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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Jul 21. 2024

<서평> 각각의 계절

"어떻게든"이라는 필연 또는 숙명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114p 하늘 높이 아름답게


작가는 어느 한 시절에 대한 기억에 강렬하게 함몰된 개인의 서사를 들추어낸다. 그리고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인 듯 보이는 그 서사 안에서 보편성을 끄집어내며 독자에게 위로를 건넨다. 어느 한 시절, 각자의 계절을 각각 보낼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위로가 되는 책이다.


<사슴벌레식 문답>

그 친구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조심스러운 말투로, 요즘 경애가 무슨 법사의 사상에 경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중략 그 법사가 누구인지 그 포럼이 어떤 포럼인지 자세히는 몰랐지만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10p


누가 봐도 경애는 남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을 애였지만, 그래서 나는 혹시라도 경애가 나쁜 짓을 하게 되면 절대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것도 알았던 것 같다. 14p


사슴벌레식 문답 초반, 화자 준희의 나레이션은 경애를 통해 어떤 사건이 벌어지겠다는 것 알린다. 부영은 리더다. 20대 초반 무리의 리더들이 그렇듯 강한 확신을 가진 듯 밀어붙이는 모습에 친구들은 든든함 혹은 호탕함을 느끼지만 사실 그 나이 또래의 리더십은 내면의 깊이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정원과 경애가 십 년은 앞선 세월을 살아가는 듯 보인다. 미래의 상이 그려지지 않더라도 그저 과정이 좋아 교사를 그만두고 예술대학원에 진학하려는 정원, 주변과 모든 관계를 끊고 살고 싶다며 회사를 때려치운 경애. 어쩌면 그 둘은 조금 더 일찍 어떻게'든' 벌어질 자신의 미래를 인식하고 담담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슴벌레식 문답에 대한 인식 변화가 인상적이다. '든'이라는 표현의 함축성. 어떻게 벌레가 들어와?라고 물으면 어떻게든 들어와~라는 의하고도 만능열쇠의 역할을 하는 방어멘트서의 효율성에 감탄하던 준희는 그것이 어떻게든 들어와!  쐐기 같은 강요와 강제 수용을 권하는 언어 인식을 전환시키며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것은 기어코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과 체념의 표현일지도 모르겠다는 데까지 의미를 확장한다. '든'이라는 표현 하나를 이렇게 다양하게 해석하며 한 권의 책을 관통하는  소재로 활용한다는 점이 대단하다. 표현에 있어서도 감탄했던 부분이 많다. "입술로는 경애를 용서하라며 이로는 경애를 물어뜯는 내가", 기가 막힌 표현이다. 이와 입술 하면 순망치한 밖에 떠올릴 줄 몰랐던 빈약한 상상력에 고개를 떨군다. 소재를 참 잘 쓰는구나, 이것이 실로 작가로구나.


기어코 쪼개 우정.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변절하고, 한 명은 귀농하고, 딱 한 번 있었던 40년 전 네 친구의 우정 여행은 준희에게 그들의 관계성에 대해 어떤 기억을 남긴 것일까. 그들은 서로를 어떻게 기억할까. 최근 20년 세월을 함께 보낸 고등학교 동창 모임이 깨진 터라 더욱 공감하며 읽었다. 그렇게 될 일은 어떻게든 그렇게 될 일이었을까. 어떻게든 깨질 관계였어~라며 당연한 일인 듯 의연하게 받아들일 일인지, 아 어떻게든 깨질 관계였어! 라며 화를 내야 하는지, 어떻게든 그렇게 깨질 관계였겠구나.. 하며 체념해야 하는 것인지 나는 아직 나의 계절이 혼란스럽다.


<실버들 천만사>

채운, 도망 나간 마 반희 이야기. 사슴벌레식 문답에서는 두진이 누구인지 궁금했고 실버들 천만사에서는 명운과 병석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작가는 작품 초반에 이름을 등장시키며 독자의 궁금증을 자아내고 뒤로 가며 그 궁금증을 해소시킨다. 최근 들었던 글쓰기 수업에서 어떤 문장이나 인물을 등장시켰으면 반드시 활용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인물을 사용하는 방식이 수업 내용과 겹쳐서 깨달음이 일었다. 그에 보태 글을 쓸 때 자꾸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가르침이 있었는데 소설을 읽으며 실전 사례를 본 듯하여 공부가 됐다. 예를 들면 실버들 천만사 49p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엄마는 이 상황이 웃긴다. 이렇게 말하고 반희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깨물었다. 뱉어놓은 말을 얼른 치우려고, 그래 나는 이 상황이 웃긴다.라고 정정해 말했다."


이 문장을 통해 반희와 채운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반희가 이혼을 했고 채운과 떨어져 살았다는 말은 저 문장이 나오기 전까지 어디에도 나오지 않지만 "엄마"라고 스스로를 명명했다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고 자신이 뱉은 말을 지워내기 위해 다시 "나"로 수정해서 발화한다는 반희의 행동을 통해 그 둘의 관계를 독자가 유추하게 만드는 점이 훌륭한 교재의 역할을 했다.


실버들은 읽는 내내 애틋했다.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는 모습, 조심스러운 모습이 읽혔다. 반희가 채운과 통화 상처 준 것은 없는지 확인기 위해 자신의 말을 복기하는 모습, 함께 떠난 여행길 휴게소에서 반희가 화장실 가서 한참 나오지 않자 허둥지둥 엄마를 찾아 헤매는 채운의 모습, 펜션에 도착해 차곡히 싸 온 나물들을 보며 손뼉을 치며 기뻐하는 채운과 그런 채운에게 반찬 이름을 가르쳐 주는 것이 어린 시절 채운에게 말을 가르칠 때와 오버랩되는 장면 등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애틋한지 독자에게 전달한다.


채운은 반희가 우리 체육관이라고 말한 게 생각났다. 벌써 그렇게 됐나. 비정규직인 반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년 미만의 주기로 일자리를 옮겨야 했는데, 옮긴 직후에는 '내가 요즘 일하는'이라고 말하다 어느 시점이 되면 자연스럽게 '우리'라는 말을 붙였고 '우리'라고 말한 지 얼마 안 되어 다른 직장으로 옮겨야 했다. 57p


얼마나 면밀하고 세심하게 주변을 관찰해야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것일까. 그 어떤 비정규직의 설움을 표현하고 설명한 문장들보다 비정규직의 마음을 읽도록 강제하는 힘이 있다.


큰일 났어! 여기 수건이 없어.

내가 가져왔지. 반희가 수건을 네 장 꺼냈다. 너 두 장, 나 두 장 하자. 하나는 세수수건 하나는 발수건 해.

발수건은 같이 쓰지.

채운의 말에 반희는 체육관의 축축한 깔개를 떠올리고 기겁을 했다.

안 돼. 따로 써.

알았어 까탈스럽기는. 61p


실버들 천만사 첫 페이지는 채운과 통화하며 발톱을 들여다보는 반희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발톱 끝이 탁한 우윳빛을 띄고 있었고 무좀 초기 증상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반희가 일하고 있는 체육관이 무좀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에피소드도 슬쩍 나온다. 발수건을 따로 쓰자는 반희의 말은 까탈스러워서가 아니라 채운을 아끼는 마음의 발현이다. 허나 채운은 그런 반희의 서사와 마음을 알 턱이 없다. 이렇게 우리는 누군가의 배려를 까탈스러움으로 치환시켜 버린다. 이는 너무나 흔하게 일어나는 인간사의 진실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오해와 왜곡된 인식으로 인연을 일그러뜨리며 살아가는 것일까.


<무구>


무구라는 단어에 어떤 것들을 연결시킨 것인가. 제목이 상당히 상징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 무구를 입이 없다는 뜻으로 멋대로 해석했다. 그래서 무언가 죄를 지어놓고 입을 열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 인가 하고 상상했으나 무구의 전혀 다른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때 묻지 않고 맑고 깨끗하다는 뜻의 무구라는 단어로 작가는 어떤 것들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무구=나이 듦=안정, 무구하지 않음=젊음=불안이라는 공식을 정립해 본다.


무구한 땅인 줄 알았으나 사람들의 손을 타 무구하지 않은 땅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때의 소미는 무구하지 않은 마흔 중반이었다. 그때의 소미와 현수는 생애 가장 젊은 시절을 살고 있었고 그래서 여전히 이십 대처럼 불안해했다. 이십 대 초반 대학생 시절의 불안은 마흔다섯에도 여전히 상으로  불안을 야기시킨다. 젊음은 불안이다. 일상의 틀만 깨지 않는다면 나머지 시간에 각자 무얼 하든 용납되는 시기를 살고 있는  살의 소미는 이제야 무구하다. 그 어떤 금기도 깰 수 없을 만큼 기력도 의지도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는 외로웠고 앞으로 자신이 더 외로워질 것을 알았다. 그야말로 완전무구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 그런 그녀에게 현수는 그리움과 불안과 원망을 품고 있는 젊음을 떠올리게 하는 대상이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부동산 사기 활극이 아니라 불안하고 원망스럽지만 그럼에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젊음에 대한 찬가가 아닐까.


<깜빡이>,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 오익 오숙, 이름만 따와서 합치면 익숙, 익숙한 이야기라는 뜻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혼자 멋대로 작가의 마음을 상상해 본다. 오숙을 보고 막내 이모가 떠올랐다. 끝없는 전화, 신세 한탄, 비난, 험한 말. 모계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정신착란의 유전, 어머니도 반쯤 미쳐있는 듯 보이고 아들도 서서히 환청이 들리기 시작한다. 반복적이며 모호한 어머니의 이중 메시지는 자신의 신세한탄을 가장하여 오익에게 끝없이 책임을 묻고 의무를 지운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며 현생에서 끊임없이 원채를 쌓아가는 중인지 모른다.


단편들은 모두 가족 또는 내 인생의 과거 어느 시점과 대화한다. 어쩌면 소설이란 결국 나를 둘러싼 가장 가깝고 내밀한 존재들과의 대화를 통해 삶을 통찰하고 그려내려는 노력,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원회귀와 아모르파티(운명을 받아들여!). 무한히 돌고 도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의 종착지는 허무가 아니라 활력이어야 한다. 어차피 죽을 거 열심히 살아서 뭐해가 아니라 어차피 죽을 거 열심히 살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아모르파티가 가능해질 때 그 끝이 죽음 혹은 그에 필적하는 어떤 불행한 결과일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굴욕을 줄 수 없 되고 죽음에 매겨지는 값이 달라지게 된다는 책 후반부 문화평론가의 해설은 두터운 신뢰를 는다. 10년 전 힐링캠프에서 이경규가 법륜스님께 "인간은 왜 태어겁니까?"라고 묻자 법륜스님은 "질문이 잘못되었다. 이유가 있어서 태어난 게 아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이유가 생긴 "라 답한다. 이는 말장난이 아니라 아모르파티 실현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작가들은 아모르파티를 향해 자기 삶을 끝없이 들여다보며 다시 쓰기를 진행하는 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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