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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Dec 29. 2022

나라는 거대한 책장

내 주치의는 늘 말했다. 과거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누군가와 함께한 추억은 내게 남아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것이라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면 큰 책장을 상상했다. 추억은 한 권의 책으로 남아 나라는 큰 책장에 꽂혀 있는 것이다. 책장 안에는 내용이 각기 다른 책들이 꽂혀 있지만 결국 같은 한 책장에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책장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책들이 꽂혀 책장을 꾸리고 있다. 예를 들면 글을 쓴 기억, 피아노를 공부한 기억, 각기 다른 친구들과 어울린 기억 등등. 그중 오늘은 성정체성에 관한 책을 꺼내 보고 싶었다.


나는 여자고, 여자와 남자를 좋아한다. 혹은 내게 상대의 성별은 상관없는 것일 수도 있겠다. 엄마와 대화하다 화를 낸 적이 있다. 엄마는 그날,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얇은 천 같이 말했고 그게 걸거쳐서 간지러웠다. 간지러운 게 신경에 거슬린 나는 화를 냈다. 엄마가 ‘남자친구’라고 내 애인을 호명하는 것은 내 애인의 성정체성을 재단하는 것뿐 아니라 내 과거까지 지우는 것이라고. 물론 그렇게 감정적으로 나설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날따라 어떤 존재가 어떻게 호명되는가에 대해 예민해져 있었다. 물론 이 일에서 사과할 것은 나도, 엄마도 아니었다. 사랑하는 주체를 각각 남친, 여친이라고 호명하는 게 편하게끔 만든 이 사회였지. 물론 남친, 여친이라는 호칭은 게이나 레즈비언에게 중요한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용례가 아니면 나는 일반적인 용례의 남친, 여친이라는 호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처음 여자를 좋아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키가 무지 조그마하고, 언어 선택은 자유분방해서 육두문자를 필터 없이 쓰는 여자애가 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좋았고, 그냥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성적인 끌림을 느끼진 않았으니까 나는 좋아하는 게 아닌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 애가 내가 아닌 다른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 게 서운했고, 다른 친구와 단둘이 놀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왜 안 불러줬나 서운했다. 분명 다른 친구들이 그럴 때는 서운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유독 그 아이가 중심에 서면 감정이 휙휙 바뀌었다. 그 아이의 관심을 차지하고 싶었다. 연예인과 나를 비교할 수 없다는 걸 알아도, 연예인보다는 나를 봐줬으면 했다. 나는 근데 이 일을 있을 수 있는 일로 치고 넘겼다. 이런 감정이 왜 드는지에 대해서 탐구해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대체 2학년이 뭐길래 2학년 때마다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는진 모르겠지만, 우연히도 그랬다. 나를 포함한 세 명의 삼총사가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을 좋아했다. 나는 그 장면을 잊지 못한다. 그 애가 내 무릎을 베고 포근하다고 하며 밤하늘을 보던 모습을. 밤하늘엔 별이 없었지만, 그 별들이 모두 그 아이의 눈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알았다. 내가 그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그 아이의 눈에 들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급식도 나랑 같이 먹어주지 않으면 속상했고, 하교는 꼭 나랑 같이 해야 했으며 그 아이의 시시콜콜한 모든 걸 알고 싶었다. 나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그 애에게 했으면 했고, 그 아이의 시선엔 늘 내가 걸려있었으면 했다. 성적인 끌림을 느끼지 않아서 헷갈렸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사랑이라고. 내게 사랑은 상대와 일상을 공유하고 서로를 구속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아이를 구속하고 싶었고 그 아이에게 구속당하고 싶었다. 구속이라는 단어는 꽤 불친절한 것 같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이 단어가 아니면 나는 어떻게 적절히 이 감정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내가 여자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동시에 중학교 때 그 아이도, 내가 좋아한 것이었구나 싶었다.


물론 지금 내겐 ‘남자친구’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 과거가 사라지는 건 아닐 테다. 나는 분명 여자를 좋아했고, 좋아할 여지가 있다. 내가 남자친구를 사귀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자를 좋아했던 기억은 여전히 이 책장에 남아 나를 이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를 사귀는 지금 내가 이성애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책장에는 남자친구와의 연애 경험도 꽂혀 있고, 여자를 짝사랑한 경험도 꽂혀 있어서, 그리고 이 책장에 꽂힌 책은 모두 나를 가리키고 있는 합집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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