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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라 Jan 01. 2025

불안에 대한 단상(斷想) 2

우리 엄마 아빠의 세대에 속한 사람들은 정신적인 문제가 생긴 사람들을 속된 말로 표현하며 혀를 쯧쯧 차곤 했다. 치유될 수 없는 고약한 고질병에 걸려서 평생 약을 먹으며 살아도 나아지지 않는 병으로 치부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 자식이 있는 부모는 그 사실을 숨기며 살아야 했다. 내 자식이 남에게 손가락질받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한동안 가족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엄마가 받을 정신적인 충격이 걱정이 되었다, 그것도 언니와 나 둘 모두 그렇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더욱 시름에 잠기실 것을 알기에.


처음엔 남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도 했고, 약을 평생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쉽사리 병원을 가지 못했다. 내 의지로 이겨보려고 여러 가지 정보를 모아서 실행해 보기도 했었다. 종교에 의지하기도 했고, 운동으로 이겨내 보려고 애썼다. 불안이 나를 엄습해 오면 어떻게든 억눌러 보려고 찬송가를 부르며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모습이 아이에겐 어떻게 비쳤을까? 아이가 들을까 봐 화장실에서 입을 틀어막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이건 나에게 내려진 형벌 같았다.


도저히 더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음을 깨닫고 병원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나를 처음 대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그동안 힘들어서 어떻게 지냈느냐고, 얼마나 힘들었겠냐고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동안 혼자의 힘으로 버텨왔던 내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모든 것을 인정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환자였고 이것은 병이었다. 이게 무슨 신의 장난인지 원망하며 수년 동안을 혼자서 불안에 떨면서 지내다가 이제야 내 증상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 것이다. 증상이 나타났을 때 빨리 치료를 받았으면 치료가 좀 더 수월하고 치료기간도 짧아졌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나의 상태를 거의 포기한 상태였기에 “나는 완치될 수 없는 거죠?”라고 힘없이 물었다. 인터넷의 수많은 정보에도 완치되는 병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이다. 


“자, 이렇게 해요. 이제부터 내가 하라는 대로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나를 믿고 처방된 약을 잘 먹는 거예요. 약을 먹다가 힘들면 언제든 찾아와요. 아침에 약을 먹었는데 그래도 너무 힘들다 하면 바로 와요. 참지 마요. 나에게 약이 맞을 때까지 우리는 오랫동안 시간을 갖고 관찰하고 조절할 거예요. 괜찮아요. 좋아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제가 그렇게 만들어 드릴 거예요. 나를 믿으세요,”


나는 그 어떤 종교보다도 의사 선생님의 말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토록 살아오면서 말 잘 듣는 사람이 된 건 처음이었다. 선생님 말대로 나는 오전에 갔다가 견디지 못하고 오후에도 가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내가 유독 지쳐가고 있음을 느낀 날 선생님은 조용히 음악을 틀어 주곤 했다. 온종일 환자들에 치이다가 집에 돌아가면 이 음악을 듣고 쉰다고 하면서 함께 듣자며, 비 오는 저녁 불 꺼진 진료실에서 선생님이 틀어준 음악을 하염없이 듣고 있었다. 그리고 포스트잇에 책 제목과 저자 이름을 적어 주고 한번 읽어보라고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삶은 고해(苦海)다. 이것은 위대한 진리이다.”로 시작하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라는 책은 절박했던 그 시절의 나에게 등불처럼 길을 안내해 줬다. 그 후로도 몇 권의 책과, 음악을 더 권해 줬는데 내 마음의 상자 안에 깊이 넣어두고 힘들 때 꺼내어 보고 듣곤 했다. 


또한 나에게는 불안이 밀려올 때 언제든 전화를 걸면 받아 줄 사람이 있었다. 공황이 시작된 후 나는 남편에게 내가 거는 전화는 되도록 꼭 받아달라고 부탁을 했고, 회의나 정말 바쁜 일이 아니면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갑자기 또 공황이 와서 전화를 걸면 남편은 불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주변 상황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주위를 돌리게 해주곤 했다. 너무 불안하고 숨이 차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때, 그 목소리는 나를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줬다. 


그 후로 10년. 


아마도 그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약을 먹지 않고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나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들은 멀리하고 살았다. 이를테면 나는 비행기를 타지 못해서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는다. 대중교통도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혼자서 고향에 내려가지 못한다. 혼자서는 집에서 조금 먼 곳에 떨어진 새로운 장소를 잘 가지 않는다. 인천대교 같은 긴 다리나 긴 터널을 피해 다닌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지만 나에겐 아직도 어려운 것들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그때처럼 세상을 원망하거나 나 자신을 탓하진 않는다. 내가 불안을 컨트롤하며 지낼 수 있는 것에 만족한다. 완치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언제고 내 상태나 환경에 따라서 불안은 또 올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거의 모든 질환의 메커니즘이니까.


아이가 어렸을 때 의사 선생님께 나의 상태에 대해 아이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어린 나이에 불안이 학습화될 여지를 결코 주고 싶지 않았다. 아빠와 둘이 일본 여행을 가던 날 엄마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무척 서운해하던 딸에게 참 많이 미안했다. 


그렇다면 지금 스무 살이 된 딸이라면 어떨까? 요즘은 워낙 방송매체에서도 공황장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다뤄지고 있기도 했고, 엄마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을 때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 아이들은 스트레스 상황에 더 많이 노출이 되어있고 우울증이니 ADHD증후군이니 많은 신경정신과적인 문제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힘들었겠다며 나를 안아주고 위로해 줬다. 언젠가 꼭 비행기를 타고 가장 가까운 제주도나 일본 여행을 함께 가자고 한다. 엄마는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준다.


이런 질환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될 것이다. 내과나 외과적인 문제들처럼 명확한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서 지켜봐야 하는 사람들이 애를 먹곤 한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을 것처럼 힘들어하다가 돌연 좋아지기도 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행동들을 하기도 한다. 아마도 겪어본 적 없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울증이 심한 사람에게, 운동이 우울증에 좋다고 하니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보라고 하면 대개 우울증 환자들은 더 우울해지기도 한다. 산책하러 나가는 것조차도 되지 않아서 힘들다는 것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가 오래가면 아픈 사람이나 지켜보는 사람이나 서로 힘들어지고 지쳐가게 될 수 있다. 이런 가족이나 지인들이 어떻게 그들을 대하면 좋은지에 대한 많은 관련 자료나 정보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요즘엔 이런 아픈 경험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채널이 다양해졌다. 그런 경험이나 조언들을 접한다면 서로가 조금 더 이해하면서 힘든 길을 헤쳐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런 정신적인 문제들은, 언제든 누구에게든 갑작스럽게 시작될 수 있다. 꼭 공황장애가 아니더라도 우울증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란 말인가?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많고 경쟁이 심한 사회 분위기로 인해 가벼운 불안장애나 강박증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정신적인 문제가 발현이 되면 일단 자신의 상태를 체크해봐야 한다. 그것은 신호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몸이 지금 힘든 상태이니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그 신호를 무시하면 안 된다.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에게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요즘은 신경정신과의 문턱이 많이 낮아져서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다. 의지로 해결된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내 몸이 보내는 신호들이 있다면 우선 멈춰서 자신을 살펴보길 바란다. 특히 어린아이들에게서 보이는 신호는 어른들이 잘 관찰해서 빠르게 대처하는 게 최선이다. 그래서 나처럼 너무 힘든 길을 돌아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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