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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인생 빵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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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프 Jun 30. 2021

팥빵이 남자보다 설렐 때

설레는 빵을 만나다

하마터면, 초졸자로 생을 마감할 뻔했다.

지금쯤  저 세상에서 ‘짧고 굵게 살았다’며 모세 앞에서 간증을 하고 있겠지.    




중학생 때였다. 인도에서 차도로 미친 듯이 뛰어든 적이 있다. 하마터면 '초졸자'로 생을 마감할  뻔했던 그 미친 뜀박질은, 나름 새 빨개진 얼굴을 가리기 위한 위장술이었다. 100mm 앞에서 우주 최강 훈남이었던 선배가 내쪽으로 걸어왔는데(사실 내쪽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방향’이란 말이 정확한 표현이다)

    

때마침.. (그지같이) 5월이었고... 하필이면 길 양쪽에 늘어진 벚꽃이 웨딩 피날레에 흩뿌려지는 꽃잎들처럼 마구잡이로 스스로를 내던졌다. 순식간에 빨강얼굴앤이 됐다

출처: 빨강머리앤

벚꽃이 열일한 덕분에  로맨틱 킬링 포인트 장면을 연출했다. 내 귀에만 배경음악도 깔렸다.

출처: 빨강머리앤


, 그냥 길을 걸었을 뿐이고...  나는 설렜다.


당황하면 사람의 지능이 파충류 수준까지 떨어진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때의 나는, 그냥 덜 떨어진 중학생이 아니라 종을 넘나드는 수준의 IQ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어깨 위로 자리 잡은 묵직한 것이 ‘나는 이제 사람이 아니므니이다~’를 외치고 있었던 거다. 그때 나는 그냥.. 개구리, 이구아나, 카멜리온, 코브라, 살모사, 장지뱀이었단 말이다.

사람이 아니므니이다~ 출처: pinterest 편집사용

점차 물리적 거리를 좁혀오는 훈남 선배의 축지법은  도화지 위에 속절없이 똑.. 똑.. 또또독.. 떨어지는 수채화 물감처럼 내 얼굴을 새빨갛게 물었다.      


나는 파충류 뇌를 총동원해 2초 만에 해결책을 생각해냈다. 오징어 마냥 몸을 배배 꼬다가(실제로 중딩 때 별명이 오징어였다) 차도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몸을 날렸다.


훈남 선배가 나를 보기는 봤는지... 아니면 인도 위에서 꾸무적거리는 ‘교복 입은 비둘기’ 정도로 인식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나는 설렜고. 빨개졌고. 차도로 몸을 내던졌을 뿐..       


등굣길 동반자 수연이가 내 손을 낚아채지 않았더라면, 난 10대에 요단강을 건넜을 거다. 지금쯤   세상에서 ‘짧고 굵게 살았다’며 모세 앞에서 간증을 하고 있겠지.    


아무튼, 훈남 선배를 시작으로.. 이 밑도 끝도 없는 설렘은  나도 모르는 사이 어딘가에 생겨나 갑자기 온몸으로 퍼져버리는 두드러기같이 인생 전반에 걸쳐 갑자기 툭 튀어나와 온 마음을 간지럽혔다. 


고등학교 때는 오락실 DDR에서 바보 멍충이처럼 춤추는 덜떨어진 놈(아마 지금쯤 두 아이의 아빠가 됐을 그대에게... 쏘리...)에게서 광채를 보았고, 대학 2학년쯤엔 지역방송의 아나운서를 닮은 버스 맨에게서 간질간질함을 느꼈다.


그렇다. 이제껏 남자였다. 정류장에서 뛰어내 뒤를 졸졸 따라가고 싶게 만드는 그 '설렘'의 주체들은 주로 나와 성이 다른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고착화된 설렘... 

난데없이... 어느 날...

그냥... 그렇게... 튀어나왔다

빵을 한입 베어 물었을 뿐인데..


순삭. 3조각이나 먹었다.


보았다. 하늘을 찌를  서 있는 에펠탑을..

그 아찔함을... 느꼈다. 정말로 내가 그 앞에 서 있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

뭐 이런 팥빵이 다 있어!!??


여기 사장님은  유학생이었을 거야. 어느 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선 거지. 시험기간이었거든. 도서관에 일찍 가려고 페달을 힘껏 굴리며 자전거에 몸을 실었지. 새벽 공기가 뺨에 닿는 시원함이 좋아 한참을 달리는데. 풀려버린 실타래끝자락처럼 옅은 빵 냄새가 나는 거야.


'음~ 어디서 나는 냄새지?'

 코를 간지럽히던 냄새를 맡고 다짜고짜 외딴 길로 걸어가게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뭣이 중한디. 그래서 도서관은 제끼고 빵집을 찾아 헤매게 된 거야. 홀린 듯 말이야. 정신을 차려보니 손에 들린 투박한 종이 포장지가 보였어. 사악하리만큼 바삭한 바케뜨. 겹겹이 이국적인 자태를 드러낸 크로와상.. 집 나간 며느리도 잡아다 앉힐 프랑스 팥빵이 거기 ~ 있었던거지.... 그래.. 마리 앙뜨와네뜨가 헛소리를 한 이유가 있었다니까.. 고기가 없으면 빵을 주라고. 프랑스 빵이 맛있다는 뜻이겠지. 아니 빵이 없으면 고기를 주라 했던가... 에라잇 알게뭐야. 걍 빵이 맛있단 말이잖아. 빠바가 괜히 나왔겠냐?.. 안돼겠다 사장님한테 물어봐야지..


사장님 이 팥빵 이거 뭐예요!!

프랑스 팥빵이죠? 이거 뭔데 맛이 이래요!!

너무 맛있잖아요..

3조각이나 먹었다고요.... 벌써..


이건 유혹이지. 암 그렇고 말고.    

나는 또다시 빨강얼굴앤이 됐고 찰나의 설렘을 느꼈다. 팥빵에게 말이다.


아~ 앙버터 말씀이세요?^^

팥빵이 맞긴 하는데 애 이름은 버터예요~

내맘대로 프랑스 팥빵^^

남편이 남자 친구였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수를 느끼고야 말았다.


이제 막 개업한 로다**의 빵들은  종류가 다양하지 않았다. 케이크류 5~6개, 크로와상, 팔미에, 앙버터, 에그타르트, 마늘바게트, 사과파이, 코코넛 만쥬, 쇼콜라.. 이게 거의 다였다. 심지어 내가 처음 방문한 그날엔 개업한 지 얼마 안돼 가짓수가 더 적었다.  


오픈 발에 속는 셈 치고 앙버터와 크로와상, 조각 케이크 한 개, 마늘바게트를 샀다. 하지만 앙버터를 한 입 베어 물고 알게 됐다.


이건 운명이야.  이집 빵을 사랑하게 될 거야.


'교복 입은 비둘기'가 '빵집 비둘기'둔갑하는 순간이었다. 고요한 에서 앙버터를 흔적도 없이 해치우고.. 남은 부스러기기 잔해들을 하릴없이 쪼아대며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나.

오늘부터... 이 집 빵을 사랑할 거야...

나..  이거... 만들 거야..

내 손으로 만들고 싶어... 꼭 배우고야 만다. 빵..

바로 여기서!!! 파리 사장님한테!!


파충류의 머리로,  또 도로에 발을 내디뎠다. 미친 뜀박질을 하고야 만 것이다. 빵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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