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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Oct 22. 2024

[희곡] 채식, 주의, 자 (2)




   그 때 빅토리아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부숴버린다.


아내   어머, 빅토리아, 저런. 몇 번 쓰지도 않았는데 30만원짜리를 단번에 해먹었네.


손님   에? 이 고양이 장난감 하나가 30만원이라구요? 아휴, 정말 미신적이네요.


아내   그런 말 말아요. 우리 빅토리아 기죽겠어요. (빅토리아를 쓰다듬어 주며) 빅토리아, 괜찮아요. 엄마는 우리 빅토리아를 위해서라면 돈 같은 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 빅토리아는 아무 걱정말고, 그저 밥 많이 먹고, 똥 많이 싸고, 잠도 많이 자고, 그렇게 매일 즐겁게 지내면 되는 거예요. 알았죠? 


손님   이제 보니 빅토리아에게는 굳이 영혼 같은 건 필요 없겠는데요?


아내   왜요?


손님   영혼 빼고는 다 있으니까요. 


아내   어머나, 다정한 얘기네요. 


손님   그런가요?


아내   제가 좋은 주인이라는 뜻이잖아요.


손님   뭐,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저도 이런 주인을 만날 수만 있다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고양이가 되고 싶을 정도니까요.


아내  (이빨을 드러내고 그르릉 거리며) 오늘 밤 그렇게 될 지도 모르죠.   

  

   두 사람은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는다.     


아내  그런데, 빅토리아. 좀 춥지 않아요? 오늘 날씨가 좀 쌀쌀하네. 우리 아기 홀딱 벗고 있어서 감기 걸리겠다. 옷 입을까, 응?


손님   홀딱 벗고 있다구요? 그럼 지금 빅토리아가 입고 있는 저건 뭔데요.


아내   그럼 당신도 머리카락을 입고 있는 건가요?


   아내가 옷장으로 가서 문을 연다. 옷장 안에는 빅토리아의 옷이 가득하다. 아내는 이것저것 옷을 꺼내 들고서 고르기 시작한다. 간호사복, 발레복, 한복, 경찰복, 군복, 해적 옷, 백설 공주 옷, 산타클로스 옷, 슈퍼맨 옷 등등 여러 가지 캐릭터와 인물군들을 대표하는 옷들이다. 아내는 그 중 화려한 드레스 한 벌을 들고 빅토리아에게 다가간다.     


아내   빅토리아. 며칠 전에 샀던 이 옷 어때요? 우리 빅토리아는 미모가 출중해서 화려한 옷이 잘 어울리지요. 자아, 빅토리아, 이거 입어 보자.      


   빅토리아가 이리저리 도망가며 발버둥 친다.   

  

아내   아이 참, 이 옷이 마음에 들지 않니?


손님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겠죠.


아내   저기요. 보고만 있지 말고 이것 좀 도와줄래요?   

  

   아내와 손님은 억지로 빅토리아에게 옷을 입힌다. 아내는 빅토리아에게 작은 핸드백도 걸어준다.     

아내   (호들갑을 떨며) 어머, 어머, 어머, 빅토리아 너-무 잘 어울린다. (손님에게) 이것 좀 보세요. 진짜 잘 어울리죠? 


손님   네, 너무 잘 어울려서 무서울 정도네요. 현실감각이 사라질 것만 같아요. 


아내   우리 아기, 어쩜 이렇게 예쁠까? (빅토리아를 껴안으며) 대체 이렇게 예쁜 우리 빅토리아는 어디서 왔을까? 엄마를 닮았나, 아빠를 닮았나. 당연히 이 엄마를 닮았지. 그렇죠? 절 꼬옥 빼다 닮았죠? 


손님   그만 하세요. 고양이 페티시가 생길 것만 같아요. 


아내   어머, 몰랐어요? (교태를 부리며) 이따가 빅토리아도 우리와 함께 할 건데.


손님   (당황하며) 에, 아니, 그건, 대체, 과연, 어떤 식으로, 그런데, 세상에, 제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지, 그게, 그렇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렇죠, 영혼의 탈곡기도 있고, 우리에겐 영혼이 있으니까, 가능할 수도 있고, 어쩌면 새롭고도, 뭐랄까, 오묘할 수도 있는데, 탈탈 털려서, 그래도, 제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진 않았지만, 않지는 않았기는 않았지만, 그래도, 물론, 준비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아내   (깔깔 웃으며) 아유, 농담이에요. 우리 빅토리아에게 그런 취향은 없어요.


손님   (정신을 차리며) 그렇군요. 저에게도 그런 취향이 없다는 걸 깜빡 잊었습니다.


아내   아차, 빅토리아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려야겠어요.     


   아내가 핸드폰을 꺼내 빅토리아의 사진을 찍는다.   

     

손님   SNS에 빅토리아 사진을 많이 올리시나봐요.


아내   빅토리아의 SNS에요. 빅토리아는 자기 SNS가 있거든요. SNS에서 우리 빅토리아는 꽤 잘나가는 샐럽이랍니다.     


   아내가 자신의 핸드폰을 손님에게 보여준다. 무대 뒷벽에 빅토리아의 SNS 페이지가 뜨고 많은 사람들이 빅토리아에게 보내는 찬사 댓글들이 보인다.     


아내   자, 이래도 빅토리아에게 영혼이 없다고 할 건가요?


손님   고양이에겐 영혼이 없지만 확실히 빅토리아에게는 있는 것 같네요.


아내   완벽하지는 않지만, 정답이라고 해주죠.      


   아내가 웃으며 손님에게 키스한다.       

 

손님   (아내를 바라보며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지금 이 순간’을 흥얼거리듯 부른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이 순간.


아내   (깜짝 놀라며) 어머나, 어쩜 노래를 그렇게 잘해요?


손님   실은 제가 뮤지컬 배우거든요.


아내   세상에, 정말요? 


손님   아직 무명이지만요.


아내   저도 뮤지컬 팬이에요. 우리 빅토리아 이름도 뮤지컬 ‘캣츠’의 빅토리아에서 따온 거라구요. 어머, 우리가 만난 건 정말 운명인가봐요.  


손님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지금 이순간’을 흥얼거리듯 부른다) 나만의 꿈이 나만의 소원 이뤄질지 몰라 여기 바로 오늘.


아내   저도 너무 좋아하는 노래에요. 결혼식장에서 축가로도 많이 부르죠?


손님   네, 결혼생활과 아주 잘 어울리는 노래죠. 


아내   지킬과 하이드처럼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기 때문인가요?


손님   지킬과 하이드처럼 똑같은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죠.


아내   정말 멋지네요. 더 불러줄래요?


손님   (지킬 앤 하이드 –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이 순간

나만의 꿈이 나만의 소원

이뤄질지 몰라 여기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말로는 뭐라 할 수 없는 이 순간

참아온 나날 힘겹던 날

다 사라져 간다 연기처럼 멀리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날 묶어왔던 사슬을 벗어던진다

지금 내겐 확신만 있을 뿐

남은 건 이제 승리뿐

그 많았던 비난과 고난을

떨치고 일어서

세상으로 부딪혀 맞설 뿐

지금 이 순간 내 모든걸

내 육신마저 내 영혼마저 다 걸고

던지리라 바치리라

애타게 찾던 절실한 소원을 위해

지금 이 순간 나만의 길

당신이 나를 버리고 저주하여도

내 마음 속 깊이 간직한 꿈

간절한 기도 절실한 기도

신이여 허락하소서. [신이여 허락하소서.]    

 

   아내가 다시 손님에게 키스한다. 그 때 남편이 집으로 돌아온다. 남편은 남성적인 외모에 남성적인 매력이 드러나는 옷차림이다. 남편은 윗도리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아내   (놀라며) 어머머, 이런, 세상에. 남편이 벌써 왔나봐요. 아직 퇴근할 시간이 아닌데. 이걸 어쩌지. 일단 빨리 숨어야겠어요. 어서, 어서요.      


   아내가 허둥지둥 손님을 탁자 밑에 숨긴다. 남편이 아내에게 다가온다. 

    

아내   (아무렇지 않게) 아유, 자기, 오늘 일찍 왔네.  


남편   어, 일이 좀 빨리 끝났어. 


아내   아, 그래? (빅토리아에게) 빅토리아, 아빠 왔네요.


남편   (빅토리아에게 다가가며) 아이구, 우리 빅토리아 오늘 따라 더 예쁘구나. 그런데 당신 때문에 우리 빅토리아 성정체성에 혼란이 오겠어. 남자애한테 빅토리아라는 여자 이름을 붙인 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여자 드레스까지 입히다니 좀 너무한 것 같아.


아내   어머, 자기야. 고양이한테 성정체성이 어딨어. 당신 동물을 너무 의인화 시키는 거 아냐? 


남편   그런가?


아내   당신도 참.     


    두 사람이 함께 큰 소리로 웃는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의 입에 키스한 뒤, 빅토리아의 입에도 똑같이 키스한다. 두 사람은 탁자 양쪽에 마주보고 앉는다. 그 때 남편의 다리에 손님의 몸이 닿는다. 남편이 탁자 밑을 보려고 하자 아내가 황급히 막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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