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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Oct 29. 2024

[희곡] 채식, 주의, 자 (3)




아내   (다급하게) 자기, 자기야. 


남편   (탁자 밑을 살펴보려다가) 응?


아내   나 사랑해?


남편   (그대로 동작을 멈추고 긴장하며) 뭐-어?


아내   나 사랑해?


남편   (긴장해서 똑바로 앉으며) 왜-에?


아내   아니, 나 사랑하냐구.


남편   (긴장하며) 어어? 그러니까, 아, 오늘이 며칠이더라? (진땀을 빼면서 빠르게 읊으며) 우리가 처음 만난 지는 2116일 됐고, 사귀기로 한 지는 2045일 됐고, 결혼한지는 928일 됐고, 처음 만난 건 3월 29일, 처음 데이트 한 건 4월 6일, 처음 손잡은 건 4월 26일, 처음 키스한 건 5월 1일, 처음 같이 잔 건 6월 12일, 처음 여행 간 건 8월 19일, 결혼기념일은 2월 17일, 당신 생일은 3월 24일, 장모님 생일은 1월 23일, 장인어른 생신은 11월 22일, 빅토리아 생일은 10월 1일…….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아내   나 사랑해?


남편   (긴장하며) 당-연하지. 


아내   그럼 앞으로는 날 더 많이 사랑하게 될 걸? 


남편    (긴장하며) 왜-에?


아내   내가 당신을 위해서 선물을 준비했거든.


남편   (긴장하며) 선-물? 갑자기?


아내   아주, 아주, 아주 특별한 선물이야.


남편   (긴장하며) 으음, 뭘-까?


아내   자, 잠깐만 눈 감고 있어봐.


남편   (눈을 감으며) 이렇게?


아내   응, 절대 미리 눈 뜨면 안 된다?     


  아내가 손님을 탁자 밑에서 꺼내 정면을 향해있는 의자에 앉히고는 얼굴과 옷매무새를 정돈해 준다.     

아내  자아, 이제 눈 떠봐.     


   눈을 뜬 남편은 수줍게 웃고 있는 손님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다. 남편과 손님은 어색하게 서로 인사를 나눈다.     


남편   아이쿠, 저기, 안녕하세요.


손님   네, 네, 안녕하세요.


남편   아, 이거, 반갑습니다.


손님   네, 에, 저야말로.


남편   저 근데, 누구신지?


손님    (말 없이 웃는다)


아내   오늘 내가 초대한 손님이야.


남편   손님?


아내   (남편의 옷깃을 교태있게 매만지며) 솔직히 요즘 우리 사이에 조금 권태기가 온 건 사실이잖아. 빅토리아 얘기 빼고는 서로 대화도 줄어들고. 침대에서도, 나는 물론 항상 만족하지만, 다소, 뭐랄까, 전에 비하면, 자기가 좀, 태연자약하잖아?


남편   태연자... 뭐라고?


손님   (핸드폰을 검색하며) 태연자약. 마음에 어떠한 충동을 받아도 움직임이 없이 천연스럽다는 뜻이죠.


남편   내가 태연자약했다고?


손님   침대에서요.  


아내   그래서 내가 생각해 봤는데, 우리가 함께할 좀 자극적이고, 독특하고, 강렬한 무언가가 필요한 것 같아. 뭐랄까. 함께 은밀한 비밀을 공유하는 거. 원래 부부란 그런 거잖아. 


손님   결혼은 지킬 앤 하이드 같은 거니까요.


아내   그러니까 우리 결혼 생활에도 이제 (손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하이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자기 생각은 어때?


남편   (아내, 손님, 자기 자신을 한 사람씩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자기야. 나 너무 감동받았어. 이건 정말 최고의 선물이야. 사랑해, 자기야.


아내   나도 사랑해.    

 

   아내와 남편이 탁자 위에서 진하게 키스한다.     


남편   (손님에게 다시 정중히 인사하며) 아이고, 이거 참, 이거,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해주셔서,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손님   (정중하게) 아니, 아닙니다.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죠.


남편   이것도 정말 큰 인연이군요. 그래, 제 아내하고는 어떻게 만나신 건가요?


손님   인터넷 게시판에 제가 글을 올렸어요. 아내 분께서 보고 연락을 주셨구요. (핸드폰을 꺼내 누르며) 이런 글이었죠.      


   손님이 핸드폰을 남편에게 보여준다. 무대 뒷벽에 핸드폰 화면 모양의 인터넷 페이지가 뜬다. (이 문구는 공연 장소와 관객 정서에 맞게, 혹은 더 코믹하게 바꿀 수 있다.) [저의 첫경험을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멋진 부부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평생 추억으로 간직할 뜨거운 하룻밤을 확실하게 리드해 주실 부부는 주저 말고 연락주세요. 철저한 비밀 보장을 약속합니다♥]      


남편  당돌하군요.


아내  맹랑하죠.


남편  대담하고


아내  담대해.


손님   에이, 아니에요. 저는 첫경험이 심각해지는 게 싫었을 뿐이에요. 첫경험 상대를 남자로 할지 여자로 할지 결정하는 것도 골치 아펐구요. 어느 쪽이든 그건 편파적이고 차별적인 처사인데다가, 육신과 욕망의 성형이고, 관계의 잣대가 되고, 심지어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테니까요. (몸을 털며 진저리를 친다)


아내   맞는 말이에요. 첫경험과 섹스 자체를 혼동하는 건 흔한 일이죠. 


남편   상대와 행위 자체를 혼동하는 것도 흔한 일이고 말입니다. 여자와 섹스를 하는 거지 섹스와 여자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모르는 멍청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니까요.


아내   우리는 언제나 자신에게 공정해야 해요. 속임수를 쓰면 안 돼요. 정당하게 기회를 줘야죠. 소위 여론 조사를 한답시고 편향적인 결론이 나오도록 표본을 결정하고, 방식을 선정하고, 표준을 제시하고, 문항을 선별하고, 숫자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조작이란 언제나 매우 과학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가장 이성적인 사람들이 빠져들죠.


남편   아시다시피 인격이란 인위적인 것입니다. 정체성이란 작위적인 것이에요. 개성이란 가식적인 것이구요. 그걸 잊어선 안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 누구보다 감쪽같이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머리에 피도 안마른 새파랗게 어린 것들이 일찌감치 확증편향에 빠져서는 이미 자신이 누구이고 자신이 무엇이며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빤히 안다는 듯 으스대는 꼴을 보자면 기가 차다니까요.


아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불신하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해요.


남편  우리가 우리 자신을 두려워하는 걸 불신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요.   

  

손님  (핸드폰을 검색하며) 에, 확증편향이란 자신의 가치관, 신념, 판단 따위와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방식이란 뜻이네요. 그렇다면 확증편향 이전의 가치관, 신념, 판단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요?


아내   어디에서도 오지 않아요. 모든 가치관, 신념, 판단은 확증편향일 뿐이니까요. 모든 확증편향도 역시 가치관, 신념, 판단일 뿐이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양쪽 단어들의 자리를 바꾸어도 똑같은 뜻이 되는 거죠.


손님   가치관, 신념, 판단이란 자신의 확증편향 따위와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방식. 와, 정말 그렇군요. 


남편   본래 언어란 그저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 끊없이 분열하는 자구책일 뿐이죠.


아내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동어반복을 피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손님   맞는 말씀이에요. 저도 동감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무정부주의자들인 셈이군요. 


남편   정부가 있는 한 그렇죠.


손님   지킬과 하이드에요. 


아내   지킬과 지킬이구요.


남편   하이드와 하이드인 것이죠.


손님   아아, 세상에, 제가 여러분을 만난 건 정말 행운입니다.


아내   아니에요. 우리가 행운이죠.


남편   정말 멋져요.    


    모두 화기애애하게 웃는다.


남편   에, 저기, 그런데 혹시, 아까 인터넷에 올리신 글 중에 말입니다, 그건 틀림없는 거겠죠?


손님   어떤 거요?


남편   ‘철저한 비밀 보장’ 부분 말입니다.


손님   아, 그럼요. 물론이죠.


아내   오늘 일에 대해 벌써 누군가에게 말하건 아니구요?


손님   세상에, 전혀요. 제 주변사람들은 다 꽉 막힌 속물들뿐이거든요. 도무지 모험이란 걸 이해하지 못해요. 자꾸 이유와 필요, 이득을 따진단 말입니다. (핸드폰을 검색하며) 모험이란,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하는 것인데 말이죠. 여기 사전에도 목적이나 의도 같은 건 아예 언급조차 되어있지 않잖아요. 모험 자체가 바로 모험의 목적이니까요.


남편   옳은 말입니다. 지구 전체가 법치주의와 자유주의와 윤리주의를 3:2:1로 뒤섞어서 만든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되어버린 오늘 날, 모험가가 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죠. 하지만 모험가 대신 활동가들이 세계 구석구석에서 활개 치고 다니는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모험이 가능한 시대인지도 모릅니다. 


아내    모험만이 우리를 진지하게 만들어 줘요. 진지해진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거든요. 어쩌면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몰라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단 한 번도 진지해지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마니까요.                  


손님   세상에, 단 한 번도.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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