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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Nov 08. 2024

[희곡] 채식, 주의, 자 (4)




남편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말 잘 만난 것 같습니다. 아, 마음이 벅차오르네요. (감격해서 손님의 손을 다정하게 잡다가 끈적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벅차올라요. 자아, 그럼 침실은 저쪽에…….


아내   (웃음을 터트리며) 어머, 자기야, 너무 서두르지 마. 아직 초저녁이잖아. 밤은 길어.


남편   (멋쩍게 웃으며) 아아, 그래, 그렇네. 미안해. 미안해요. 내가 마음이 좀 급했나봐요.


손님   탓하지 않겠습니다. 침실이 어디인지 아까부터 궁금했으니까요.


아내   우선 우리 저녁부터 먹어요. 특별한 날이니까 맛있는 걸로 시켜먹자구요. (핸드폰을 검색하며) 자기는 뭐 먹을래?


남편   어어, 나는 비빔밥. 


아내   아유, 또 비빔밥이야? 자기 요새 계속 그것만 먹더라. 더 맛있는 거 먹어. 장어덮밥이나 갈비찜 같이 스테미너 좋은 걸로. 오늘 자기 힘 좀 써야 하는데.


남편   아니, 아냐, 비빔밥이 좋아. 오히려 힘이 너무 넘쳐나서 고사리라도 좀 먹어야 할 판이야. (손님에게) 뭐 드시겠어요?


손님   그럼 저도 같은 걸로 먹죠.


남편   좋은 선택입니다. 여기 비빔밥이 참 맛있거든요. (아내에게) 비빔밥 둘.     


     아내가 핸드폰 앱으로 음식을 주문한다. 


남편   제가 너무 서툴렀죠? 미안합니다. 조바심이 났나봐요. 노파심이 좀 많아서요. 


손님   (핸드폰을 검색하며) 노파심이란 필요 이상으로 남의 일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이군요. 왜요? 제가 중간에 도망이라도 갈까봐요?     


    손님과 남편이 함께 소리 내어 웃는다.     


남편   (돌연 정색하며) 그런데 사실이에요. 솔직히 좀 걱정이 됩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손님   걱정 마세요. 저는 어린애도 아니고 겁쟁이도 아니에요. 더구나 제가 먼저 원했던 일인데 제가 왜 도망을 가겠어요?


남편   하지만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네요. 모험이란 변덕스러운 바다만큼이나 변덕스러운 마음을 가로질러 횡단하는 일이니까요. 심연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보이는 망망한 수평선 앞에서 언제나 신속하게 다시 항구로 배를 돌리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죠. 하지만 만약 제 집 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저는 그만 크게 충격을 받고 말겁니다. 자존심에 멍이 들고 모든 용기를 잃을 거예요. 앞으로 더욱 ‘태연자약’해지겠죠. 제가 좀 소심해서요. 


아내  거기다 섬세하죠. 


손님  최악의 조합이네요.


남편  인정합니다. 


손님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마음이 놓이실까요?


남편   음, 조금 안전장치를 해두면 어떨까 싶은데요. 


손님   안전장치요? (핸드폰을 검색하며) 부주의로 인한 위험을 막기 위한 장치라.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남편   대단한 건 아닙니다. 그저 형식적인 것뿐이에요. 일종의 심리적인 거죠.


손님   말하자면 미신적인 거군요.


남편   그렇다고도 할 수 있죠.


손님   전 미신을 싫어합니다만, 뭐, 그게 도움이 된다면야 얼마든지 협조하겠습니다. 


남편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마음이 넓으세요. 그렇다면, 오늘 밤만 제가 당신의 핸드폰을 맡아둬도 될까요?


손님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 핸드폰을요?


남편   말씀드렸다시피, 대단한 건 아닙니다. 그저 형식적인 것뿐이에요. 일종의 심리적인 거죠.


아내   말하자면 미신적인 거예요.


손님   절 두렵게 하시네요. 핸드폰을 손에서 놓는 건 뇌의 일부분을 잘라내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핸드폰 없이 사람은 제대로 사람 노릇을 못할 테니까요. 진화에 역행하는 일이죠.


남편   원래 섹스란 어느 정도 진화에 역행하는 일입니다. 


아내   어느 정도 뇌의 일부를 잘라내는 일이구요. 


남편   제대로 사람 노릇을 못하도록 말입니다.


아내   네, 물론 우린 두려워해야 해요.


남편   우리는 오늘 밤 아주 그냥 최대한 진화에서 멀리 역행하고, 최대한 뇌를 많이 잘라내고, 최대한 사람 노릇을 못할 예정이니까요.  


손님   (누그러지며) 뭐,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핸드폰을 애뜻하게 바라보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이게 꼭 필요한 일이에요?


남편   (남자의 성적인 매력을 보이며) 장담하건데 저는 매우 정열적이고 과감하며 지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뭐든 최선을 다 하고 원하는 바를 꼭 이루고야 말죠. 제가 원하는 건 우리 모두가 만족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필요하죠. 


손님   네, 그렇죠. 하지만…….


아내   (여자의 성적인 매력을 보이며) 혹시 저희를 신뢰하지 못하세요?


손님   그럴리가요. 당연히 여러분을 신뢰합니다. 여러분은 제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멋진 분들인걸요. 전 벌써 두 분이 제 친한 친구처럼 여겨집니다. 


남편   그럼 문제없잖아요? 


손님  문제는 저에게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일종의 강박 같은 게 있어서요.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단어가 나오면 바로 핸드폰으로 뜻을 찾아보지 않고는 견디지를 못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단어가 멀리 달아나버릴 것만 같아서요. 그럼 영원히 다시는 만날 수 없죠. 


아내  저런, 분명 그건 학창시절에 영어를 배우면서 생긴 나쁜 버릇일 것예요. 모든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해괴한 언어죠. 하지만 알다시피 한국 사람에게는 사전이 필요 없거든요. 우리는 의미가 아니라 뉘앙스로 대화하니까요. 마치 개나 고양이, 새, 돌고래처럼요. 


남편   그래서 한국에서는 위대한 시인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한국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모두가 위대한 시인들이거든요.


아내   우리는 마치 무의식들이 접촉하듯이, 마치 꿈속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마치 혼잣말을 하듯, 아무런 의미나 정보 없이도 만족스럽게 대화를 나누죠.


남편   정확하게 그게 바로 오늘 밤 우리가 하려는 일입니다. 


아내   우리는 마치 무의식들이 접촉하듯이, 마치 꿈속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마치 혼잣말을 하듯, 아무런 의미나 정보 없이도 만족스럽게 대화를 나누죠. 


손님   그래요. 정말 일리 있는 말씀이에요. 누가 오르가슴이라는 단어의 뜻을 검색하면서 오르가슴을 느끼겠어요. (핸드폰을 검색하면서 오르가슴을 흉내내며) 남녀가 육체적으로 관계를 맺을 때에 쾌감이 절정에 이른 상태. 네, 좋습니다. 좋아요. (핸드폰을 흔들며) 저도 오늘 밤 이 알량한 노를 던져버리고 솟구치는 파도에 제 모든 걸 맡기겠습니다. 수평선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겠어요. 설사 그 끝이 까마득한 심연일지라도 말입니다. (핸드폰을 남편에게 던진다)


남편  (핸드폰을 흔들며) 한국인처럼, 시인처럼, 바람처럼. (핸드폰을 아내에게 던진다) 


아내  (핸드폰을 흔들며) 개나 고양이처럼, 새처럼, 돌고래처럼.       


   모두들 인디언처럼 환호한다. 아내가 손님의 핸드폰을 빅토리아의 가방에 넣는다. 


손님  휴우, 이제 저는 무인도에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남편  우리 세 사람의 무인도죠.


아내   사람들로 꽉 찬 우리의 무인도를 위해 다 함께 축배를 들어요.      


   남편과 아내가 부엌에서 술과 유리컵을 꺼내 탁자 위에 놓고 술을 따르는 동안 손님은 노래를 부른다. 남편과 아내는 마치 뮤지컬 배우들처럼 춤도 추고 중간중간 코러스도 넣는다. 

    

손님  (시카고 – All That Jazz) 

Come on, babe 다 함께 즐겨봐

And all that jazz

무릎을 세우고 스타킹 벗고서

And all that jazz

차를 타고 멋진 곳으로 가

술은 차갑고 음악은 뜨거워

밤마다 화끈하게 즐길 수 있는 곳

And all that jazz

기름칠한 머리에 버클 슈즈

And all that jazz

걸쭉한 남자가 부르스 불겠지

And all that jazz

껴안고 밤새워 춤 추자

걱정은 하지마, 진통제 줄테니

미치도록 한 번 흔들며 즐겨봐

And all that jazz

[오- 이 여자 흔들면서 춤추네]

And all that jazz

[오- 스타킹 벗겨져라 흔들어]

And all that jazz

[오- 거들을 풀어버려

오- 엄마가 놀라겠네]

딸의 춤을 보았다면

And all that jazz

Come on babe, 함께 즐겨봐

And all that jazz

[오- 이여자 흔들면서 춤추네

And all that jazz]

무릎을 세우고 스타킹 벗고서

And all that jazz

차를 타고 멋진 곳으로 가

술은 차갑고 음악은 뜨거워

[오- 거들을 풀어버려

오- 엄마가 놀라겠네]

밤마다 화끈하게 즐길 수 있는 곳

And all that jazz

[그 여자를 보았다면

And all that...]

난 누군가의 여자도 아냐

내 인생을 사랑해

And all that jazz-

That jazz!     


아내/남편  (박수를 치며) 브라보- 브라보-     


   손님이 거창하게 인사한다.      


아내  와, 너무 멋져요.


남편  세상에나, 정말 노래를 잘하시네요.


아내  뮤지컬 배우시래. 


남편  와, 어쩐지. 


아내  우리 남편도 저만큼이나 뮤지컬 팬이랍니다. 


남편  정말 대단하세요.


손님  뭘요. 아직 무명인데요.


남편  그게 어때서요. ‘아직’만큼 좋은 건 없죠. 


아내  그럼요. 가능성과 기회가 무궁무진하다는 뜻이잖아요.


손님  뭐, 저에게 아직 시간이 있는 건 사실이죠.


아내  그렇죠?


손님  그럼요. 


남편  그런가요? 


손님  물론이죠. 


아내  자신만만하군요.


남편  난 죽지 않아, 라고 말하는 것처럼요.


아내  하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건,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말이니까요. 


손님  뭐, 그것도 사실이구요.


아내  그렇죠?


손님  그럼요. 


남편  그런가요? 


손님  물론이죠. 


아내  누구나 죽기 단 1초 전까지 나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어, 라고 생각하죠. 


남편  그리고 남은 그 단 1초를, 나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어, 라고 생각하는 데 써버리구요.


아내  아직 1초가 남았네. 


남편  아직 2분의 1초가 남았네. 


아내  아직 5분의 1초가 남았네. 


남편  아직 10분의 1초가 남았네.


아내  아직 50분의 1초가 남았네.


남편  아직 100분의 1초가 남았네.


아내  아직 500분의 1초가 남았네.


남편  아직 1000분의 1초가 남았네.


아내  아직 10000분의 1초가 남았네.


남편/아내  아, 이렇게 영원히 살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아내와 남편이 웃음을 터트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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