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우스꽝스럽게 여자 흉내를 내며) 헤헤, 내 유령은 분명 치마를 입고 있을 거야. 레이스와 리본과 진주가 주렁주렁 달린 커다란 순백의 드레스 말이야. (시체에게 다가가며) 그리고 난 이 친구와 결혼하겠어. 아, 남자답고 잘 생긴 그이. 우린 이 곳에 신방을 차릴 거야. 우리의 첫날밤은 정말 굉장하겠지. 치마 밑이고 바지 속이고 텅 비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무슨 상관이람. 우리가 이렇게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데. (질 드 레가 강하게 포옹하듯 시체의 목에 팔을 감고 목을 조른다.)
잔 그를 놓아줘, 질.
질 안 돼. 그는 나의 것이야. 내 거야. (어린아이처럼 우악스럽게 시체를 움켜잡는다.)
잔 그는 주님의 것이야.
질 주님의 것이라고? 그가 우리에게 뭘 해줬기에?
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지.
질 잔, 제발 그 헛소리 좀 그만 둬.
잔 헛소리라고?
질 쉬이이, 잔, 괜찮아. 괜히 그럴 척 할 필요 없어. 특히 내 앞에서는 말이야.
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의 믿음은 예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어.
질 그래? 그럼 여전히 그가 네게 말씀을 주시니?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꼬치꼬치 잔소리도 하고?
잔 아니, 신은 더 이상 내게 아무 말씀도 해주지 않아.
질 어째서?
잔 나는 더 이상 잔 다르크가 아니니까.
질 (분노하며) 그래, 잔 다르크는 신께서 손수 불태워 죽이셨지. 머리를 천하게 박박 밀고, 새하얀 종이 고깔을 씌워서 조롱하고, 예수님 예수님 목 놓아 부르는 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불구덩이에 처넣었어. 하나도 남김없이 새까맣게 타버릴 때까지.
잔 질, 그 때 타버린 건 잔 다르크가 아니야. 단지 그녀의 육신과 숙명, 그리고 번뇌일 뿐이지.
질 그럼 잔 다르크는 어디 있지?
잔 여기 있잖아.
질 그래?
잔 그래.
질 그래?
잔 그래.
질 (침묵한다)
잔 신께서 나를 너에게 보내신 거야.
질 (박장대소하며) 오, 신께서 너를 도팽에게 보내신 것처럼 말이지? (우스꽝스럽고 거창하게 흉내 내며) 히히, 양치기 소녀여, 가서 이 전쟁을 끝내고 프랑스를 구하라-
잔 그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대충 그것과 비슷했지.
질 잔, 잔. 너의 신은 정말로 한가하구나. 신이 인간의 전쟁에 끼어들어 프랑스 편을 들었단 말이지. 그리고는 고작 시골 소녀 하나를 보내 자신의 뜻을 이루려 했다고. 하하, 신이란 그토록 찌질하고 편파적인 것이냐.
잔 신의 음성을 듣지 못한 자들이나 그것을 의심하고 평론하고 주석을 달고 또 그 주석에 주석을 달지.
질 잔, 넌 신에게 속은 거야. 그리고 신도 너에게 속은 거고. 그렇게 배포가 맞은 둘이서 사람들에게 거국적으로 사기를 친 거야.
잔 그런 말 하지 마. 신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프랑스가 이겼잖아.
질 그래, 프랑스가 이겼지. 위대한 프랑스 만세. 고귀한 국왕폐하 만세. 그런데 그게 백 년이나 걸렸단 말이지. 대체 신은 지난 백 년 동안 뭘 하고 있었지? 고작 프랑스를 이기게 하려고 그 수많은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을 뒤져버리게 했나? 그렇게 싸그리 개죽음을 당하게 해야 했어? 그 살인에 대한 욕구는 누구의 것이지? 피에 대한 갈증은 누구의 것이야? 신인가? 아니면 너야? 아니면 나인가?
잔 질, 어리석게 굴지 마. 사람은 태어나고 또 죽어. 그 허무함은 피할 수 없는 일이야. 중요한 건 그것을 성스럽게 만드는 거야. 신비를 부여하고 의미를 설명하는 것. 거대한 흐름과 장대한 풍경을 만드는 것. 바로 역사가 되는 거지. 그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더 강렬하게 살고 더 강렬하게 죽을 수 있어. 서랍 속의 양초는 그저 그대로도 충분하고 완전하지만 불을 붙이면 환하게 타오르며 주변에 빛과 그림자를 드리우지. 우리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신이 만든 세계가 대단하다 해도 인간이 만드는 빛과 그림자가 없다면 색종이를 오려붙인 그림에 불과할 거야. 자기 이상의 자신이 되는 것, 숙명 이상의 운명이 되는 것, 사망 이상의 죽음이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이고 영원함이야. 신이 인간에게 바라는 건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인간이 신에게 바라는 것도 마찬가지고.
질 악취미로군. 정말 고약해.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살과 기름을 녹여서 만든 양초로 밝히는 아름답고 영원한 빛이라니.
잔 그 빛이 수많은 태양처럼 이 세계를 비추고 있어.
질 우린 모두 촛불로 뛰어드는 불나방이란 말이지.
잔 인간에게는 그런 순간이 필요해. 그런 한 순간이.
질 (울적하게) 그래, 알고 있어. 나도 한 때 열렬히 그걸 바랬었지. 높고 위대하게 빛나는 빛.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수많은 촛불에서 흘러나온 거대한 촛농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어.
잔 넌 익사하고 있어, 질
질 난 너를 따라잡으려고 했을 뿐이야. 하지만 언제나 뒤로 쳐지고 말았지.
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늘 잔 다르크를 따라잡으려고 아등바등 했지. 하지만 잔 다르크는 언제나 저 멀리 앞서가곤 했어.
질 넌 그걸 위해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어.
잔 그래도 제법 그럴싸했잖아. 안 그래?
질 그래, 넌 정말 그럴싸했어. 그럴 듯한 이야기가 되었지. 잔, 나도 너처럼 되고 싶어. 마치 싸구려 납덩어리가 순수한 금이 되듯이, 그렇게 위대하거나 그렇게 끔찍한 누군가가.
잔 넌 그걸 위해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어.
질 그래도 제법 그럴싸했잖아. 안 그래?
잔 그래, 넌 정말 그럴싸했어.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신 앞에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도록 해.
질 그럼 신께서 나를 용서해 주실까?
잔 물론이지.
질 너무나 커다란 죄를 지었는데.
잔 더 큰 죄일수록 더 큰 용서를 주실거야.
질 아니야, 그렇지 않아. 신조차도 내가 싫고 역겨워서 고개를 돌릴 거야.
잔 포기하지마. 우리는 죄를 저지르고, 고통 받고, 절망하고, 후회하고, 용서받으면서, 고결해지는 거야.
진 개소리하고 있네. 우린 그냥 늙어갈 뿐이야.
잔 너는 익사하고 있어, 질.
두 사람 잠시 침묵한다.
질 (다시 기운을 차리며) 흥, 신은 못 말리는 참견장이야. 남녀의 성기가 들락날락하는 곳에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축복을 내리지. 그러니 남자는 조루가 되고 여자는 불감증에 걸릴 수밖에. 그런데도 진짜 중요한 순간에는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침묵을 지키거든. (관객들을 바라보며) 바로 여기 이곳처럼.
잔 다르크도 관객들을 바라본다.
질 잔, 네가 왜 지금 여기 있는 줄 알아? 여기서 나는 기다렸어. 너를. 아주 오랫동안. 침묵 속에서. 끊임없이 너를 부르고 또 불렀지. 그래서 네가 내게로 온 거야.
잔 나는 내 의지로 여기에 왔어.
질 아, 자유 의지란 언제나 소속도 주어도 불분명하지.
잔 나의 의지는 나의 것이야.
질 그럼 신은?
잔 신이 나의 육신과 영혼을 만드셨지만 나의 의지만큼은 온전히 내게 맡기셨어. 그래서 그는 나에게 직접 말을 걸어야만 했던 거야. 아주 동등한 타인처럼.
질 하하, 너의 그 교만함. 교만함은 신마저도 타락시키지. 네가 왜 화형을 당했는지 깜빡 잊고 있었구나. 신의 수염을 잡고 기어올라 상투 머리 꼭대기에서 놀려고 하는 이 마녀.
잔 나는 신 앞에서 항상 겸손했어.
질 아니, 너는 겸손한 게 아니라 겸손한 역할에 충실했던 것뿐이야. 마치 시종 역할의 주인공이 왕 역할의 엑스트라 앞에서 굽실거리는 것처럼. 너는 너무 교만해서 신이 되는 것조차 성에 차지 않았지. 넌 그 이상을 원했어.
잔 대체 그 이상이 뭔데?
질 바로 ‘인간’이 되는 거지.
잔 뭐라고? 우리가 인간이 아닌가?
질 아니지, 우리는 인간이 아니야. 결코 실존한 적이 없으니까. 우리는 그저 꿈이고, 그림자이고, 이름이야.
잔 어디에서 온 꿈이고, 무엇의 그림자이고, 누구의 이름이지? 신인가?
질 아니. 신은 인간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신인 거야. 예수조차도 성공하지 못했지. 사람들이 인간이 되려던 예수를 어떻게 했는지 봐.
잔 하지만 그는 부활했어.
질 하, 그랬다고들 하지. 바로 데 자르무아르 부인이 된 너처럼 말이지.
잔 아니, 예수는 예수로 부활했어.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지.
질 하지만 사실일까?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조차 못했어.
잔 하지만 결국에는 믿었지.
질 그래, 어째서였지?
잔 제자들이 그를 예수로 인정했기 때문이야.
질 아, 그래, 그랬지. (잠시 침묵) 그래, 이제야 알겠군. 왜 네가 나를 찾아왔는지 말이야.
잔 (침묵)
질 잔, 넌 다시 잔 다르크가 되고 싶은 거지?
둘은 서로를 바라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