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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un 25. 2024

불면증 (1)




     현태는 창틀에 이마를 찧을 뻔하다가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찧지도 않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쓱 문지르며 미간을 찡그리고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헤드라이트를 훤하게 밝힌 검은색 자가용 한대가 쏜살같이 창밑으로 지나갔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눈을 부릅떴지만 밤거리는 다시 조용하고 한산할 뿐이었다. 그저 100m 가량 떨어져있는 커피 자판기의 하얀색 조명등만이 불규칙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다가 그만 거창하게 하품을 하고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크고 둥그런 금속 재질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3시 5분. 그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5층 위에서 내려다보는 차도는 드문드문 이어지는 옅은 가로등 불빛 아래서 어둡고 차가워보였다. 그것은 너비로 치자면 6차선의 넓은 길이었지만 길이로 보면 주택 단지 사이를 가로지르는, 고작 900미터 정도에 불과한 짧은 길이었다. 길 한쪽 끝은 대로와 만나는 삼거리로 이어지고, 다른 쪽 끝은 아파트 단지 앞에서 끝나고 있어서 새벽이 되면 지나다니는 차는 거의 없었다. 

     그는 검푸른 아스팔트 바닥을 5분 정도 노려보다가 다시 스르르 눈이 감기는 것을 고개를 흔들어 겨우 떨쳐냈다. 오늘따라 졸음을 참기가 유난히 힘들었다. 출출함을 달래기 위해 2시간 전에 먹었던 삶은 계란 3개 때문일 거라고 어림하며 그는 창밖과 시계를 몇 번이나 번갈아 바라보았다. 3시 9분. 취침 시간인 새벽 4시까지는 아직도 50분이나 남아있었다. 그러나 오늘 만큼은 그도 쏟아져 내리는 잠을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창틀에 코를 틀어박고 곯아떨어질 지경이었다. 두 손으로 볼을 꼬집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때려 보아도 소용없었다. 한참을 머리를 조아리며 끙끙대던 그는 결국 3시 반에 잠자리에 들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6개월 넘게 지켜 온 취침시간을 어기는 게 마음 편치는 않았지만, 이제 20분만 있으면 따듯한 침대에 몸을 누이고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쓸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까짓 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길 건너편에 멀찍이 있는 자동차 정비소 옆 골목에서 파란색 중형 트럭 한 대가 빠져나오는 게 눈에 띄었다. 그는 고개를 길게 빼고 뻣뻣하게 상채를 들어올렸다. 트럭이 좌회전 하는지 우회전 하는지를 보기 위해서였다. 만약 좌회전을 한다면 도심이나 인천으로 연결되는 큰 길 쪽으로 가는 셈이니 상관없었지만 우회전을 해서 그가 있는 방향으로 온다면 사정이 달랐다. 좌우를 살피던 트럭은 크게 반원을 돌아 우회전 했다. 그리고 텅 빈 차로에서 과시라도 하듯 점차 속력을 높였다. 짐칸에는 쇠꼬챙이 다발 같은 것들이 잔뜩 실려 있어서 멀리서도 꽤나 묵직해 보였다. 하지만 거친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트럭을 현태는 더 이상 아랑곳하지 않고, 대신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것만으로도 성이 차지 않는지 유리창에 코를 납작하게 붙이고 창틀 아래쪽까지 샅샅이 살폈다. 그 사이 집 앞까지 달려온 트럭은 창문 유리가 흔들릴 정도로 육중한 진동을 남기며 재빨리 지나쳐갔다. 현태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언제 그랬냐는 듯 밤거리는 다시 조용하고 한산할 뿐이었다. 

     현태는 의자에 주저앉아 등받이에 지그시 등을 기댔다. 잠시 달아났던 잠이 다시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이제 17분 남았다. 그는 한쪽 팔꿈치를 창틀에 기대어 턱을 괴고 길 건너편에 정면으로 보이는 아파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온통 캄캄한 403동 건물에서 21층 창문만이 유일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아까 창틀에 머리를 찧을 뻔한 바로 직전까지도 그는 저 불빛을 올려다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 사이 창문에는 하얀색 커튼이 쳐져 있었지만 불빛만은 여전히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만약 길가를 따라 줄맞춰 늘어서 있는 가로등의 지저분한 노란색 불빛이 아니었다면 저 새하얀 빛은 밤바다의 등대에 비유할 수 있을 만큼 선명했을 것이다. 

     저 방은 종종 새벽까지 불이 밝혀져 있어서 이렇게 매일 밤을 지새우는 현태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21층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왜 저렇게 새벽까지 깨어 있는지 상상해 보는 것도 새벽의 더딘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반대로 21층의 불이 일찌감치 꺼지는 날이면 그의 마음도 둘 곳 없이 적적해지곤 했다. 그러고 보니 늦어도 새벽 3시쯤에는 꺼지던 불빛이 오늘처럼 늦게까지 켜져 있는 건 드문 일이었다. 문득 현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 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잠드는 사람인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엄지손톱 만한 불빛을 멍청하게 올려다보던 현태는 다시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했다. 억지로 눈을 뜨고 있자니 뒤통수에서부터 밀려오는 빡빡한 두통 때문에 두 눈이 앞으로 튀어 나올 지경이었다. 시계를 보니 3시 21분이었다. 30분까지는 아직 9분이나 남았다. 하지만 어차피 4시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한 마당에 굳이 또 3시 30분을 지킬 필요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스스로를 학대할 것 없이 당장 잠자리에 들어야겠다고 결심하며 건성으로 창밖을 내다보던 그는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길 건너 아파트 담벼락 밑, 여러 겹으로 둘러싸인 짙은 그림자 밑에서 어떤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창밖으로 목을 쑥 내밀고서 가로등 불빛사이로 뿌옇게 흐려지는 어둠 속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만 가만 납작하게 미끄러지는 주의 깊은 움직임. 그것은 고양이었다. 검은색과 갈색의 얼룩무늬에 꼬리에만 하얀색 털이 섞여있는, 아직 몸집이 작은 어린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몸을 바짝 낮추고서 찻길 앞까지 슬슬 기어오더니 그림자가 끝나는 경계선 앞에서 머뭇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러다가 그냥 제풀에 돌아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현태는 조바심을 내며 고양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고양이는 털뭉치처럼 부드럽게 몸을 구부리더니 훌쩍 찻길로 뛰어내렸다. 동시에 현태도 현관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리고 단숨에 5층에서부터 1층까지 층계를 굴러 내려가 바깥 거리로 내달렸다. 1월 마지막 밤의 얼어붙은 공기는 광대뼈를 에일 듯이 매서웠지만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도 그는 추위를 느낄 새가 없었다. 고양이는 이미 노란색 중앙선을 넘어 이쪽 차선으로 들어서는 참이었다. 현태는 다짜고짜 찻길로 뛰어 들어 고양이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돌연 갑작스러운 방해자의 등장에 적잖게 놀란 고양이는 활처럼 구부린 몸을 바짝 치켜세우며 그를 쏘아보았다. 휘둥그레진 고양이의 반들거리는 초록색 눈동자가 인광을 뿜으며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5미터 정도를 사이에 두고 몇 초간 고양이와 눈싸움을 하던 현태는 불쑥 양팔을 높이 쳐들고 괴성을 지르며 우루루 고양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고양이는 사람의 허리만큼이나 펄쩍 뛰어 오르더니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부리나케 내달았다. 빳빳하게 곤두선 하얀 꼬리를 휘두르며 펄쩍펄쩍펄쩍 아파트 담벼락을 뛰어넘는 고양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현태는 소리 내어 웃음을 지었다. 당분간 저 고양이는 이 찻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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