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의 동시다발적인 사운드를 귀 기울여 듣다 보면 등골이 오싹하다가, 불쾌하다가 편안해지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오디오가이드 없이 전시 설명은 텍스트로 돼있음.)
<내 방은 또 다른 어항>
90년대부터 최근까지 필립 파레노 작가의 30년 활동을 총망라하는 전시인 데다가, 동료 예술가, 음악가, 과학자 등 다수 전문가와 협업을 끊임없이 시도해서 작품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막>
리움 야외 데크에 있던 아니쉬카푸어 작품을 철수하고 필립 파레노의 작품 <막>을 설치하면서 화두가 되어 야외 작품 또한 굉장히 궁금했는데. 첫인상은 ‘뭐야. 저거 완전 자이로드롭?’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센서 기능을 가진 인공 두뇌 기계탑..!
이 자이로드롭이 온도계, 기압계, 지진계 센서를 통해 외부의 기온, 습도, 풍량, 소음, 미세한 진동과 같은 지상의 환경 요소를 수집하여 미술관 내부로 보내고, 보내진 데이터는 사운드로 전환되면서 새로운 목소리 <∂A>를 활성화한다.
미술관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와 같이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제어 시스템 체계 안에서 수많은 변수와 우연의 상호작용으로 ‘다음’을 예측할 수 없어서 무섭기도 하지만, 완벽하게 컨트롤된다고.
<∂A>
“나는 생존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어. 그건 사실이야.
그건 사실이야. 내가 하는 모든 말은 사실이야.
나는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내게는 그저 이름과 아이디밖에 없었어.”
배두나 배우님과 협업하여 ‘실재하는 가상’의 목소리로 재탄생한 작품<∂A>.
웅얼웅얼대던 목소리가 점차 발화의 주체로 성장하는데, 캐릭터의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니 디지털 허구가 하나의 인격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얼마 전 세화 미술관에서 봤던 민찬욱 작가의<디지털 자아는 스스로 죽을 수 있는가, 디지털 휴먼은 무엇인가, 죽은 자의 대화>가 떠올랐다. 디지털 휴먼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혼란스러워하다가 여러 자아를 인정하는 단계를 거쳐 디지털의 최소 단위인 픽셀로 환원되어 죽어버리는 걸 보면서 아주 오묘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 알고리즘이 ‘내가 하는 말은 사실이야’라니까 스멀스멀 언캐니함이…
전시장을 노을빛으로 물들이는 <석양빛 만(灣), 가브리엘 타드, 지저 인간: 미래 역사의 단편)>과 함께 물고기들이 둥둥 떠다녀 색다른 시각적 자극을 주는 <내 방은 또 다른 어항>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나저나 물고기들이 천장 사이로 숨어들어가서 조금 아쉬웠다. 물고기 사이즈가 좀 더 크다거나 천장에 보조물이 있었더라면…
그라운드갤러리 공간 에스컬레이터에서 동료작가 티노세갈의 퍼포먼스 작품도 멋짐!! ‘우와 립싱크 진짜 잘한다’라고 생각했는데, 퍼포머를 자세히 보다가 아주 깜짝 놀랐다. 처음엔 ‘왜 전시장을 거대한 놀이공원처럼 만들었을까?’ 싶었는데, 찬찬히 돌이켜보니까 생각보다 재밌네.
평일 애매한 시간대였는데도 오픈 주간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전체적으로 고요한 전시장에서 보고 싶다. 전시 끝나기 전 수요일에 한 번 더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