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 호 Jul 31. 2020

눈 앞이 캄캄해진다는 말

잠시 흐리지만 곧 맑음

폭우가 쏟아졌다.


 단순히 비가 온다는 말로는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양의 물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왔다. 바가지로 물을 퍼붓는다는 표현이 어울릴까? 정말로 하늘에서는 물을 퍼붓기라도 하는 듯이 많은 양의 물이 쏟아졌다.


 이 정도로 비가 쏟아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많은 인명, 재산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피해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지 않은 경우, 재난은 그 자체로 풍경이 되어 감상의 대상으로 다가오기도 하겠지만 피해를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 재난이라는 단어는 때때로 현실의 몸을 짓누르는 것과 같은 무게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영화 기생충을 보면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이 비가 오는 날 겪게 되는 어려움이 나타난다. 수압으로 인해 역류하는 변기 물과 흙탕물이 집으로 흘러들어오는 모습으로 대표되는, 습기 가득하고 눅눅한 수해 피해의 현장. 이런 비슷한 상황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폭우라는 단어는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 저편 어딘가의 끔찍한 현장을 되살려내는 트리거가 될지도 모른다.


 이사를 많이 다녔다. 반지하에서 살아본 적은 없지만 옥탑방에서 살아본 적이 있다. 그 집은 여느 달동네의 옥탑방들이 그러하듯 경사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경사진 비탈길은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비를 피할 방법이 없다. 길을 따라 흘러내려오는 물살을 거스르며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운동화와 양말, 바지 밑단이 젖는 것은 예삿일이 되고 만다. 무릎 아래에서 내 몸을 감싸고 있는 무거워진 옷가지들은, 마치 벗어날 수 없이 나를 죄어오는 가난의 족쇄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렵사리 집에 도착해서 마주하게 되는 물에 흠뻑 젖어버린 양말과 운동화는 꿉꿉해진 나의 기분처럼 여러 날이 지나고 나서야 어렵사리 본래의 상태로 돌아오곤 했다. 


 쏟아져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으면 잠시 동안 이런저런 옛 생각이 난다. 아니 기억이 떠오른다기보다는 감정이 솟아오르는 날이 많다. 어떤 특별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날들도 물론 있지만 특정한 장면 없이 감정만이 샘솟는 날이 더 많은데 그때의 감정은 주로 무거운 느낌일 때가 많다. 생각과 함께 떠오르는 감정이 아니기에 그 감정의 근거를 찾아내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반복적으로 쌓여왔던 어떤 캄캄한 시간들로 인해 솟아나는 결과일 거라 지레짐작해본다.

 

 역대급 비가 쏟아졌다. 이렇게 많은 비가 오는 것은 십여 년 전 대학 시절 학교 근처의 하천이 넘치기 직전까지 불어났던 것을 본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이런 날 운전을 하는 것은 고역이다. 앞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속도를 줄이고 비상등을 켠 채로 서행하게 되는 자동차의 행렬이 이런 날 운전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이렇게 조심조심 운전을 하고 있는 순간 옆을 지나가던 차가 물 웅덩이라도 지나치게 되면, 그 물이 내 차의 앞유리로 튀어올라 한 순간 전방의 시야가 완벽하게 흐려진다. 이런 순간이면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면서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글자 그대로 완벽하게 앞이 보이지 않는 경험을 했던 적이 또 한 번 있다. 라식 수술을 했을 때인데, 라식수술은 각막을 살짝 벗겨낸 다음 레이저로 동공 어딘가를 평평하게 깎아낸 후 벗겨낸 각막을 다시 덮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수술실에 누워 각막을 벗겨내는 순간, 그 짧은 한 순간 동안 분명히 눈을 뜨고 있었는데 눈을 감은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지는 경험을 했다. 말 그대로 암전, 시력을 잃는다는 것을 짧은 순간이나마 경험했던 것이다.


 이처럼 실질적으로 눈 앞이 보이지 않게 되거나 어떤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눈 앞이 캄캄해진다는 표현을 쓴다. 군대를 필두로 하여 몇몇 조직에서는 갓 들어온 후임을 놀리려고 주먹을 꽉 쥐게 한 다음 눈앞에 찰싹 붙인 뒤 앞에 뭐가 보이니?라는 질문을 하곤 한다. 그러면 후임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답하고 선임들은 "그게 너의 미래야"라는 농담을 던지며 웃곤 한다.


 이처럼 눈 앞이 캄캄하다는 말은 군대에 막 입대한 신병이 느끼는 막연한 두려움처럼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결코 끝나지 않고 그 실마리가 손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는 것만 같은 아득함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시련이 그러하듯 눈앞이 캄캄했던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밝아지리라 믿으며 살고 싶다. 시련이 닥치는 순간에는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 기다림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나를 성숙하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으려는 의지가, 그 시간을 견딜 수 있는 힘을 부여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여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이면, 다시 밝아지는 순간이 오리라 기대하며 한번 더 눈을 부릅뜨고자 애써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현관에 걸쇠를 거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