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을 때만 해도 이 질환은 지금처럼 주변에서 흔하게 듣던 질환은 아니었다. 스스로 공황장애인 것 같다는 판단이 서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병명조차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우스갯소리로 ‘비행기 타러 공항에 가는 게 두려워서 생긴 병을 공황장애라고 하나?’ 하는 웃지 못할 대화를 한 적도 있었다. 글자가 서로 다른 데도 그런 말을 한 것은, 당시 공황장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굉장히 낮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은 우리 주변에서도 공황장애에 대해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공황장애란 극도의 불안한 상태가 일으키는 발작 같은 상태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생소한 증상이나 질환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남들에게 말하기 힘든 고통을 혼자서 겪고 이겨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경험담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고통의 어둠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가서 닿을 수만 있다면 용기를 내어 한 번 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라고는 하지만 자각하지 못하는 전조 증상이 있다. 보통은 이런 전조 증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증상이 심해져서 나중에 진단을 받고 나서야 깨닫곤 한다. 성인이 되어서 나타나는 정신적인 문제가 어려운 점은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은 유년기의 아픔이나, 청소년기에 겪은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것인가’ 하는 의문은 근래의 생활에서는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수도 있다. 과거의 특정한 경험은 평온한 상태에서는 숨죽여 있다가, 지속적인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게 되거나 신체적으로 약한 상황에 놓였을 때 방아쇠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과거의 트라우마가 없다고 해서 공황장애가 발생할 확률에서 자유롭지만은 않다.
나의 경우는, 그런 확률이 꽤 높은 범주에 속해 있었다. 타고난 기질도 분명 있었다. 엄마는 걱정이 많은 분이었다. 늘 자식 걱정에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미리 걱정하여 밖에 나간 자식이 집에 잘 돌아올 때까지 마음을 놓지 못할 때가 많았다. 뉴스에서 흉흉한 기사가 나오면 어김없이 우리들 모두에게 전화로 안부를 확인하곤 했다. 일단 나는 그런 엄마의 기질을 많이 닮아 있었다. 엄마가 아파서 앓아누운 날은 엄마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되어 엄마가 자는 내내 옆에서 코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숨을 쉬는지 확인하곤 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면 나에겐 엄마를 걱정하는 세심한 막내라는 칭찬이 돌아오곤 했다.
한참 불안정 하던 사춘기 시절, 갓 이십 대가 된 언니가 가슴 아픈 일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으로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언니의 갑작스러운 부재에 대한 슬픔보다는 딸을 먼저 보낸 엄마의 슬픔을 지켜보는 것이 더 힘들었다. 종종 속절없이 앓아누우셨는데, 그때마다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어디론 가 도망치고 싶은 심정으로 지내곤 했다. 어려운 상황을 극도로 회피하고 싶어 하는 나의 심리적 방어 기전은 그때의 상황으로 더욱 견고 해졌을 것이다.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우리 가족들은 각자의 아픔을 간직한 채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는 얼굴로 그럭저럭 잘 살아갔다. 하나의 가면을 더 가지게 된 셈이다. 성인이 되었을 때, 만나던 사람과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그 사람과의 이별에 대해서 크게 마음을 쓸 만큼 애틋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헤어짐을 확고하게 다짐한 날 나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불안한 마음을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를 많이 사랑하는 것이 아님은 확실했는데, 그 사람과 헤어지고 나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밑도 끝도 없는 막무가내 불안이 몰려왔다.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 마치 아빠와 헤어져야 하는 것과 같은, 가족을 잃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설명하는 게 최선이었다. 딱히 해결책이 없는 불안이었지만, 병원을 찾아가 힘든 이야기를 했다는 것 만으로 어느 정도 불안을 억누르며 관계를 정리할 수 있었다. 이미 한번 가족을 잃어본 경험이 있었던 나에게 어쩌면 높은 확률로 발생한 불안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사람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살면서 부딪치고 경험하는 많은 것에서 오는 스트레스나 고통이나 괴로움이 있다. 결혼을 하고 얼마간 지나서 집에서 가까운 거리의 직장에 다니게 되었다. 임신을 한지 몇 달쯤 지나서 사무실이 집과 많이 떨어진 도시로 이전을 했다. 2호선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한번 갈아타고, 또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먼 길이었다. 지금도 그렇듯 출퇴근 길의 지하철은 그야말로 지옥철이었다. 특히 2호선 출근길은 내 의지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며 지나가야 하는 길이었다. 배가 불러오면서는 뱃속에 있는 아기를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어느 7월 무더운 여름날, 그것은 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시작이 되었다. 갑작스럽게 숨이 가빠지면서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랫배는 경련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내 몸을 쥐어짰다. 식은땀이 흐르고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뱃속의 아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 까봐, 또 내가 죽을 것 같아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어딘 지도 모르는 곳에서 내려 화장실로 달려가며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죽을 것 같아”
이 한마디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일을 하다 말고 급하게 온 남편의 얼굴을 보고 거짓말처럼 증상이 사라져 갔다. 남편은 어리둥절해했다. 내가 괜찮다니 다행이었지만, 바쁜 프로젝트 마감을 뒤로하고 뛰어나온 남편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나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나도 이게 무슨 일인가 했다. 당장 어떻게 될 것만 같았는데 남편이 오는 순간 아무렇지도 않다니. 그 후로는 출 퇴근길이 점점 힘들어졌다. 임신 8개월이 다 되어가는 데에다 지하철만 타면 나타나는 증상 때문에 제대로 된 생활을 하기 힘들었다. 꼭 끝마쳐야 되는 일이 있어서 겨우 버티다가 9월이 되기 전에 일을 그만두었다. 육아 휴직이 아닌 퇴직이었다. 이런 증상은 더운 여름엔 점점 더 심하게 나타났는데, 그나마 시원한 계절에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나의 증상은 집 안에서 든 집 밖에서 든 시시때때로 찾아왔고, 빈도도 더욱 잦아졌으며 강도는 더 심해져만 갔다. 엄마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아이는 자랐고 더 이상 이런 모습으로 아이를 보살피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서 병원 치료를 받을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병원에 가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 먼저 나의 증상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먼저 파악하고 싶었다. 인터넷으로 나에게 나타나는 증상들을 검색해 보았는데 공황장애라는 생소한 단어가 자꾸만 눈에 띄었다. 이건 신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그때는 이런 병도 있나 싶을 정도로 그 증상에 대해서 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공황장애가 생기는 원인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어렸을 때 부모를 잃었거나, 부모가 이혼을 했다거나, 가족을 잃은 경험이 있을 경우 나타날 확률이 높다고 했다. 평소 건강에 대한 지나친 염려나 그에 강박 증상이 있는 경우도 그러했다. 그런 경험을 성인이 되기 전에 겪었을 경우 더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가 신경에 쓰였다.
우리 가족에게 언니의 사건이 있을 당시, 나와 두 살 터울의 언니는 둘 다 사춘기를 겪고 있을 청소년기였다. 많은 고민 끝에 언니에게 연락을 해서 나의 증상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그랬더니 언니는 얼마 전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어지럽다가 정신을 잃어서 응급실에 몇 번 실려갔고, 다른 이상은 없었다고 한다. 검사를 진행한 병원 의사가 신경정신과를 한번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다녀온 모양이었다. 나는 슬픈 예감이 왔다. 언니에게도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애써 아닐 것이라고 괜찮아질 것이라고 참고 또 참았는데, 언니도 나도 참으로 세상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