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꼭 끊임없이 상대방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고집스러운 어린애들 같군요.
남편 맞아요. 우린 모두 고집스러운 어린애들이죠.
아내 시계를 부숴버리면 정말로 시간이 가지 않는다고 믿는 어린애들이요.
손님 바로 지금 이곳 처럼요?
세 사람은 눈동자를 굴리며 사방을 둘러본다.
손님 (술잔을 들며) 그럼 건배할까요?
남편 그래요. 그럽시다. (아내에게 술잔을 건네며) 자, 우리 건배해요.
아내 (술잔을 높이 들고) 내일 아침이 올 때까지는 영원한, 이 밤을 위하여.
모두들 위하여.
세 사람은 건배를 한 뒤 화기애애하게 탁자에 둘러앉는다. 아내와 남편이 서로에게 애정표현을 한다.
손님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두 분을 보니 정말 부럽네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건 정말 큰 행운인 것 같아요.
아내 맞아요. 감사한 일이죠.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분명 지금까지 노처녀로 늙고 있을 거예요. 노처녀 산부인과 의사라니, 정말 끔찍해요.
손님 아, 의사 선생님이시군요.
아내 뮤지컬 배우에 비하면 진부하고 고루한 직업이죠.
손님 아니, 진부하고 고루하다뇨. 새 생명의 탄생을 돕는 일인데요.
아내 그래서 진부하고 고루하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 애를 낳는 것만큼 진부하고 고루한 일이 또 있나요.
손님 에, 그래도 뭐, 수입은 좋으시잖아요?
아내 아유, 그게 언제적 얘기인데요. 베이비붐 시대에나 그랬죠. 요즘 출산율 보세요. 산부인과 의사들은 다 굶어죽게 생겼다니까요.
손님 하긴, 지금은 잘 낳는 것보다 잘 죽는 게 더 중요한 시대니까요.
아내 제 말이 바로 그 말이에요. 이럴 줄 알았으면 장의사나 하는 건데.
남편 장의사야 말로 확실한 미래 4차 산업이지.
아내 언제나 가장 현대적인 직업이야.
손님 그런데 태어나는 아이를 직접 받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정말 경이롭고 숭고하고 거룩하고, 막 그런가요?
아내 경이, 숭고, 거룩이요? 한마디로 끔찍해요.
손님 끔찍하다구요?
아내 생각해 봐요. 자신의 출산으로 인류가 구원이라도 받는 것처럼 세상 유세란 유세는 다 떠는 산모에, 내 아들과 같이 사는 여자가 내 손자를 낳는다는 사실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시부모에, 시작부터 아이의 소유권이 엄마에게 있음을 못박아두기 위해 고성방가를 멈추지 않는 산모의 친정 식구들까지 상대해야 하죠.
남편 아니, 그럼 그 때 남편은 뭐하고 있는데?
아내 남편? 애를 만들 때는 그렇게도 기고만장하더니 애를 낳을 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바로 남편이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얼이 빠져 있다가 애가 첫 울음을 터트릴 때 같이 울음을 터트릴 때에야 비로소 남편이 거기 있었다는 걸 모두가 눈치 챌 정도라니까.
남편 그래, 부모라면 우는 게 마땅하지. 자신들이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아내 사람들은 기뻐서 우는 줄 알거야.
남편 자기 스스로도 기뻐서 우는 줄 알 걸. 부모의 장례식에서 자신이 슬퍼서 우는 줄 아는 자식들처럼.
아내 이상한 일이야. 반드시 죽게 될 아이를 결국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기어이 낳아놓고는 정말로 죽을까봐 전전긍긍하는 꼴이라니.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그 가증스러움을 견디는 건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야.
손님 산부인과 의사가 적성에 잘 안맞으시나봐요.
아내 뭐,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산부인과 의사가 꼭 애를 살리는 일만 하는 건 아니니까요.
손님 그럼 또 무슨 일을 하죠?
아내 애를 죽이는 일도 하죠.
손님 애를 죽여요?
아내 낙태 말이에요.
손님 아이구, 저런. 맞아요. 그렇군요. 출산과 낙태를 돕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종종 잊어버린다니까요.
남편 출산과 낙태를 하는 당사자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도 우린 종종 잊어버리죠.
손님 정말 산부인과 의사도 쉬운 일이 아니네요.
아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최악의 일도 아니에요.
남편 모든 직업들이 다 그렇죠.
손님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죽이는 건 정말ㅡ
아내 제 숨통을 트이게 해줘요.
손님 숨통이 트인다구요?
아내 우선 경제적으로 그렇죠. 출산율은 떨어졌지만 낙태율은 떨어지지 않았거든요. 이제는 오히려 이쪽이 산부인과의 주 업무가 되어버렸어요. 낙태 수술을 하는 중간 중간 짬을 내서 애를 받아야 할 지경이라니까요. 저만 하더라도 벌써 2주 째 애를 받지 못했지만 낙태는 오늘도 두 건이나 있었는걸요.
손님 오늘두요?
남편 그래, 수술은 어땠어?
아내 하나는 6주 차 밖에 안돼서 아직 벌레나 다름없었어. 싱겁게 끝났지. 하지만 다른 하나는 5개월을 훌쩍 넘은 상태여서 나도 제법 흥분이 되더라고.
손님 흥분이요?
아내 5개월을 넘긴 태아를 수술할 수 있는 기회가 그렇게 흔한 건 아니거든요.
손님 어, 하지만 ‘흥분’이라는 단어가 과연 이 상황에 적절한 걸까요?
아내 안 될 게 있나요?
손님 죄송하지만, 제 핸드폰을 잠시만 돌려주시겠어요? 사전을 좀 찾아봐야할 것 같아서요.
남편 저런, 오늘 밤은 핸드폰을 포기하기로 했잖아요. 우리의 약속이었죠.
손님 네, 알아요. 하지만 이 단어의 뜻을 찾아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아내 흥분을요? 별로 어려운 단어도 아니잖아요?
손님 네, 그렇죠. 그런데 갑자기 너무 어렵게 느껴지네요.
남편 뭐, 정 그러시면 우리가 대신 찾아드리죠. 하지만 이게 마지막이에요. 오늘 밤 우리는 더 벗어버려야지 더 껴입어선 안되거든요.
손님 네, 네.
아내 (핸드폰을 검색하며) 어디보자. 흥분이란 어떤 자극을 받아 감정이 북받쳐 일어남.
손님 아하, 흥분이란 생각보다 꽤 중립적인 뜻이네요. 그러니까 이 상황에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네, 맞아요. 태아를 죽이는 건 무척이나 흥분되는 일이죠. 완전히 흥분되는 일이에요.
아내 그렇다니까요.
남편 그런데 태아가 5개월이 넘으면, 어떤 상태야?
아내 글쎄, 누가 알겠어. 아마도 예감으로 가득 찬 텅 빈 꿈을 꾸고 있겠지.
남편 아니, 어떤 모습이냐고. 생물학적으로 말이야.
아내 한 마디로 성별을 알 수 있어.
남편 아, 그럼 사람이라는 거구만.
아내 쉿, 그걸 사람이라고 부르면 안 돼. 이제 우리 업계에서는 태아를 사람이라고 부르는 건 금지되었거든.
남편 아니, 왜? 페미니즘 때문이야?
아내 그런 거 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어. 그저 경제논리일 뿐이지. 변화하는 소비 패턴과 시장 확장에 따라 판매자가 소비자를 지지하고 미화하고 장려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남편 아, 병원 지하실에 장례식장을 만드는 것처럼 말이지?
아내 우리가 그처럼 노골적으로 경제적일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지.
손님 그럼 산부인과에서는 태아를 뭐라고 부르죠?
아내 경우에 따라 달라요. 낳기로 결정한 태아는 ‘천사’라고 부르고, 없애버리기로 결정한 태아는 ‘종양’이라고 부르죠.
손님 지극히 미신적이네요.
아내 글쎄요. 어쩌면 태아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미신일 수도 있죠.
손님 (안절부절 못하며) 저어, 부탁인데 핸드폰으로 ‘사람’이라는 단어의 뜻 좀 찾아봐 주시겠어요?
남편 아니요. 더는 안돼요. 우리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손님 하지만 뜻이 불분명해지면 어지럽고 숨이 가빠지는 걸요. 마치 이렇게 산소가 많은데도 제 폐가 그걸 들이마시지를 못하는 것 처럼요.
아내 놀랄 일도 아니죠. 의미란 헤모글로빈 같은 거니까.
손님 그러니까, ‘사람’은 무슨 뜻이죠?
남편 그건 사전을 찾아볼 것도 없어요. 이미 답이 딱 나왔잖아요. 사람은 대충 천사와 종양 사이, 그 어디쯤일 겁니다.
아내 맞는 말이야. 사람이란 존재가 아니라 범위라는 걸 알아야 해요.
손님 역시나 지극히 미신적이군요.
아내 사실 의학만큼 미신이 판치는 곳도 없죠. 의사는 무당이고, 수술은 굿판이고, 처방전은 부적이고, 병원은 기도로 충만해요.
손님 정작 신만 빼고는 다 있는 셈이네요.
아내 신의 부재를 기념하는 교회도 있어야 하니까요.
손님 그나저나 신은 언제 죽은 거죠?
남편 그거야 뻔하잖아요. 당연히 2차 세계 대전 때죠.
손님 (고개를 끄덕이며) 네, 물론 그렇겠죠. 2차 세계 대전의 잔인함과 참혹함, 그리고 무엇보다 그 절대적인 무력감 때문에 말입니다.
아내 에이, 천만해요. 단지 페니실린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라구요.
남편 (잔을 들며) 마침내 천년왕국이 도래하였도다.
모두들 건배하고 술을 마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