 "수포자라서 죄송해요"라고 쓰는 혜정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수포자인 게 왜 죄송한 걸까? 사람마다 잘하는 것이 있고 못하는 것이 있게 마련인데, 우리 교육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교육과정은 "이 나이 때의 아이들은 이걸 배울 수 있어. 이걸 배우고, 다음에 저것을 배우고, 그다음에 이런 걸 배우면 할 수 있어."라는 전제로 이뤄진다. 하지만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그 전제를 제대로 따라가는 아이들은 대체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아이들에게 수학의 신비로움과 수학의 아름다움과 수학의 실용성을 알려주고 싶지만, 이미 아이들은 "수학은 어려워"가 마음속 깊이 각인되어 있으며, "수학은 재미없어"는 절대불변의 진리이다. "수학의 실용성"은 컴퓨터의 등장으로 물 건너 가버린 느낌이다. 굳이 코딩이니 뭐니 안 배워도 이미 누군가가 다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참 가르치가 점점 어려워지는 과목이 수학이다.
"수포자라서 죄송해요"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수포자라는 인식을 갖게 해 줘서 미안하구나"라고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혜정이에게 "수학 못해도 되니깐, 수포자라는 생각을 하지 마, 선생님한테 죄송할 거 없어. 너가 하고 싶은 걸 찾아서 그걸 잘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해줬어야 했는데....
하지만, 다음 주에도 똑같은 모습으로 수업을 하고 있겠지. 나는 얼마나 많은 혜정이를 만들어왔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혜정이를 만나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혜정이를 만들어 낼 것인가? 수포자라서 죄송한 세상이 아니라, 수포자라는 말이 없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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