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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프 Oct 22. 2020

그래.. 네가 다해먹어라!

남똘은 좀 짜증 나는 구석이 있다. 듣다 보면 는 말인 건 알겠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다. 38선을 넘었다며 새 지우개를 싹둑 잘라가는 짝꿍처럼. 떠든 사람 이름을 요령 한 톨 없이 죄다 칠판에 내리적는 반장처럼. 얄미울 때가 있다. 특히 뜨거운 감정에 이끌려 사는 것을 '인간다움'이라 생각하는 나 같은 여자에게는, 의 존재 자체가 나 언아질 때가 있다.





"지침이 그래요. 유럽 아니면 일본, 둘 중 하나에만 지원하셔야 돼요.. 이번에는 두 나라밖에 안 뽑아요."

"우리 연구실은 전공이 OO이라서 호주에 꼭 가야 됩니다. 전공이랑 상관없는 나라에 연수를 가면 뭐합니까? 인력양성사업이라면서요."


"아쭈.. 이 놈 봐라. 바른말만 골라하네. 지침이 그렇다니까.. 네 맘대로 할 거면 니가 총장하든지. 대통령을 해 먹든지..  그래.. 아주.. 네가 다 해 먹어라!!"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호주에 보내드릴 수 없는 거.. 잘 아시잖아요. 계획서에도 없는 나라인데.. 제가 어떻게 결재를 올리겠어요. 너무 억지 부리시는 거 아니에요?"라며 매우 이성적으로 받아쳤다.


10분간 통화하는 사이, 노(忿怒) 만수르 된 나는.. 말끝마다 받아치는 그놈 목소리가 싫어졌다. 화 너머에 있는 그놈 멱살을 쥐 흔드는 상상을 했다(가끔 요즘도;; 미워 죽겠을 때가 있다.)


속은 세계대전인데 그놈 목소리에는 흔들림이란 없다.

무슨 에이스 침대냐!! 

난 남똘의 이런 점이 싫다. 남 열받게 하고.. 자기는 잔잔한.. 따박따박 바른 말만 하는 이런 습성.. 쳇! 불가마에나 떨어져라!!(사람은 차카게 살아야 된다. 그리 저주를 퍼부었더니..ㅜ  업보가 부메랑처럼 돌아와.. 우리 첫째 토끼가 때때로 얼음처럼 차고 이성적이다;;)


어렵사리 구한 직장에서.. 차마 벼락같이 화를 낼 수 없어 "유럽이나 일본으로 계획서를 바꿔내시든지.. 아니면.. 못 가시는 거예요!!"라며 심하게.. 천둥만큼만 소리치고 전화를 끊었다. 흥!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지! 전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쪼르르 실장님께 달려가 남똘의 악행을 일러바쳤다.


"실장님 OOO교수님 연구실에서 호주로 계획서를 냈어요. 자기들은 호주에 꼭 가야 된데요. 계속 우겨요"

"..... 점프 씨 내가 알아서 할게"


그때부터, 캐비넷 동굴 안에선 뻐끔뻐끔 담배 구름이 피어났다. 에휴. 실장님도 뾰족한 수는 없구나.. 안 그래도 논문으로 도 닦느라 힘드실 텐데.. 저러다 논문보다 폐결핵 진단이 먼저 나올 것 같은데... 걱정이 됐다. 그러나 이내 팔자에도 없는 남 걱정 따윈 집어치우고, 좁아터진 사무실에서 간접흡연으로 까칠해진 내 피부 걱정이나 하기로 했다.  


사실.. 남똘의 짜증 나는 주장은.. 그의 지도교수 의견이나 마찬. OOO교수는 정년이 얼마 남지않은 건축학과 수장이었고, 지금 추진하는 국외연수도 그분의 공이 들어간 사업이라 '지침에 없다' 이유로 모르는 척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후..  여러  동안.. 사무실 회의 탁에선 줄담배가 이어졌다. 회의 멤버는 교수님들인데.. 내가 본, 그 회의라는 것이 어쩐지 TV 드라마에서 본 똑똑한 석학들의 그것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땅따먹기 하는 동네 초딩들과 비슷한... 시장판에서 내기 장기 두는 아저씨들과 다르지 않은... 뭔가 시끌벅적하지만 실속은 없고.. 내 퇴근시간만 잡아먹는.. 그런 느낌이었다.


결국.. 어이없게도.. 사업단은 합법적으로 지침을 바꾸고,  똘 연구실 팀은 호주 연수를 가게 되었다. 세상에.. 그가 낸 계획서대로 되버리고 만거다!  와 진짜.. 남똘. 그래 니 잘났다. 니 팔뚝 굵다. 


모든 것이 정리되고 실장님 남똘을 사무실로 불렀다. 그간 지침을 바꾸기 위해 힘들었던 과정과 사업단 상황을 설명해주고 호주로 연수를 가게 됐다고 말해주기 위해서다. 그래서 거적때기 그자가 유령같이 내 뒤에 서 있었던 거다. 감히 불경스럽게.. 허락도 없이.. 내 손 거울 속에서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이다.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쓱 쳐다봤다.

나도 경멸하듯 그를 쳐다봤다.

그자가 유령처럼 사무실을 나간다.

나는 빗자루 같은 그의 뒤통수를 쏘아보았다.

아.. 비호감.. 딱 내가 싫어하는.. 그런 류의 인간이야..

다시는 부딪치지 말자. 두 번 다시 너랑은 안 엮이는 거다.


다음날, 아주 상쾌한 기분으로 출근을 했다.

아침에 감은 머리는 아직 살짝 덜 말라 어깨 쪽이 찹찹했지만 오늘은 왠지 햇살도 좋고 바람도 시원하다. 지난밤 환하게 불 밝혔을 대학로 먹거리 골목을 지나오면서, 젊고 살아 있는 듯한 이 거리가 매일 나의 출근길임을 감사했다. 플라타너스가 두줄 나란히 있는 교내 길로 접어들며 오늘 점심은 어디서 먹을까도 생각해봤다. 커피는 아이스 바닐라 라테지. 시럽은 한번 꾹 눌러 넣어야지 ㅎ. 던킨에서 간식으로 도너츠도 사야겠다. 맛있게 먹으면 빵 칼로리ㅋ 혼자 즐거운 하루를 상상하며 온통 먹을 생각만 하고 출근하는데..


뭐야 저 스트라이프 대잔치는..

사무실 터가ㅜ안 좋나...

어제는 거적때기 같은 인간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는데 오늘은 스트라이프 인간이라니...

재킷도, 바지도, 와이셔츠도 다 스트라이프네.. 매직아이냐.. 아.. 어지러워.. 빨리 지나가자.. 라며 땅만 보고 걸음을 재촉 계단을 올라가는데..


"지난번엔 죄송했어요."

"네??" 눈을 들어보니 스트라이프가 내 옆에서 걷고 있다. 얼굴을 보니.. 뭐야? 넌 거적때기?


대문사진: 무한도전 무한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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