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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라 Nov 06. 2024

데미안 – ‘프란츠 크로머’ 이야기

딸과 함께 어디론가 향하는 중이었다. 차 안, 음악도 없는 침묵의 시간이 허전해서 잠시 신호 대기 시간을 틈타 유튜브 앱을 열었다. 무심히 화면을 넘기던 중 제목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 순간 파란 신호등이 켜졌다.


“딸. 거기 <데미안 100번 읽은 작가의 어쩌고> 하는 영상 보이지? 그거 정확한 제목이 뭐야?”

“<이것만 알면 다 읽은 겁니다 데미안 100번 읽은 작가의 데미안 해석 고명환 작가 2부> 라는데?”

“오 좋다. 그 어려운 데미안을 100번이나 읽은 사람의 해석 너무 궁금한데? 나 그거 틀어줘.”


개그맨 고명환 씨가 작가가 되었다는 것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인터넷 서점 같은 곳에서 책을 보았던 것 같다. 내 인생의 책 세 손가락 안에 들어있는 데미안을 이토록 깊이 있게 읽었다는 사실이 꽤나 놀랍고 반가웠다. 우리는 곧 목적지에 도착했고 차에서 내려야 해서 그의 해석을 많이 듣지 못한 게 아쉬웠다. 내 기억으로 나는 데미안을 세 번쯤 완독 했다. 10대에 한 번, 20대에 한 번, 30대에 한 번. 그러나 아직 40대가 되어서는 읽지 못한 지금, 다시 읽을 그때가 온 것 같았다. 고명환 작가가 데미안에서 중요하다고 말했던 그 문장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고, 나와 딸 모두 데미안의 결말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까닭에, 읽고 싶은 생각이 더 간절하게 들었다.


볼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서재로 향했다. 우리 집에 데미안 책은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었다. 두 권 다 들고 나왔다. 한 권을 집어 페이지를 넘기며 분위기를 대략 살펴보는데, 주인공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보고 “형”이라고 부르는 대목을 보고 깜짝 놀랐다. 데미안이 주인공에게 형이긴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문화적 배경이 짙은 ‘형’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데미안이, 순간 너무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들어서 다른 번역서를 선택해서 읽기 시작했다.


“오늘 무조건 완독 목표!”

딸에게 선포하고 읽어 내려갔다. 이런 선포는 사실 큰 의미 없는 행위이지만 내가 나에게 어떤 주문을 거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기도 한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니 저녁이 되어있었다. 여전히 나에겐 너무도 어려운 책. 그래서 독후감이나 책 리뷰 같은 걸 쓸 엄두도 못 내던 책. 여러 가지 의문들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책. 데미안의 존재, 데미안의 대사에 대해서 계속 곱씹게 되는 책. 이 책은 완독 하는 것 보다도 더 어려운 점이 많은 책이다. 다 읽고 나니 책 내용을 정리해서 보여달라고 요청하는 딸에게, “데미안 열 번 읽고 나면 그때 정리해서 보여 줄게.” 라며 정중히 거절하게 만드는, 나의 애증의 데미안이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전체 체험에서 이 순간이 중요하고도 지속적인 부분이다. 이것은 아버지의 거룩함에 드러난 최초의 균열이었고, 나의 어린 시절을 떠받치던, 그리고 누구나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되기 전에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 되는 기둥들에 나타난 최초의 금이었다.

<데미안 본문 중>


주인공 싱클레어는 열 살 무렵 선과 악의 두 세계를 인지하게 되는 것 같다. 아마도 좀 더 어렸을 때도 어렴풋이 느끼기는 했으리라 예상된다. 아버지가 구축해 놓은 견고한 선의 세계에 속해 있었던 주인공에게, 늘 자기 주변 가까이에 놓여있었던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세계로 직접 발을 들이게 되는 사건이 생긴다. 그 일로 인해, 철저히 악의 세계에 속해 있던 ‘프란츠 크로머’라는 상급생에게 싱클레어는 자신을 지배할 힘을 내주게 된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주인공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셈이다. 그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 세계의 최초의 균열이 생기고, 최초의 금이 생기게 되었다고 표현한다. 싱클레어가 자기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깨뜨려야만 할 알 껍질이 바로 그 선한 아버지의 세계인 것이다. 아버지의 세계가 선한 세계라는 것은 그 세계가 절대적으로 선한 세계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세계에는 평화가 있고, 안락함이 있고, 안정감을 주며, 어떠한 모습이든 용서받을 수 있는 구원의 세계로써 선한 세계이다. 힘들고 지치고 두려울 때 숨을 수 있는, 곧 어려움을 회피할 수 있는 곳이 되기도 한다. 그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로 들어설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책 앞부분에 잠깐 등장하는 프란츠 크로머라는 등장인물은 이 이야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해결되지 않는 의문점 중 가장 큰 하나가 바로 이 크로머에 대한 부분이다. 싱클레어가 얼떨결에 거짓으로 만들어낸 사과 도둑질에 대해서 크로머가 끈질기게 협박을 해온다. 처음엔 돈을 요구했지만 이 사악한 상급생은 결국 싱클레어의 누나까지 꾀어내길 요구한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두 세계 사이에서 사면초가에 빠진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 나타나 카인의 이야기를 한다. 동생 아벨을 때려죽인 성경 속의 인물 카인에 대해, 데미안은 주인공이 선한 세계에서 배웠던 방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데미안은 카인이 강한 존재였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카인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표식은 강한 카인이 원래 갖고 있었던 것이고, 비겁한 사람들은 이것을 신이 준 표식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비겁함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한다. 악의 구렁텅이에 빠진 싱클레어에게 이 얼마나 유혹적인 해석인가. 그 유혹에 이끌려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 크로머의 이름을 이야기하게 되고, 자신이 그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시인한다. 의미심장한 구절은 데미안이 말한 바로 이 부분이다.


“한 가지만 더 말할게.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까. 넌 그 녀석을 떨쳐버려야 해! 다른 방법이 전혀 통하지 않으면 녀석을 때려죽여버려! 그렇게 한다면 내게 깊은 인상을 줄 거고 나도 좋아할 거야. 나도 널 돕겠어.”

<데미안 본문 중>


크로머에 대한 비밀을 나누고 헤어지기 전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건넨 말이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카인이 아벨에게 했던 것처럼 ‘때려죽이는’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웃으면서 농담처럼 가볍게 넘어가긴 했지만, 이것은 싱클레어를 협박하며 괴롭히던 크로머의 방법보다 한 발 더 앞선 악의 방법이 아닌가. 그 후로 싱클레어는 크로머에게서 자유를 되찾는다. 데미안이 그렇게 한 것이라고 둘의 대화에서 나오긴 하지만, 데미안이 어떻게 크로머를 싱클레어로부터 떼어놓았는지에 대해서는 이 책의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데미안은 크로머가 두려움에 떨며 싱클레어를 피하도록 만든 것일까. 나 역시 주인공 싱클레어처럼 이 부분이 너무 궁금하다.


이 오래된 궁금증에 대해서 책을 덮고도 계속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과연 그것을 데미안이 한 것이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혹시, 데미안이 싱클레어의 훗날의 자아상이라고 해석하는 것을 빗대어 생각해 볼 때, 사실은 싱클레어 자신이 크로머에게 두려움을 심어준 무엇인가를 행동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길에서 마주치게 된 크로머가 주인공 싱클레어를 보고 흠칫 놀라며 돌아서 가버리게 된 것이다. 크로머가 주인공을 보고 놀라서 되돌아가는 부분은 그가 데미안이 아닌 싱클레어를 두려워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크로머를 자신에게서 떨어지게 만든 것은 데미안이 아니라 바로 주인공 싱클레어 자신일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러서야 나는 무언가 해소가 된 느낌이 들었다. 데미안을 네 번쯤 읽고 나서야 비로소 책의 처음 시작을 내 방식대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 다음에 다시 데미안을 읽게 되면 프란츠 크로머와의 일화에 대해서 또 다른 생각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또다시 읽게 될 그때의 느낌이 기대가 된다. 이런 것이 데미안을 인생 책 리스트에 올려놓게 된 이유가 될 것이다.




성장하는 것은 십 대의 싱클레어뿐만은 아니다. 견고하게 만들어진 세계에 균열이 생기고 그것을 무너뜨려야만 하는 일은 살면서 계속 생겨난다. 이 책을 읽고 있는 40대의 끝자락에 있는 나 역시도 싱클레어와 함께 성장하고 있음을 느낀다. 하나의 세계를 몇 번쯤 깨뜨리고 나서, 그리고 적어도 열 번쯤 데미안을 읽고 나서 더 성장한 내가, 딸에게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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