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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프 Dec 16. 2020

쇄국 주방의 행주적 인간

12년째 의심하고 있다.  이 사람이 정말 그 사람인가.. '한 번만 만나 달라'며 눈물을 줄줄 흘리던 맑은 송이 같은 청년이...  '행주는 왜 안 빨았냐'며 하루가 멀다 하고 잔소리를 지껄이는 이 작자와 정말 같은 생명체란 말인가..



남똘은 혼인신고와 동시에 돌변했다. '비 오는 날 우산 같은 남자가 되고 싶다'며 5 공화국 시대에나 유행했을 법한  지난 멘트에도 넘어가 줬더니... 결혼 후 시어머니적으로 돌변해 온갖 집안일에 트집을 잡는 아방가르드한 인간이 되었다(그냥 잔소리가 겁나 많은 인간이란 소리다)

 

그가 변한 것인지, 그를 보는 내 눈이 변한 것인지는 증명할 수는 없으나. 그는 결혼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세상을 다 주고 싶지만 당장 아무것도 없으니 월급밖에 주지 못해 미안하다 말하던 그가, 요즘은 자기 월급을 다 뺐어간 사악한 인간이라며 6살 된 둘째와 연합을 먹고 나를 악당 취급한다. 당근이라도 주며 채찍을 때리라나 뭐래나...

 

버스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야간대학원을 뚜벅이로 다니던 나를 한사코 자기 마티즈로 모셔다 주겠다며 극성을 부리더니, 요즘은.. 1초 전까지 잘 되던 노트북이 이상하게 안된다며 제발 고쳐달라 불쌍한 표정을 짓는 내게  '니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며 오만상을 다 구기고 자는 척을 한다. 내가 할 줄 알았으면 부탁을 하겠냐? 퉤 퉤 퉤!


그의 기를 살려주는 요물! 그를 돌변하는데 2% 정도는 영향을 미친 것 같은 사악한 물건!

그가 12년 결혼생활 내내 트집을 잡는 적폐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행주'이다.


먼저, 우리 집 행주 변천사는 이렇다.

남똘은 결혼하자마자, 전주 한옥마을 종갓집 종부나 쓸법한 하야디 하얀 행주를 사 와 나보고 날마다 삶아 쓰라 명하였다.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렇게 삶고 싶으면 너나 삶아 써라'고 말했다. 그리고 제1차 행주대첩이 일어났다.


부부간의 다툼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듯, 우리의 행주대첩도 시작은 미약했지만 지금 당장 이혼 서류에 도장이라도 찍을 것처럼 서로 으르렁대며 순식간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낯선 기류가 며칠간 지속됐고 잠깐 긴장을 푼 사이 소나기 같은 웃음이 터져나와 분위기가 급 소각되더니, 치열했던 며칠 전 전투가 망각의 다리를 건너면서 흐지부지해졌다. 1차 행주 대첩도 그렇게 끝났다.


첫 아이가  태어나자 남똘은 물티슈라는 신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신문물이라는 것이 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새로운 르네상스를 탄생시킨다. 하얀 행주를 지향하던 그가 물티슈에 흔들렸다. 그는 며칠을 물티슈의 가격, 일회용으로 아파할 지구의 상태, 행주에 둥지를 틀어 살고 있을지도 모를 박테리아의 수를 헤아리는가 싶더니 자기는 1회용은 절대 쓸 수 없다 철벽 선언하였다. 그러고 하얀 행주에서 노란, 초록, 분홍색의 수명이 짧은 행주로 전격 교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일로 남똘은 자기가 일회용 물티슈를 지양하는 행주적 인간임을 증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학이란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진화한다.

빨아 쓰는 행주가 나온 것! 이번에는 남똘 충격이 컸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한동안 갈팡질팡하던 그는 속수무책 빨아 쓰는 행주의 장점을 인정하더니 드디어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의 쇄국 주방에도 개화기가 온 것이다. 지구도 적당히 아플 것이고 가정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그 후에도 제2차, 3차 행주대첩은 끊임없이 촉발되었는데... 화근은 바로 나다.


나와의 모든 싸움에서 우의를 점령하는 남똘은 기가 살아 있다. 바로 내가 돌아서면 까먹는 다발성 주부 치매를 앓고 있기 때문이다. 설거지 후 행주 빨기를 까먹고 잠시 놓아두면 그의 잔소리가 시작된다. (정말 나도 잘하고 싶은데 기억이 안 난다ㅜ)


그리고 오늘. 제3209회 행주대첩이 일어났다. 나는 정말이지 한 번만 이 집안에서 행주 가지고 트집을 잡는다면 주방 셧다운을 하겠다 위협하며 거칠게 설거지를 해댔다. 어제 저녁 촉발한 주부 치매로 인해.. 빨아 쓰는 행주를 또 안 빨아 놓고 잠이 든 것이다. 항상 행주가 화근이다. 정말 지구만 아니면 물티슈를 쓰고 싶다.


이 행주대첩은 언제 끝날런지.. 그리고 행주적 인간은 언제 그 입을 다물게 될지..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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