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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질과 잔 (2)

by 곡도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진짜 누군가의 부인이 될 수 있겠지. 예쁜 아이도 가질 수 있고.


아이라고? 하, 성처녀가 아이를 낳겠다고? 처음에는 예수가 되고 싶어 하더니 이제 성모 마리아까지 되려고 하는 구나. 잔, 넌 정말 욕심이 많아.


난 그저 엄마가 되는 것 역시 나라를 구하는 것만큼이나 대단한 모험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것뿐이야.


이런 이런, 잔, 인간이 하는 일 중 애를 싸지르는 게 가장 흔하고 쉬운 일이라는 걸 모르니. 사람들은 마치 애를 낳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당연하게 애를 쏟아내지. 하지만 전쟁터에서 돈 몇 푼과 알량한 애국심에 개죽음 당해 나뒹굴던 수많은 사람들과 그 어머니들을 생각해 봐. 결국 썩어 문드러지기 위해 태어난 그 웃음과 이빨들을 생각해 보라고. (외설적인 몸짓을 하며) 자지에 좆을 넣고 흔들기만 하면 태어나는 날조된 영혼들. 갑자기 세상에 우겨넣어지고 영문도 모른 채 버둥대다가 결국 깨끗이 지워져버리고야 마는 수많은 이름들.


질, 진정해. 그저 생각만 한 번 해봤다는 거야. 난 아직 신께 했던 맹세를 저버리지 않았어.


하, ‘아직’이라고? 그렇다면 넌 이미 맹세를 저버린 거나 다름없어.


난 살아남았으니까, 질. 살아있다면 결국 맹세는 저버리게 되는 거야.


그래,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매일 하는 짓이지. (진정하기 위해 두 손을 비비며) 자아, 그래서, 우리 조신하신 ‘데 자르무아르 부인’께서 남장까지 하시고 이 누추한 곳에는 무슨 볼일이신가?


너에 대한 소문을 들었어, 질. 나의 옛 친구가 어떤 위험한 ‘연구’에 빠져 있다고 말이야. 그게 결국 그의 목숨까지 위협하게 될 거라고. 나는 그게 사실인지 확인해야만 했어.


흐흥, 어떤 소문이길래?


정말이지 끔찍한 소문이었어.


(반색하며) 정말 대단하지, 그렇지?


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


그 소문을 들었을 때 어땠나? 놀랐나? 응?


물론이지. 난 온몸이 떨렸어.


어떤 놀람이었지? 역겨움이었나? 두려움이이었나? 아니면 기쁨이었어?


기쁨이라니?


잔, 넌 자신을 속이려 하는 구나. 하긴 그게 나를 속이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지.


무슨 뜻이지?


하하, 배우가 역할을 바꾸듯 그렇게 뚝딱이라고? 어제는 ‘잔 다르크’였다가 오늘은 ‘데 자르무아르 부인’이란 말이지? 얼굴에 백합 향기가 나는 고운 분을 바르고, 얇은 공단 드레스를 부드러운 몸뚱이에 휘감고, 습관인 것처럼 머릿결을 흔들며 남자에게 교태를 부리시겠다? 개수작하지 마, 잔. 사람은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아. 우리는 언제나 내일은 다른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며 잠이 들지만 늘 한 치도 다름없는 똑같은 사람으로 침대에서 깨어나지. 사람들은 자신이 배우라며 자조적으로 떠들어대지만 그건 진짜 배우가 될 수 없음에 대한 무기력한 한탄일 뿐이야.


질, 나는 그저 네가 걱정이 된 것 뿐이야.


이런 이런. 잔, 너는 남을 걱정하는 인간이 아니야.


뭐라고? 마치 날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얘기하는 구나.


그럴 리가. 나는 널 잘 알아. 네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너에 대해 잘 알고 있어. 왜 너는 내 소문을 듣자마자 치마와 스타킹과 레이스를 벗어 던지고 바지를 입고 칼을 차고서 그 먼 길을 달려왔을까. 정말 내가 걱정돼서였을까? 아니면, 시시한 여염집 여편네 취급당하는 게 벌써 지긋지긋해졌나? 집에 틀어박혀 닭털을 뽑고, 청소를 하고, 양파를 다지고, 걸레를 빨고, 실을 뽑고, 바느질이나 하는 게 역겨워진 거 아니야?


넌 정말 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구나. 난 원래 그렇게 살았는 걸. 닭털을 뽑고, 청소를 하고, 양파를 다지고, 걸레를 빨고, 실을 뽑고, 바느질을 하면서. ‘잔 다르크’가 되기 전에 말이야.


아하, 동레미 촌구석의 그 작은 계집애.


그래, 동레미 촌구석의 그 작은 계집애.


그 계집애가 프랑스를 구할지 누가 알았겠어.


오직 신만이 아셨을 거야.


신은 아무 것도 몰라. 그는 장님에 귀머거리에 벙어리야. 그런 신을 네가 부추겨서 그 전쟁에 끌어들였지.


도무지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군.


아니, 너는 알고 있어, 잔.


잠시 두 사람은 마주 본다.


(갑자기 활기를 띄며) 그래, 여기 우리 옛친구를 만나보겠어? 그럼 모든 게 다 기억 날 테니까.


질 드 레가 의자를 무대 중앙에 놓고 그 위에 시체를 앉힌다. 그리고 시체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고 머리도 매만져주고는 “이렇게 더러워서야 숙녀 앞에서 예의가 아니지” 따위의 말을 혼자 중얼거리며 수건으로 시체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준다. 잔 다르크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피에 젖은 수건을 두 손으로 넓게 펴 보이며) 피 냄새가 그리웠니, 잔?


(침묵한다)


난 알아. 너는 타고난 군인이었다는 걸. 훌륭한 군인이었지. 아니, 단순한 군인 그 이상이었어. 전쟁터로 달려가는 네 얼굴에서 성스러운 광채가 빛난다고 사람들은 말했지만, 나는 그것이 살인자의 흥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벽 위로 전쟁의 영상이 드리운다. 영상은 조각나 있고 해체되어 있으며 노이즈가 심하고 서정적이다. 두 사람은 홀린 듯이 무대 정면을 바라본다.


아, 네가 전쟁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우리가 전쟁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곳은 신이 부재하는 유일한 곳이었지. 그곳에서 우리는 무신론자였고, 고아였고, 시대도, 고향도, 계급도, 나이도, 성별도 없는, 그저 한 명의 인간이었어.


벌거벗은 한 명의 인간.


우리는 인간을 죽였고 또 인간에게 죽었어.


온 힘을 다해서. 죽을 힘을 다 해서.


산자도 죽은 자도 서로에게 아무런 유감이 없었지.


그저 살아있는 자와 살아있었던 자일뿐.


그저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일뿐.


우리는 자유로웠어.


그래, 우리는 자유롭게 추락했어.


영원히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은 절망.


그리고 언제나 살아남는 전능과 불멸의 놀라움.


부활의 새아침.


우리는 죽은 자들을 마음껏 조롱했지.


마치 그들이 한심해서 죽었다는 듯이.


우리는 웃었어.


저절로 웃음이 나왔지.


아아, 그것은 정말이지 좋은 시절이었어, 잔. 그렇지 않니?


(침묵)


영상이 사라진다.


(정신을 차리며) 하지만 난 최대한 살인은 피하려고 노력했어.


그래, 그랬지. 불타오르는 아궁이 속에서 포도주가 끓어 넘치듯 모두가 자기 자신마저 잊어버리고 날 뛸 때에도, 넌 언제나 네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넌 침착했어. 그리고 기다렸어. 그리고 죽일 수 있을 때는 반드시 죽였어. 아무런 망설임도 어떤 죄의식도 없이. 살아야 하는 자는 살아야 하고 죽어야 하는 자는 죽어야 한다는 듯이. 그래, 그것이야 말로 신의 공정과 정의가 아닌가. 마치 잠자리에서 일어나 깨끗한 물로 얼굴을 닦아내듯 뜨거운 피로 얼굴을 닦아내던 너의 모습. 잔, 네가 피로 씻어낸 건 우리 모두의 죄였어.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 저의 죄를 용서하세요.


하하, 이제 와서 그 모든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진정 기독교인답구나.


(하늘을 바라보며) 저는 오직 당신의 뜻을 따르려 했습니다.


신의 뜻? 잔, 그는 미치광이야. 신은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했지만 정작 살인하면 용서해 줬어. 살인을 정당화 하고, 전쟁을 부추기고, 동시에 양쪽 편을 들고, 살육을 묵인하고, 손뼉을 치면서 구경하고, 그리고는 또 모두를 용서해 줬지. 자신의 이름으로 성스럽게. 그래서 세상에는 살인자인 성자와 살인자인 성녀들이 넘쳐나게 된 거야. 바로 너처럼. 잔,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세상이지? 대체 이게 어떻게 생겨먹은 신이야?


(하늘을 바라보며) 때때로 당신의 의지는 이해할 수 없고, 당신의 자비는 잔인하며, 당신의 정의는 가혹하지요.


하, 마치 너 같군 그래. 둘은 정말 똑같아. 그래서 둘이 붙어먹은 거겠지.


(하늘을 바라보며)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부디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잔, 순진한척 하며 상대방을 방심시키려고 하는 그 계집애 같은 수작은 제발 그만 둬. 네가 내 소문을 듣고 겁을 먹었다고? 우후, 소름이 끼치고 몸이 떨렸다고? 이런 거짓말쟁이. 오히려 후끈 몸이 달아올랐겠지. 텅 빈 치마 밑으로 불어 들어오는 찬바람에 오금이 저렸겠지. 한 달에 한 번 속옷을 적시는 피만으로는 감질 맛이 나서 견딜 수 없었을 거야. 그래서 한 달음에 이리로 달려온 거지. 칼을 뽑아 들고서. 칼을.


(하늘을 바라보며) 아멘.


(시체의 등 뒤로 다가가 시체의 양어깨를 짚고 시체를 내려다보며) 아멘. 나도 사람을 죽이기 전에 언제나 그렇게 말하곤 하지. (시체의 귀에 대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 (그리고 시체의 목을 베는 시늉을 한다) 하지만 신은 한 번도 나를 막은 적이 없었어. 단 한 번도.


(침묵)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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