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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죽이고 싶은 아이 2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왔고, 살아간다.

by 정 호

스포가 있습니다.




증인이 나타났대

우리 삼촌도 경찰이라 주워들은 게 있을 것 아니야

유튜브에 올라온 것 안 봤어? 유죄판결 났잖아

아 몰라 몰라 사실 여부를 왜 따지는데 사사건건 따질 거면 가

왜 말하는데 트집을 잡고 난리야 트집을?


죽이고 싶은 아이 1편에서는 누가 범인인지 진실을 밝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2편에서는 범인이 밝혀진 이후 주연, 주연의 부모, 서은의 부모가 어떻게 상처를 회복해 나가는지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2권의 1장에서는 대중이라는 유형이자 동시에 무형인 존재의 특징에 관해 묘사한다. 대중은 깊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정황이 어땠는지, 그것이 정말 사실인지 디테일을 따지지 않는다. 그저 단편적으로 나열된 몇 가지 단어로 복잡한 상황을 쉽게 도식화시켜 이해하려 한다. 1장에서는 그런 대중의 형상과 특성이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진다. 2장에서 신지훈 형사를 통해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신지훈 형사는 목격자가 재판이 끝난 뒤 웃으며 나간 점, 지주연이 끝까지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우긴 점, 목격자가 증언을 하며 지주연을 뚫어져라 쳐다봤던 점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통상적인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의아함을 품었고 경찰이 판단을 잘못한 것이면 어쩌나 하는 막중한 책임감에 짓눌린다. 3장에서 사고현장 근처에 사는 주민의 홈캠에서 벽돌이 추락하는 순간이 찍힌 영상이 발견된다. 4장에서는 그 영상을 복원해 목격자가 범인이었음을 증명해 낸다. 꾸준히 괴롭혔지만 범인은 아니었던 주연, 모범생이었으나 한순간의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목격자. 누가 나쁜 사람인가. 하지만 대중은 서서히 이 사건이 지겨워진다. 진실에 관한 관심은 점차 사그라들었고 대중에게는 오늘 먹을 점심식사가 더 중요한 관심사일 뿐이다. 5장에서는 이미 주연이 범인이 아님으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학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의 학업에 방해가 될까 걱정돼 주연의 복학을 막기 위한 시위를 준비한다.


하나의 사건에 관한 의도와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들어왔다. 이사를 도와주러 왔다가 노트북을 떨어뜨려 부서뜨린 친구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앞을 안 보고 차도에서 폐지를 가득 담은 리어카를 밀고 있는 할머니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들은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의도가 없었다면 나쁜 결과를 불러일으켜도, 나쁜 결과가 예상되는 행동을 하더라도 악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나 아돌프 아이히만 같은 사례는 의도와 의지의 중요성에 대해 경각심을 울린다.


죽이고 싶은 아이는 선과 악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선악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선과 악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정의를 내려보아야 한다. 의도가 선하고 결과까지 선하면 그것은 고민할 필요가 없는 "절대 선"이 될 것이고 의도가 악하고 결과까지 악한 것은 너무도 확실한 "절대 악"이기에 이것이 선인지 악인지 우리가 고민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우리를 고민에 빠뜨리는 것은 의도가 선하지만 결과가 안 좋거나, 나쁜 의도로 행했지만 결과는 좋을 때이다. 이처럼 의도와 결과가 다른 방향을 추동할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선한 행위가 되려면 적어도 의도가 좋아야 한다. 결과가 좋다 한들 나쁜 의도로 시작된 행위에 박수를 보내기는 어려운 탓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무지는 그래서 악에 가까워진다. 본인은 악한 의도가 없었지만 그 결과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식당, 영화관, 공연장에서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는 것이 왜 안 되는 일인지, 앞 좌석에 사람이 없다고 발을 올리는 행위는 왜 나쁜 행위인지, 약속시간을 안 지키는 것이 왜 안 되는 일인지, 무단횡단이 왜 나쁜 일인지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소위 진상으로 불리는 행태는 무지 혹은 뻔뻔함이 그 바탕이 되며 그것은 반드시 남에게 피해를 끼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악행이 된다. 그래서 법률을 집행할 때는 가해자로 하여금 몰랐다는 말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주연은 친구를 휘두르고 싶다. 서은은 친구에게 맞춰주고 싶다. 하지만 속으로는 주연을 이용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다. 우리는 모두 주연이었으며 동시에 서은이기도 하다. 주변인을 내 뜻대로 휘두르고 싶었던 기억, 무리에 섞이고 싶어 싫지만 참고 휘둘림에 기꺼이 응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주연과 서은 양쪽 모두 공감이 된다. 주연과 서은보다 더 깊은 공감이 된 인물은 주연의 부모와 서은의 부모다. 나이를 먹고 아이를 키워보니 아이를 잘 길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온 주연의 부모 마음과 가난 때문에 자식에게 미안해 할 수밖에 없는 서은의 부모 마음이 가슴 시리게 내 안에 스민다.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가. 좋고 나쁘다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며 구분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그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우리는 과거에 주연과 서은이었으며 현재는 주연과 서은의 부모로서 살아가고 있는 탓이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다. 때로는 선하고 때로는 악하다. 무지에 대해서는 더 무슨 할 말이 있으랴.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겸손해진다. 나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타인에 대한 증오를 멈출 수 있게 된다. 나도 못났는데 누구를 탓할 것인가.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인간의 아름다운 측면을 바라보려 노력해야 한다. 어차피 모두 부족한 인간일 뿐이니 나와 남의 좋은 면을 찾으려 애써봐야 한다. 그렇게라도 애쓰지 않으면 나와 남의 못난 모습만 바라보며 인간에 대한 회의감에 잠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그런 사람이 되어 그저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을 예견할 수 있는 명백한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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