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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질과 잔 (3)

by 곡도






자아, 잔, 기도 따위는 때려치우고 어서 이리로 와. 이 친구가 아까부터 널 기다리고 있잖아. 와서 우리의 오랜 친구와 인사를 나누도록 해. (시체의 손을 잡고 흔들며)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들끼리 회포를 좀 풀어 보잔 말이야.


난 저 자가 누군지 몰라.


아니, 넌 알고 있어.


그는 죽었어.


거봐. 넌 이 자를 잘 알잖아.


(침묵)


하하, 자아, 자, 이러지 말고 우리 기분 좀 내보자니까.


질 드 레가 축 늘어진 시체를 들어 올려 품에 껴안고는 이리저리 질질 끌며 무반주의 침묵 속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시체를 꽉 부둥켜안으며) 이 세상 어떤 남자도 이 친구보다 더 널 만족시킬 수는 없을 거야. 난 질투가 나, 잔.


내가? 아니면 죽은 자가?


모르겠어. 모르겠어. 그게 중요한가? (시체와 함께 멋지게 턴을 돌다가 나동그라진다. 질 드 레는 웃음을 터트리며 그대로 시체를 베고 눕는다.) 잔, 기억나? 예전에 우리는 전쟁터 한 가운데서 기진맥진한 채 쓰러져서는 시체를 베고 누워 빵을 나누어 먹곤 했지. 단언컨대 그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빵이었어. 아니, 그야말로 성스러운 생명의 빵이었지.


그 때마다 넌 빵과 피에 대한 저속한 농담을 지껄여대곤 했어. 신성모독적인 농담.


정말 재미있는 농담이었는데, 그렇지?


난 그런 농담에 가담하지 않았어.


그러나 넌 웃었어, 잔. 난 똑똑히 기억하는 걸.


난 기억나지 않는데.


그야 넌 네 얼굴을 볼 수 없으니까.


질 드 레는 시체를 다시 의자에 앉히고는 옷과 머리를 단정하게 만져준다.


(천진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나는 사람이 죽을 때마다 천사들이 소리 내어 웃을 거라고 생각해.


어째서?


신이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려고.


그럼 전쟁이라도 터지면 신은 천사들의 웃음소리 때문에 귀가 멀겠군.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 건지도 몰라. 신이 우리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전쟁이 100년이나 계속되었는데, 그걸로는 부족했을까? 우리는 전쟁터에서 태어나 전쟁터에서 죽어간 세대들의 아이들이지. 우리의 부모는 살인자들이었고 동시에 살해당한 자들이었어.


그래, 우리는 텅 빈 도살장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돼지새끼들이야. 우리의 부모는 도살되는 와중에도 떡을 치고 새끼를 낳았어. 우리는 도살된 부모들의 피와 고기를 먹고 살아남았지.


그 피와 고기가 우리를 살찌웠어.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그리고 신에 대한 믿음도.


그리고 악마에게 진 빚도.


우린 모두 어느 정도는 미쳐 있었고 미쳐야만 견딜 수 있었어.


하지만 그건 그 나름의 미학이 있었어. 그렇지? 일종의 숭고함 말이야. 그렇지?


이제 전쟁은 끝났어, 질.


세상에. 주님, 도와주소서.


이제 평화가 왔어.


침묵이 온거지.


그래, 이제 우리는 평화에게, 침묵에게,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져야만 해.


쳇, 나같은 도살자는 더 이상 쓸모없어졌다는 거군.


더 이상 누군가를 죽이거나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영웅적인 죽음이 아니라 나약한 죽음에 익숙해져야한다는 말이겠지.


생존이 아니라 삶에 익숙해지라는 거야.


삶에 무엇이 있기에?


노동과 인내, 그리고 질서가 있지.


아이구, 구질구질해라. 그거야 말로 실낙원이군.


그래도 이제는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잖아.


잔, 넌 뭘 단단히 잘못알고 있구나. 전쟁이 끝났다 해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 애초에 죽음을 상대로 벌인 전쟁이었으니까. 평화라고? 악마의 계약서에서나 쓰이는 간교한 단어 같으니. 평화란 아무 저항 없이 순순히 죽음의 제물이 되는 일이야. 돈에 팔려온 새색시의 첫날밤처럼 벌거벗은 채 얌전히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일이란 말이야. 죽음은 평화롭게 우리를 덮칠 거고, 아무도 불평하지 않을 거고,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거야. 더 이상의 불멸도 부활도 없는 거지.


너의 그 ‘실험’이라는 게 바로 그런 거니? 죽음을 상대로 너만의 전쟁을 계속 하는 것?


뭐, 그렇게 거창하게 표현한다면야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


죽음을 없애버리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이런 이런, 잔, (시체를 달래며) 우리 친구를 너무 겁주지 마. 네가 떠난 후로 지금 나에게는 유일한 친구니까 말이야. 이 친구를 두고 맹세하건데, 나는 죽음을 없애려는 게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목소리를 낮추고) 나는 죽음을 길들이려고 하는 거야.


길들인다고?


그래, 마치 늑대를 길들여서 개로 만드는 것처럼. 그리고 그 개는 주인이 죽은 후에 그 뼈다귀를 파먹지. 그렇게 개와 인간은 서로를 길들이는 거야. (시체를 껴안고 다정하게 강아지처럼 어른다.)


세상에, 참 잘 어울리는 한쌍이로군.


쯔쯔, 질투하지 마, 잔.


질투? 내가 왜 질투를 하겠어. 너에게 죽음을 길들이는 힘이 있다면 나에게는 생명을 길들이는 힘이 있는데.


생명을 길들인다고?


난 아이를 낳을 수 있잖아.


(이빨을 갈며) 아하, 그렇군. 그래, 맞아. 여자들은 아이를 낳음으로서 생명을 길들이지. 그리고는 그 생명을 아낌없이 죽음에게 먹이로 던져주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냐고? 자신이 낳은 아이가 결국 죽게 될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싸지르는 여자들을 봐. 접시가 비면 얼른 따끈한 음식을 채워주듯이 누군가 죽으면 얼른 애를 낳아 그 빈자리를 메꿔주지. 그래서 신도 죽음도 계속 연명할 수 있는 거야. 여자들은 정말 대단하다니까. 어떤 살인자보다도 담대하고 냉담해. 어쩌면 신이야 말로 진정 여자가 아닌가. 낳아라. 그럼 죽으리라. 무슨 상관이람. 알아서 작동하는 성스러운 자궁, 자급자족하는 변변한 구멍, 24시간 상품을 찍어내는 죽음의 공장이 있는데. 하, 무엇보다 공짜란 말이지.


질, 애는 여자 혼자서 가지는 게 아니잖아.


쳇, 여자들은 자신이 유리할 땐 마치 성령으로 임신한 성모 마리아처럼 굴면서 자신이 불리해지면 강간당해 아이를 임신한 밧세바처럼 군다니까.


어쩌면 그 모두가 사실이니까.


하, 모성이 그토록 무시무시한 이유를 알겠군.


맞아. 정말 무시무시하지. 아이를 낳는 건 여자 그 이상의 일이면서 동시에 여자 그 이하의 일이거든. 그건 말하자면, 지극히 비인간적인 일이야. 어떻게 하나의 인격이 자신의 자궁에서 벌어지는 그 무시무시한 신비를 견뎌낼 수 있는지 모르겠어. 어쩌면 성모 마리아의 기적이란 처녀 임신이 아니라 임신 그 자체일 거야.


이것 보라지. 여자들은 자신의 자궁을 타자화하면서 동시에 신격화 하는 기발한 재주가 있다니까. 하지만 여자들은 좀 더 자신의 자궁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야만 해.


하지만 자궁은 혐오스러운 걸.


(웃음을 터트린다.)


남자들은 자신의 성기가 혐오스럽지 않은가봐?


물론 남자들도 자신의 좆을 혐오해. 다만 내 좆이 나를 더 혐오할 뿐이지.


아, 남자들은 자신의 성기를 타자화하면서 동시에 인격화하는 기발한 재주가 있지. 그렇게 해야만 남자로서의 존엄이 지켜진다고 믿는 모양이야.


그래, 마치 여자들이 애를 가지면 자신이 뭐라도 된 것처럼 기고만장해지는 것처럼.


넌 여자를 몰라, 질.


아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우리는 모두 여자의 자식들이니까. 성모 마리아와 가축 사이에서 주저앉아버린 여자들의 자식.


대체 그 때 남자들은 뭘 하고 있었지?


보시다시피 여자들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었지. 건설과 파괴와 살인.


하지만 나를 봐. 이제 여자들도 잘 할 수 있다는 걸 내가 보여줬잖아. 건설과 파괴와 살인.


그래, 여자들은 점점 더 욕심이 많아지고 있어. 아이를 낳는 것도 모자라 직접 아이를 죽이고 싶어 하지. 심지어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기조차 말이야. 그것 역시 여자 그 이상의 일이고 동시에 여자 그 이하의 일이 아닌가. 전능하기도 해라. 예전에는 아이를 가짐으로서 자신이 여자임을 증명했는데, 이제는 낙태를 함으로서 자신이 여자임을 증명해.


여자가 왜 자신이 여자임을 증명해야 하지?


말장난 하지 마, 잔. 사람은 별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매달린다는 걸 너도 알잖아. 네가 스스로 잔 다르크임을 증명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처럼, 내가 스스로 질 드 레임을 증명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그런 이름보다도 더 강력한 저주가 성별이라는 걸 모르겠니. 심지어 자신의 이름마저 잊어버린 죽은 영혼들도 성별에 따라 정숙하게 치마나 바지를 입고 나타난단 말이야.


하지만 보다시피 난 바지를 입었어. 난 나의 여성성을 부정함으로써 잔 다르크가 될 수 있었어.


아니, 네가 ‘잔 다르크’가 될 수 있었던 건 여자임을 부정했기 때문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너희들 누구보다 뛰어났는걸.


그래, 그건 사실이지. 그러나 우리가 잔 다르크를 따른 건 네가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네가 ‘남자’보다 뛰어난 ‘여자’였기 때문이야.


오를레앙의 성처녀.


우린 그것을 공경했고 또 그것을 이용했어.


오를레앙의 마녀.


그리고 그것을 죽여야 했지.


부당해.


그래, 눈과 코와 입만큼이나 부당하지.


억울해.


태어났다면 그런 소린 말아야 해.


나는 최선을 다 했는데.


누구나 그렇지. 누구나. 우리 중에 가장 시시한 인간까지도.


(정색을 하며) 아니, 아니야. 잔 다르크는 달라. 여자들이 끊임없이 애를 낳고 남자들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동안, 그녀는 홀로 떨쳐 일어나 어느 여자도 어느 남자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어.


(침울하게) 그래. 백 년의 전쟁을 끝냈지.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고서.


제단의 화형대 위에서.


수많은 생명을 구하고


나를 실업자로 만들었어.


잔 다르크의 유령이 치마를 입고 있을지 바지를 입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머리 위에는 언제나 황금빛 휘광이 반짝일 거야.


그리고 나는 여기 축축한 시궁창에 영원히 처박혀 있을테고.


두 사람 잠시 침묵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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