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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질과 잔 (5) - 완결

by 곡도





질, 너에게 부탁이 있어.


부탁?


내가 진짜 잔 다르크라는 걸 네가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선포해줬으면 좋겠어. 전쟁 영웅이자 잔 다르크의 가까운 동료였던 너의 말이라면 모두가 믿을 거야.


어째서? 데 자르무아르 부인으로 조용히 살고 싶다더니?


그러려고 했지. 그러려고 했어. 데 자르무아르 부인이든 누구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려고 했어. 그런데, 저기, 나에게는 왕에게 받은 재산이 꽤 있어. 그러니까, 잔 다르크에게 말이야. 나는 그 돈이 필요해.


왜?


다시 잔 다르크가 되기 위해서지.


잔 다르크가 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얻기 위해서는 잔 다르크가 되어야 한다는 거야?


그래.


하, 마치 연극 공연 같군.


모두가 그렇지. 요즘에는 모두가 그래. 평화의 시대니까.


제기랄.


두 사람 잠시 침묵한다.


잔, 다시 잔 다르크가 되면, 나와 아이를 가질래?


너하고 내가?


그래, 너하고 내가.


싫어.


어째서?


넌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타인이라면 알지 말아야 할 것 까지 모두. 너와 나의 결합은 마치 근친상간 같은 거야.


아담과 이브도 근친상간을 했어. 우리 모두 근친상간으로 태어나 근친상간을 하고 있는 셈이야.


그럼 자위행위라고 하자. 내가 잔 다르크일 때 너도 잔 다르크일 거고, 네가 질 드레일 때 나도 질 드레일 거야. 그러니 우리 사이에서는 어떤 아이도 태어날 수 없어.


난 그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라 해도 상관없어. 난 내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싶은 거니까. 세상에 다시없을 호구였던 요셉처럼 너의 그림자가 되어 평생 동안 아기를 지켜주고 싶어.


나는 성모 마리아가 되고, 너는 요셉이 되고, 그럼 성령으로 태어난 우리의 아이는 예수가 되어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말텐데.


그래, 그렇겠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바로 우리들처럼.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요셉은 어디 있었지?


글쎄, 멀리 도망이라도 갔나.


아니면 유다처럼 목이라도 맸거나.


두 사람 잠시 침묵한다. 그 때 어디선가 어린아이들의 합창소리가 들려온다. [데이빗 보이의 Space Oddity]가 마치 찬송가처럼 들린다.


아, 이게 무슨 소리지?


성가대의 노랫소리야.


무슨 노래인데?


장송곡이지.


누구의 장례식이지?


무슨 상관이야. 언제나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는데.


두 사람은 잠시 아이들의 합창소리를 듣는다. (이 때쯤에는 잔 다르크가 거의 아래층까지 내려와 있다.) 질 드 레가 잔 다르크에게 손을 내밀어 춤을 청한다. 잔 다르크는 질 드 레의 손을 잡는다. 두 사람은 시체가 앉아 있는 의자 주변을 돌면서 춤을 춘다. 그 동안 뒷벽에는 수많은 아이들이 빽빽하게 서서 노래를 부르는 영상이 나온다. 이윽고 질 드 레와 잔 다르크가 춤을 멈추자 희미해지는 노랫소리와 함께 영상이 물에 녹아내리듯이 사라진다. 질 드 레와 잔 다르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고 잔 다르크에게 키스를 하려는 듯 다가가던 질 드 레가 칼을 뽑아 들어 잔 다르크를 겨눈다.


(놀라서 뒤로 물러나며) 나를 죽이려는 거야?


그래.


왜?


너는 내가 생각했던 그 사람이 아니니까.


아니, 나는 정확하게 네가 생각했던 그 사람이야.


그래, 어쩌면 그게 문제인지도 모르지.


질 드 레가 잔 다르크에게 좀 더 다가간다.


넌 누구지?


(갑자기 비굴하게 태도를 바꾸고 도망가려고 몸을 비틀면서)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아, 제발요.


(칼을 앞으로 내밀며) 넌 누구지?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다가 점차 진정하더니 태도를 떳떳하게 바꾼다.)


넌 누구지?


잔 다르크.


안녕, 잔.


아, 예수님. 예수님.


질 드 레가 칼로 잔 다르크를 찌른다. 잔 다르크는 입을 크게 벌리며 관객들을 향해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침묵의 비명을 지르며 피에 젖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면서 앞으로 몸을 웅크린다. 동시에 뒷벽에는 잔 다르크의 얼굴이 벽에 꽉 차도록 크게 확대된 채 느린 속도로 재생된다. (잔 다르크가 무릎을 꿇는 순간 실시간 영상도 시작하지만 영상의 재생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현실과는 점차 시간차가 벌어져서 그것은 실시간 영상임과 동시에 시간이 어긋나는 영상이 된다. 잔 다르크가 웅크리고 있는 동안 영상 속 인물의 얼굴이 점점 앞으로 기울어져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영상은 사라진다.) 영상이 사라지자 잔 다르크는 바닥으로 쓰러진다. 질 드 레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잔 다르크의 시체를 어깨에 메고 오른쪽 무대 뒤로 던져버리고는 탁자 위에 앉아 수건으로 칼을 닦기 시작한다. 잠시 후 시녀가 왼쪽 무대로 들어온다.


시녀 아니, 저런 저런, 또 잔 다르크를 죽이셨어요? 이번에는 꽤나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셨어요?


아니, 정말이지 그럴 듯 했어. 나도 깜빡 속을 뻔 했는걸. 심지어 잔 다르크 보다 더 잔 다르크 같더군.


시녀 그런데 왜 죽이셨어요?


모르겠어. 그냥 견딜 수가 없었어.


시녀 아이 참, 잔 다르크와 닮은 배우를 찾아서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세요? 특히 이번 잔 다르크에게는 제 모든 역량을 다 쏟아 부었다구요. 최고의 작품이었는데.


미안하게 됐군.


시녀 지금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하실 때가 아니에요. 주인님이 파산 직전이라는 걸 잊으셨어요? 주인님이 사람들 앞에서 이 여자가 진짜 잔 다르크가 맞다고 한 마디만 하셨어도 잔 다르크의 막대한 재산이 주인님 손 안으로 굴러 들어왔을 텐데요. 벌써 잔 다르크의 가족들하고도 얘기가 다 끝났다구요.


그래, 알고 있어.


시녀 그 돈이 있어야 주인님의 가문과 생명을 지킬 수 있어요.


그렇겠지.


시녀 아이 참, 이거 큰일이네. 이제 새로운 잔 다르크를 또 만들어 낼 시간이 없는데. 안되겠어요, 주인님. 차라리 이름을 바꾸고 도망가시는 게 좋겠어요.


이름을 바꾸라고? 나보고 다른 사람이 되라고? 대체 누가 되라는 거야?


시녀 글쎄요. 누구라도 상관없죠. (시체를 가리키며) 아, 저기, 저 사람이면 되겠네요. 둘이 닮았으니까 충분히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는 어디서 천치 하나를 골라서 질 드 레 역할을 맡기는 거예요. 어려울 거 없어요. 질 드 레가 될 수 있다면 화형이라도 당하겠다는 놈들이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그만 둬. 난 그런 행운을 다른 놈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어. 질 드 레로 죽을 수 있는 경험이 그렇게 흔한 건 아니거든. 게다가 그랬다간 저 세상에서 잔 다르크가 나를 못 알아볼지도 모르잖아.


시녀 잔 다르크는 천국에 갔을 텐데요.


그래, 난 지옥에 가겠지. 하지만 잔이 그리로 날 찾아올지도 몰라.


시녀 그래요. 바로 오늘처럼.


두 사람 잠시 침묵한다.


그나저나 너라도 빨리 도망가는 게 좋겠어. 너는 오랫동안 내 악행에 협력해 왔으니 사람들이 분명 너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시녀 아하, 제가 어디로 가야할까요? 또 다른 잔 다르크를 기다리는 또 다른 질 드 레가 사는 성으로요? 거기서 또 이 모든 일들을 처음부터 다시 반복해야 할까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시녀 아니오. 저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이 결말을 끝까지 지켜보겠어요. (질 드 레의 뺨을 만지며) 주인님은 내가 필요해요. 지켜보는 관객이 없다면 이 모든 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관객들을 바라보며) 모르시겠어요? 주인님은 이제껏 나를 위해 살인을 해왔던 거예요. 잔 다르크가 주인님을 위해 살인을 했던 것처럼요. 그리고 주인님도 잔 다르크처럼 화형을 당하겠죠. 하늘 높이 매달려 수많은 관객들에게 둘러 싸여 비명을 지르겠죠. 그들은 주인님에게 야유를 퍼붓겠지만 그것이 사실 질 드레에게 보내는 환호라는 걸 그들은 알지 못해요. 만약 화형을 당하지 않았다면 잔 다르크가 잔 다르크가 될 수 있었을까요? 불 속에서 잔 다르크는 진짜 잔 다르크로 다시 태어난 걸요. 저도 부활의 십자가 위에서 질 드 레가 진짜 질 드 레로 다시 태어나는 걸 똑똑히 지켜보겠어요. 그럼 언젠가 어느 무대에선가 질 드 레를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바로 오늘처럼.


아, 이제까지 왜 몰랐을까. 가장 가까이에 있었는데. 이제 보니 너야 말로 잔 다르크를 가장 많이 닮았구나.


시녀 아뇨, 잔 다르크가 저를 닮은 거예요.


(시체를 가리키며) 내가 저 놈을 닮은 것처럼?


간드러지게 웃는 시녀의 허리를 질 드 레가 껴안는다.


시녀 저도 죽이실 건가요?


아니, 오늘은 아니야. 오늘은.


시녀 그럼 내게 키스해줘요. 모든 행복한 이야기의 결말처럼. 그 다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주인공들처럼.


둘은 키스한다. 암전.


커튼콜에서도 시체는 그대로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다. 원하는 관객이 있다면 시체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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