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질, 너에게 부탁이 있어.
질 부탁?
잔 내가 진짜 잔 다르크라는 걸 네가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선포해줬으면 좋겠어. 전쟁 영웅이자 잔 다르크의 가까운 동료였던 너의 말이라면 모두가 믿을 거야.
질 어째서? 데 자르무아르 부인으로 조용히 살고 싶다더니?
잔 그러려고 했지. 그러려고 했어. 데 자르무아르 부인이든 누구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려고 했어. 그런데, 저기, 나에게는 왕에게 받은 재산이 꽤 있어. 그러니까, 잔 다르크에게 말이야. 나는 그 돈이 필요해.
질 왜?
잔 다시 잔 다르크가 되기 위해서지.
질 잔 다르크가 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얻기 위해서는 잔 다르크가 되어야 한다는 거야?
잔 그래.
질 하, 마치 연극 공연 같군.
잔 모두가 그렇지. 요즘에는 모두가 그래. 평화의 시대니까.
질 제기랄.
두 사람 잠시 침묵한다.
질 잔, 다시 잔 다르크가 되면, 나와 아이를 가질래?
잔 너하고 내가?
질 그래, 너하고 내가.
잔 싫어.
질 어째서?
잔 넌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타인이라면 알지 말아야 할 것 까지 모두. 너와 나의 결합은 마치 근친상간 같은 거야.
질 아담과 이브도 근친상간을 했어. 우리 모두 근친상간으로 태어나 근친상간을 하고 있는 셈이야.
잔 그럼 자위행위라고 하자. 내가 잔 다르크일 때 너도 잔 다르크일 거고, 네가 질 드레일 때 나도 질 드레일 거야. 그러니 우리 사이에서는 어떤 아이도 태어날 수 없어.
질 난 그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라 해도 상관없어. 난 내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싶은 거니까. 세상에 다시없을 호구였던 요셉처럼 너의 그림자가 되어 평생 동안 아기를 지켜주고 싶어.
잔 나는 성모 마리아가 되고, 너는 요셉이 되고, 그럼 성령으로 태어난 우리의 아이는 예수가 되어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말텐데.
질 그래, 그렇겠지.
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질 바로 우리들처럼.
잔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요셉은 어디 있었지?
질 글쎄, 멀리 도망이라도 갔나.
잔 아니면 유다처럼 목이라도 맸거나.
두 사람 잠시 침묵한다. 그 때 어디선가 어린아이들의 합창소리가 들려온다. [데이빗 보이의 Space Oddity]가 마치 찬송가처럼 들린다.
잔 아, 이게 무슨 소리지?
질 성가대의 노랫소리야.
잔 무슨 노래인데?
질 장송곡이지.
잔 누구의 장례식이지?
질 무슨 상관이야. 언제나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는데.
두 사람은 잠시 아이들의 합창소리를 듣는다. (이 때쯤에는 잔 다르크가 거의 아래층까지 내려와 있다.) 질 드 레가 잔 다르크에게 손을 내밀어 춤을 청한다. 잔 다르크는 질 드 레의 손을 잡는다. 두 사람은 시체가 앉아 있는 의자 주변을 돌면서 춤을 춘다. 그 동안 뒷벽에는 수많은 아이들이 빽빽하게 서서 노래를 부르는 영상이 나온다. 이윽고 질 드 레와 잔 다르크가 춤을 멈추자 희미해지는 노랫소리와 함께 영상이 물에 녹아내리듯이 사라진다. 질 드 레와 잔 다르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고 잔 다르크에게 키스를 하려는 듯 다가가던 질 드 레가 칼을 뽑아 들어 잔 다르크를 겨눈다.
잔 (놀라서 뒤로 물러나며) 나를 죽이려는 거야?
질 그래.
잔 왜?
질 너는 내가 생각했던 그 사람이 아니니까.
잔 아니, 나는 정확하게 네가 생각했던 그 사람이야.
질 그래, 어쩌면 그게 문제인지도 모르지.
질 드 레가 잔 다르크에게 좀 더 다가간다.
질 넌 누구지?
잔 (갑자기 비굴하게 태도를 바꾸고 도망가려고 몸을 비틀면서)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아, 제발요.
질 (칼을 앞으로 내밀며) 넌 누구지?
잔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다가 점차 진정하더니 태도를 떳떳하게 바꾼다.)
질 넌 누구지?
잔 잔 다르크.
질 안녕, 잔.
잔 아, 예수님. 예수님.
질 드 레가 칼로 잔 다르크를 찌른다. 잔 다르크는 입을 크게 벌리며 관객들을 향해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침묵의 비명을 지르며 피에 젖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면서 앞으로 몸을 웅크린다. 동시에 뒷벽에는 잔 다르크의 얼굴이 벽에 꽉 차도록 크게 확대된 채 느린 속도로 재생된다. (잔 다르크가 무릎을 꿇는 순간 실시간 영상도 시작하지만 영상의 재생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현실과는 점차 시간차가 벌어져서 그것은 실시간 영상임과 동시에 시간이 어긋나는 영상이 된다. 잔 다르크가 웅크리고 있는 동안 영상 속 인물의 얼굴이 점점 앞으로 기울어져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영상은 사라진다.) 영상이 사라지자 잔 다르크는 바닥으로 쓰러진다. 질 드 레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잔 다르크의 시체를 어깨에 메고 오른쪽 무대 뒤로 던져버리고는 탁자 위에 앉아 수건으로 칼을 닦기 시작한다. 잠시 후 시녀가 왼쪽 무대로 들어온다.
시녀 아니, 저런 저런, 또 잔 다르크를 죽이셨어요? 이번에는 꽤나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셨어요?
질 아니, 정말이지 그럴 듯 했어. 나도 깜빡 속을 뻔 했는걸. 심지어 잔 다르크 보다 더 잔 다르크 같더군.
시녀 그런데 왜 죽이셨어요?
질 모르겠어. 그냥 견딜 수가 없었어.
시녀 아이 참, 잔 다르크와 닮은 배우를 찾아서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세요? 특히 이번 잔 다르크에게는 제 모든 역량을 다 쏟아 부었다구요. 최고의 작품이었는데.
질 미안하게 됐군.
시녀 지금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하실 때가 아니에요. 주인님이 파산 직전이라는 걸 잊으셨어요? 주인님이 사람들 앞에서 이 여자가 진짜 잔 다르크가 맞다고 한 마디만 하셨어도 잔 다르크의 막대한 재산이 주인님 손 안으로 굴러 들어왔을 텐데요. 벌써 잔 다르크의 가족들하고도 얘기가 다 끝났다구요.
질 그래, 알고 있어.
시녀 그 돈이 있어야 주인님의 가문과 생명을 지킬 수 있어요.
질 그렇겠지.
시녀 아이 참, 이거 큰일이네. 이제 새로운 잔 다르크를 또 만들어 낼 시간이 없는데. 안되겠어요, 주인님. 차라리 이름을 바꾸고 도망가시는 게 좋겠어요.
질 이름을 바꾸라고? 나보고 다른 사람이 되라고? 대체 누가 되라는 거야?
시녀 글쎄요. 누구라도 상관없죠. (시체를 가리키며) 아, 저기, 저 사람이면 되겠네요. 둘이 닮았으니까 충분히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는 어디서 천치 하나를 골라서 질 드 레 역할을 맡기는 거예요. 어려울 거 없어요. 질 드 레가 될 수 있다면 화형이라도 당하겠다는 놈들이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질 그만 둬. 난 그런 행운을 다른 놈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어. 질 드 레로 죽을 수 있는 경험이 그렇게 흔한 건 아니거든. 게다가 그랬다간 저 세상에서 잔 다르크가 나를 못 알아볼지도 모르잖아.
시녀 잔 다르크는 천국에 갔을 텐데요.
질 그래, 난 지옥에 가겠지. 하지만 잔이 그리로 날 찾아올지도 몰라.
시녀 그래요. 바로 오늘처럼.
두 사람 잠시 침묵한다.
질 그나저나 너라도 빨리 도망가는 게 좋겠어. 너는 오랫동안 내 악행에 협력해 왔으니 사람들이 분명 너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시녀 아하, 제가 어디로 가야할까요? 또 다른 잔 다르크를 기다리는 또 다른 질 드 레가 사는 성으로요? 거기서 또 이 모든 일들을 처음부터 다시 반복해야 할까요?
질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시녀 아니오. 저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이 결말을 끝까지 지켜보겠어요. (질 드 레의 뺨을 만지며) 주인님은 내가 필요해요. 지켜보는 관객이 없다면 이 모든 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관객들을 바라보며) 모르시겠어요? 주인님은 이제껏 나를 위해 살인을 해왔던 거예요. 잔 다르크가 주인님을 위해 살인을 했던 것처럼요. 그리고 주인님도 잔 다르크처럼 화형을 당하겠죠. 하늘 높이 매달려 수많은 관객들에게 둘러 싸여 비명을 지르겠죠. 그들은 주인님에게 야유를 퍼붓겠지만 그것이 사실 질 드레에게 보내는 환호라는 걸 그들은 알지 못해요. 만약 화형을 당하지 않았다면 잔 다르크가 잔 다르크가 될 수 있었을까요? 불 속에서 잔 다르크는 진짜 잔 다르크로 다시 태어난 걸요. 저도 부활의 십자가 위에서 질 드 레가 진짜 질 드 레로 다시 태어나는 걸 똑똑히 지켜보겠어요. 그럼 언젠가 어느 무대에선가 질 드 레를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바로 오늘처럼.
질 아, 이제까지 왜 몰랐을까. 가장 가까이에 있었는데. 이제 보니 너야 말로 잔 다르크를 가장 많이 닮았구나.
시녀 아뇨, 잔 다르크가 저를 닮은 거예요.
질 (시체를 가리키며) 내가 저 놈을 닮은 것처럼?
간드러지게 웃는 시녀의 허리를 질 드 레가 껴안는다.
시녀 저도 죽이실 건가요?
질 아니, 오늘은 아니야. 오늘은.
시녀 그럼 내게 키스해줘요. 모든 행복한 이야기의 결말처럼. 그 다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주인공들처럼.
둘은 키스한다. 암전.
커튼콜에서도 시체는 그대로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다. 원하는 관객이 있다면 시체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