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질 – 질 드 레
잔 – 잔 다르크
시녀 – 질 드 레의 시녀 (잔 다르크와 시녀는 일인이역이다.)
시체
텅 비어있는 무대 왼편으로 낡은 탁자와 등받이가 높은 의자가 보인다. 탁자 위에는 물이 들어 있는 대야와 수건이 놓여있다. 층고가 높은 무대 정면 뒤편은 층계가 미로처럼 얼기설기 얽혀 있는 하얀 벽이다. 층계로 이어지는 벽 오른쪽 꼭대기에 문이 하나 있다.
어둠이 밝아지고 무대가 들어난다. 정적이 흐르고, 잠시 후 오른쪽 무대에서 질 드 레가 하얀색 옷이 피로 붉게 물든 시체 하나를 천천히 끌면서 나온다. 무대 바닥에는 시체를 따라 붉은 색 자국이 이어진다. 질 드 레는 지치고 늙고 험악한 얼굴로 시체를 끌며 무대 중앙으로 걸어와 시체를 앞에 놓고 관객들을 향해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침묵의 비명을 지르며 피에 젖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면서 앞으로 몸을 웅크린다. 동시에 뒷벽에는 질 드 레의 얼굴이 벽에 꽉 차도록 크게 확대된 채 느린 속도로 재생된다. (질 드 레가 무릎을 꿇는 순간 실시간 영상도 시작하지만 영상의 재생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현실과는 점차 시간차가 벌어져서 그것은 실시간 영상임과 동시에 시간이 어긋나는 영상이 된다. 질 드 레가 웅크리고 있는 동안 영상 속 인물의 얼굴이 점점 앞으로 기울어져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영상은 사라진다.) 영상이 사라지자 질 드 레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로 걸어간다. 그는 대야의 물로 손과 얼굴에 묻은 피를 깨끗이 닦아내고 수건으로 물기를 제거한다. 그는 더 이상 늙고 지친 얼굴이 아닌 젊고 명민한 얼굴이다. 그는 의자에 앉아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수건으로 닦기 시작한다. 잠시 후 왼쪽 무대에서 시녀가 들어온다.
시녀 주인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질 손님? 희한한 일이군. 이 성에 손님이 다 찾아오다니. 외부의 발길이 끊긴지 오래되었는데.
시녀 어떻게 할까요?
질 뭐, 손님은 늘 반가운 법이지. 새로운 소식과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오거든. 들어오시라고 해.
시녀 알겠습니다.
시녀는 돌아서서 나가려다가 무대 한 가운 데 놓인 시체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춘다.
질 아, 그러고 보니 너와 아는 놈이었지?
시녀 네.
질 한 때 꽤나 가까웠던 걸로 아는데.
시녀 서로 사랑했던 사이였어요.
질 아하, 그랬군. 어떤 놈이었지?
시녀 그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어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좋아했지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실컷 웃고 실컷 울다가 악몽이 없는 깊은 잠에 빠지곤 했어요.
질 지긋지긋한 이야기꾼. 이제 다시는 시끄럽게 떠들지 못하겠군.
시녀 그는 주인님과 비슷하게 생긴 걸 언제나 자랑으로 삼았어요.
질 (비웃으며) 그래, 그래. 누군가는 언제나 누군가를 닮게 되어있지.
시녀 이제 그가 죽었으니 사람들은 악몽을 꾸게 되겠군요.
질 그동안 밀린 몫까지 모두 치르려면 잠을 더 많이 자야 할 거야.
시녀 치워드릴까요?
질 아니야, 두고 가. 난 저 놈이랑 재미를 좀 더 봐야겠으니까.
시녀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왼쪽 무대로 나간다. 잠시 후 층계로 이어지는 벽 오른쪽 꼭대기 문에서 잔 다르크가 나타난다. 그녀는 가벼운 남장 차림에 허리에는 칼을 차고 있다. (잔 다르크는 질 드 레와 대화하면서 점점 층계 아래로 내려와 마지막에는 질 드 레와 무대 위에 나란히 서게 된다. 잔 다르크는 이리저리 얽혀있는 층계를 연기에 충분히 활용하도록 한다.)
잔 안녕, 질. 오랜만이야.
질 드 레가 칼을 닦던 손을 멈추고 잔 다르크를 올려다본다. 그녀는 당당하고 활기차며 소년 같은 장난기가 있다.
질 안녕, 잔. (다시 칼을 손질하며) 네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는 소문은 들었어.
잔 아, 하지만 모두 다 그걸 믿는 건 아니야. 나를 잔 다르크의 재산을 노리고 온 사기꾼 취급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뭐, 그럴 만도 하지. 불에 타 죽었다던 여자가 갑자기 살아 돌아왔으니 놀라 자빠질 수밖에.
질 그래, 다시 살아난 기분이 어때?
잔 이상해. 모든 게 달라졌어. 고작 몇 년 사이에 나는 마치 내가 모르는 어느 낯선 시대로 뚝 떨어진 것만 같아.
질 그게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나는 언제나 그런데.
잔 어때, 질? 너도 내가 정말 죽었다고 생각했어?
질 (잠시 침묵) 그래,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 루앙의 광장에서 화형을 당했다는 공식적인 발표가 있었으니까.
잔 공식적으로는 그렇지.
질 죽음은 언제나 공식적이지. 우리가 죽음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그것뿐이야.
잔 누군가 죽었다고 믿는 것.
질 (칼을 허리에 차며)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네 죽음을 믿지 않더군. 위대한 잔 다르크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을 리 없다고 말이야. 네게 사형 판결을 내렸던 주교 코숑이 널 몰래 빼돌렸다는 얘기도 있고, 도팽이 뒷거래로 널 프랑스로 데려왔다는 얘기도 있고, 뭐, 감옥 문이 저절로 열리더니 천사들이 너를 호위해서 탈출시켰다는 얘기까지, 여러 소문들이 무성했지.
잔 휘이, 대단한 얘기들이네. 황공할 지경인데?
질 그리고는 너 대신 다른 여자를 불에 태웠다고 하더군.
잔 그래, 그건 사실이야.
질 그럼 불에 타 죽은 그 여자는 누구였지?
잔 잔 다르크인 누군가였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여자.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잔 다르크라고 부르자 자신이 정말 잔 다르크인 줄 알고 기꺼이 죽음을 맞았던 순진하고 불쌍한 여자. 아니, 아니지.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잔 다르크였으니 그 여자야 말로 ‘잔 다르크’라는 연극의 진짜 주인공인지도 몰라.
질 그럼 그 여자는 행복하게 죽었겠군. 자신이 이름도 없는 시시한 촌부가 아니라 그 유명한 잔 다르크라고 믿었으니 말이야. 죽음조차 황홀했겠지.
잔 꼭 그렇진 않아. 산 채로 불에 타죽는 게 그렇게 황홀한 일은 아니니까.
질 하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
잔 정말 그럴까? (진저리를 치며)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나무가 필요하던지.
질 그들은 단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라도 이 지구 전체에 불을 지를 거야.
잔 정말이지 너무 소모적이야.
질 나무가? 아니면 생명이? 어쨌든 둘 다 차고 넘칠 만큼 많으니까.
잔 어쩜 그렇게 잔인할까.
질 난 열정적이라고 생각하는 데.
잔 불경해.
질 천만해. 오히려 난 그게 예의라고 생각해. 어차피 죽일 거라면 최선을 다 해 최대한으로 죽여주는 것. 어차피 죽을 거라면 최선을 다 해 최대한으로 죽어주는 것.
잔 하지만 그건 ‘최선을 다 한 최대의 죽음’조차 넘어 서는 일이야, 질. 도저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일이란 말이야. 뼛속의 골수를 끓어 넘치게 하는 맹렬한 열기. 피와 살덩어리가 반죽처럼 뒤엉키며 타들어가는 역겨운 냄새. 아무도 듣지 않는 걸 뻔히 알면서도 지르고 또 내지르는 비명. (귀를 막으며)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재도 깨끗이 치워지고, 고기 탄 냄새까지 말끔히 사라진 후에도 루앙 광장에는 그녀의 비명소리가 가득해.
질 하, 멋진데. 고통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녀의 죽음을 연구하면 되겠군.
잔 질, 내가 여기에 온 건 바로 그 때문이야.
질 고통 말이야?
잔 아니, 그 ‘연구’ 말이야.
질 하, 무슨 말이지 모르겠군.
잔 질, 프랑스로 돌아온 후 난 조용히 숨어 살고 있었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거든. 신분도 바꾸고 이름도 바꿨어.
질 그럼 넌 지금 누구지?
잔 ‘데 자르무아르 부인’이지.
질 (발작적으로 웃으며) 하하, ‘데 자르무아르 부인’이라고? 네가 결혼이라도 했다는 거야?
잔 그래, 공식적으로는.
질 너는 처녀성을 지키기로 신께 맹세하지 않았던가?
잔 질, 성처녀 잔 다르크는 공식적으로 죽었다는 걸 잊지 마. 무엇보다 더 이상 이 세상은 잔 다르크를 필요로 하지 않아. 잔 다르크의 부활은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불필요하기 때문에 부당한 거야. 그러니 이제 난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지.
질 또 다른 옷, 또 다른 이름, 또 다른 연극?
잔 그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행운이야.
질 오직 배우들이만이 가능하지.
잔 그리고 범죄자들도.
질 그런데 지금 그 복장은 뭐야? ‘데 자르무아르 부인’ 답지가 않은데?
잔 옛추억을 기념하기 위해서야, 질. 혹시 네가 나를 못 알아볼지도 모르니까.
질 네가 어떤 복장을 하든, 다른 어떤 사람이 되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내가 널 못 알아 볼 리 없어.
잔 (침묵)
질 (명랑하게) 뭐, 어쨌거나 나는 네가 남자 복장을 하고 있는 게 더 좋아.
잔 왜?
질 모욕적이거든.
잔 누구에게 모욕적이지?
질 신에게. 남자에게. 그리고 여자에게도.
잔 저런, 그렇다면 다음에는 치마를 입고 나타나야 겠군.
질 ‘데 자르무아르 부인’으로 납시겠단 말씀인가요, 마담?
잔 원하신다면요, 무슈 (배우처럼 치마를 넓게 펴서 인사하는 시늉을 한다.)
질 (박수를 치고 추파를 보내며) 브라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