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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Dec 28. 2023

조 블랙의 사랑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성숙해가는 사랑, 그리고 인생

"잘 들어라 난 저 녀석이 좋아 똑똑하고 유능하지. 하지만 너는 어떻냐는 거지. 둘 사이에 아무런 감흥도 떨림도 없지 않니. 네가 기쁨에 겨워 노래하고 춤췄으면 좋겠다. 인생은 사랑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단다. 늘 마음을 열어두거라." 


극 중 윌리엄(앤서니 홉킨스)이 딸 수잔(클레어 포라니)에게 건네는 사랑에 대한 진심 어린 조언은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사랑에 빠진듯한 간접 경험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브래드 피트와 클레어 포라니의 리즈 시절 미모는 생기가 넘치다 못해 화면을 뚫고 나올 듯하다. 특히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강렬하면서도 떨리는 눈빛과 사랑하는 이 앞에서 숨길 수 없이 거칠게 새어 나오는 호흡은 첫눈에 반해버린 연인의 터질듯한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영화의 내용과 캐릭터 간의 관계성도 너무 좋았지만 이 영화의 백미는 누가 뭐래도 두 주인공이 서로를 바라보며 표현해 내는 애틋함이다.


인간 세상이 낯선, 사랑에 빠진 저승사자라는 소재는 소재 자체로 많은 것을 암시한다. 조 블랙(브래드 피트)은 저승사자다. 인간의 삶이 궁금하여 잠시 인간의 몸을 빌려 인간계에 현현한다. 땅콩버터에도 맥을 못 차리는 저승사자는 앞으로 자신이 떤 성장통을 겪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소년처럼 보인다. 어둡고 무한하기만 한 이승과 저승의 안내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삶(?)을 살다가 잠시 인간의 몸에 빙의되어 난생처음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함께 있어주길 바라는 상대방의 갈망에 따듯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임을 깨닫는다. 마치 사춘기 소년이 첫사랑에 빠지듯 조 블랙(브래드 피트)은  휘몰아치는 첫사랑의 열병에 본분을 망각할 지경에 이른다. 윌리엄(앤서니 홉킨스)의 생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접근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딸과 사랑에 빠져버린 탓에 조 블랙(브래드 피트)은 이승에 더 머무르고 싶다는 미련과 집착이 생긴다.


"사랑은 열정이고 집착이야", 영화는 사랑과 인생 그리고 성숙에 대해 말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대사가 농담 없이 진지하게 잘 짜여 들어맞아가며 대사 하나하나에서 의미 있는 성찰을 이끌어 낼 수 있을 만큼 영화는 시종일관 진지하게 사랑과 인생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특히 윌리엄(앤서니 홉킨스)의 입을 통해 주제의식이 드러나는 장면이 많은데 영화 초반 윌리엄이 딸에게 진정한 사랑을 하라며 건네는 조언에는 사랑의 본질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을 충실히 따르며 인간사를 경험하려는 조 블랙은 윌리엄의 말처럼 열정과 집착이 넘치는 사랑을 경험한다. 첫사랑의 열병에 눈이 멀어버리는 인간과 다름없이 저승사자인 조 블랙은 수잔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아직 명이 다하지 않은 수잔을 윌리엄과 함께 저승으로 데려가려는 무모한 생각을 품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올바르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을 윌리엄과의 대화를 통해 결국 깨닫게 된다.


가끔 영화를 보며 혼이 쏙 빠져나갈 정도의 아름다움을 느낄 때가 있다. 영화마다 그런 아름다움을 느끼게 만드는 요소는 다르다. 조 블랙의 사랑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의 근원은 대화와 수용의 멋스러움 때문이었다.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올곧게 펼치는 모습,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모습, 경청을 통해 달라진 자신의 생각을 인정하는 모습,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는 모습, 잘못을 고백하는 이를 너그럽게 용서하는 모습, 자기 속마음을 기꺼이 드러내는 모습, 그런 모습에 기꺼이 기뻐하는 모습. 인간관계에서 이상적이라 생각되는 모든 대화장면이 화면에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을 보고 어찌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그야말로 성숙과 절제의 멋 부림이 아닐 수 없다. 어른의 대화 그 자체인 인물들 간의 소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남모르는 비경을 발견한 듯 기뻐 마음이 자꾸만 들뜨게 된다.


여긴 외롭지 않아... 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저승사자도 외로움을 느껴왔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을 테다. 조 블랙은 그간 아무런 의심 없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이 맡은 임무에 충실해왔다. 우연한 호기심을 계기로 사랑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그를 새로운 인식의 장으로 이끌었을 뿐이다. 한 번도 외롭다고 생각해 본 적 없던 조 블랙은 그간 자신의 삶이 외로웠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와 동시에 사랑한다고 해도 모든 것을 마음 가는 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된다. 그렇게 영화는 삶과 죽음을 사이에 두고 사랑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묵직하고도 찬란하게 꽃 피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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