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고시는 득도의 길이다.
첫출근, 그 아찔한 기억!
동굴 속 철학자의 삶을 체험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몇 년만 임용고시를 준비해보라. 집-독서실-집-독서실 생활을 몇 개월만 하고 나면 당신은 깨닫게 될 것이다. 컵밥을 먹으러 독서실을 기어 나오는 당신이 철학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밥을 먹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문득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삶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체기를 유발하는) 인문학적 질문들에 온종일 휩싸여 있다면 당신은 득도한 것이다. 매일 나의 정체성을 의심하며 지적인 헛구역질을 해대지만, 컵밥은 왜 이렇게 맛있는지.. 이때 정신줄을 잘 잡아야 된다. ‘물은 물이요 불은 불이요’까지 가면 그대로 도인이 되는 거다.
임용고시를 합격했다면 당신은 어서 빨리 재사회화에 힘써야 된다.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동호회나 독서 모임에 나가보라. 깨알같이 재치 있던 입담이.. 순식간에 미간 주름을 유발하는 반사회적 유머 코드로 전락했는가? 그간 임용 준비로 인간관계를 단절한 덕분에 사회성이 바닥까지 쩍쩍 갈라져 사막화되었는가? 어서 빨리 말하기와 친분 쌓기를 연습하라.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실수하게 될 것이다. 바로 나처럼...
“액면가는 있지만, 신규입니다.”(나는 분명 ‘나이는 있지만’이라고 말하려 했다.)
“임용고시를 보다... 죽다 살아난..”(이 말을 뱉은 후 나는 기억이 상실되었다.)
왜 이렇게 자꾸만 실언을 하는지.. 첫 발령지에서 자기소개랍시고 저런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곧바로 현타가 찾아왔다.
‘나는 광녀가 아니다. 마이크를 들고 초점을 잃은 눈으로 쉬지 않고 말했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다. 오랜 세월 공부로 인해 굳게 닫혔던 입이 발작을 일으킨 것! 동굴 속에서 기어 나온 후 적응기를 거치지 않아 그런 것뿐이다.’
정적이 흘렀다. 넓은 강당에 수 십 개의 눈이 소리 없이 끔뻑거렸다. 그러다 웃음이 터진 사람도 있고 어깨를 으쓱하는 사람도 보였다. 몇몇은 ‘저기 서 있는 보리자루 같은 인간이 도대체 뭐라는 거야?’라며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듯했다. 기초대사량이 한껏 솟구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몸은 추웠다. 그때 알았다. 입과 생각은 정말 따로 놀 수 있으며 한번 터진 입은 여간해서 잘 멈춰지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그들이 나의 득도 과정을 알았다면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아니 콧잔등이 시큰해져 훌쩍이는 이도 있었을 거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불우한 이웃을 도웁시다!!’라고 외치며 모금하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끔은 생각해 본다. 만약 임신 막달에 최종 합격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아마 정신은 진작에 가출했을 터.. 교육학 책을 펼쳐 들고 ‘물은 물이요 불은 불이요’ 중얼거리는 도인이 됐을 테다. 풀린 눈으로 컵밥을 떠먹으며 독서실을 배회하는 철학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첫인상이 바뀌려면 추후 60번의 만남이 필요하다. 그런 걸 ‘초두효과’라고 부른다. 난 몇 년간 임용 공부에 매진한 덕분에 비사회화의 정점인 상태에서 발령이 났고, 자기소개랍시고 터져 나온 헛소리 덕에 비호감적 이미지를 득템 하게 되었다. 그 후 ‘첫인상은 여간해서 바뀌지 않는다’는 정설의 증인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 오는 일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인데(오현종의 시 ‘방문객’)....
나의 교사생활은 그렇게 바닥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첫발을 내딛는 것. 그것밖에 없었다.
Every adventure requires a first step.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대문사진 : '물어보살'을 편집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