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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Nov 22. 2024

[희곡] 채식, 주의, 자  (6)




남편  어쨌든 당신이라도 보람찬 하루를 보냈다니 다행이야. 


아내   왜, 자기는 별로였어?


남편   시원치 않았어. 아니, 사실 완전히 꽝이었지. 오늘 적군 놈들이 아군 기지를 습격한다는 첩보가 있어서 하루 종일 매복해 있었거든. 낮에는 더위에 녹초가 되고 저녁에는 추위에 떨면서 말이야. 그런데 아무도 나타나지를 않은 거야. 완전히 물 먹은 거지. 


아내  아유, 불쌍한 우리 자기. 


손님   적군, 아군, 기지, 습격, 첩보, 매복.... 이게 다 무슨 소리죠?


아내   아, 미안해요. 소개가 늦었네요. 우리 남편이 군인이거든요. 최전방에서 싸우고 있어요.


손님   아아, 그렇군요. 맞아요. 지금 우리나라는 전쟁 중이었죠.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전쟁이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는 바람에 우리는 평화 속에 방치되어 있었거든요. 어쨌든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남편  뭘요. 군인이 나라를 위해 싸우는 건 당연한 일이죠.  


아내  이이는 자신이 군인이라는 걸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한답니다.


손님  그럼요. 훌륭한 일이죠. 결코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남편  뭐, 쉬운 일은 아니지만 최악의 일도 아니죠. 


아내  모든 직업이 다 그렇지.  


남편  하지만 오늘 같이 허탕 치는 날은 좀 힘들어요. 군인이 경비는 아니니까요. 


아내  저번 전투는 제법 괜찮았다며?


남편  저번에야 끝내줬지. (관객을 향해 총 쏘는 시늉을 하며) 오랜만에 제대로 손맛을 봤으니까. 


손님  손맛이요?


남편  그럼요. (두 손을 쫙 펴 들고 손가락을 움직이며) 손에도 혀가 있거든요. 손 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 혀가 있죠. 결국 우리의 육체는 하나의 커다란 혀이고, 모든 감각은 미각이고, 삶은 미식이에요. (장난스럽게 혀로 성적인 사인을 보낸다.) 


손님   그럼 전쟁은 만찬이라도 된다는 건가요?


남편   미식가를 폭식증에 시달리게 만들죠.


아내  자기야, 저번 전투에서 있었던 일 좀 얘기해봐.


남편  에이, 아니야, 손님이 지루해 하실 거야. 


손님  아니에요. 저도 듣고 싶어요. 둥둥 떠오르는 기름진 평화가 이제 좀 물리거든요.


남편  그럼 한 번 들어보실래요? 에, 그러니까, 그 때는 황혼이 지고 있었어요. 저는 아파트 층계 뒤에 숨어서 매복하고 있었구요. 저는 매복하는 걸 좋아해요. 능동적인 방어이자 수동적인 공격이죠. 그러다가 오줌을 싸려고 벽 모퉁이를 돌아 놀이터 앞까지 갔는데, 시소 앞에  적군 하나가  멍하니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더라구요.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꼬락서니하고는. 뭐, 내 꼬라지도 그리 다르지는 않았겠지만요. 자세히 보니 담배를 잡고 있는 그놈 왼쪽 엄지손가락이 없더라구요. 왜 그랬는지야 뻔하죠, 뭐. 분명 딴 생각을 하고 있다가 사달이 났을 겁니다. 우리는 언제나 딴생각을 하고 있다가 사달이 나니까. 


아내  (혀를 차며) 그런데 또 딴생각에 빠져 있다니. 


남편  어쩌면 잘려나간 손가락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아내  딴생각에 대한 딴생각에 대한 딴생각에 대한 딴생각.......휴우. 


손님  그렇게 점점 악화되는 거군요.


남편  맞아요. 일단 손가락 하나를 빼앗기면 그 다음은 손, 그 다음은 손목, 팔, 어깨, 결국 모가지까지 각오해야 하죠.


손님  마치 피터 펜에 나오는 후크 선장 같네요.


아내  아하, 조심해요. (빅토리아를 가리키며) 악어가 어디선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라요. 

     

    빅토리아가 손님을 쳐다보고 있다.  

   

손님  내가 딴 생각에 빠지길 기다리면서요?


아내  다시 시계가 작동하기를 기다리면서요.


     빅토리아는 계속 손님을 쳐다보고 있다.


남편  (빅토리아를 향해 몸을 앞으로 구부리며) 나는 숨을 삼켰어요. (빅토리아를 향해 살살 걸으며) 그리고 발소리를 죽였어요. (빅토리아 뒤로 접근하며) 그리고 조용히 뒤로 접근했어요. (빅토리아에게 총 모양으로 손가락을 겨누며) 그리고 머리에 총을 대고 ‘손들어’ 하고 말했어요. (다시 총을 제대로 겨누며) 그런데 이 얼간이가 손을 뻗어 무기를 잡으려고 하길래 (웃음을 삼키며) 그대로 갈겨버렸어요. 탕. (빅토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머리가 박살나는 순간 제일 먼저 눈알이 두개골 밖으로 튀어나오고 곧이어 피와 뇌수가 폭죽처럼 터지더군요. 하얀색 이빨이 사방으로 쏟아져 내리면서 붉은 피와 노란 기름의 마블링 위로 아라베스크 무늬를 만들어냈죠. 


아내  와, 진짜 볼만했겠네.


손님  볼만했다구요?


남편  사실이에요.


손님  사실이라구요?


남편/아내  군사적인/의학적인 (남편과 아내가 동시에 말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잘 들리지 않는다) 관점에서 말입니다.


남편/아내  정치적인/윤리적인 (남편과 아내가 동시에 말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잘 들리지 않는다) 관점에서도.


남편/아내  경제적인/미학적인 (남편과 아내가 동시에 말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잘 들리지 않는다) 관점에서도 그렇죠.     


   남편과 아내가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나 손님은 웃지 않는다.    

 

아내   아니, 표정이 별로 좋지 않네요. 혹시 우리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손님  아니오, 설마요. 모두 훌륭한 직업들인데요. 


남편   그런데 뭐가 문제죠? 


손님   문제요? 문제는,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저 조금, 아주 조금, 정말로 아주 아주 조금, 낯선 것 뿐이에요.


아내  이해가 안가는 군요. 모두 합법적인 일인데.


남편  공익과 정의에 부합하고.


아내  말하자면 더없이 윤리적이죠.


남편  지극히 보수적이랄까?


아내  그런데도 진보의 지지를 받고 있죠.


손님  그럼요. 물론이죠. 저 역시 한 명의 시민으로써 여러분을 지지합니다. 군인과 의사야 말로 오늘 날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죠. 존경받아 마땅해요. 


남편  하지만 여전히 불편해 보이는군요.


손님  별거 아니에요. 그냥, 아마도, 제 부모님이 떠올랐나 봅니다. 모든 부모는 자식들에게 군인이자 의사니까요. 


아내   아유, 제발 그 죽은 프로이트 고추만지기 식으로 아무데나 부모 좀 끌어들이지 말아요. 기분이 싹 가시니까. 우리 엄마는 지금 치매에 걸려서 요양원에 누워 계시다구요.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단 한마디 ‘유감입니다’ 뿐이죠. 사과를 하고 싶은 건지, 사과를 받고 싶은 건지, 계속 이 말만 반복해요. 유감입니다. 유감입니다. 유감입니다. 유감입니다......


남편   우리 아버지는 작년에 대장암으로 돌아가셨어요. 마지막 몇 달 동안은 매일 한 바가지씩 피똥을 싸셨죠. 그런데도 하루 종일 먹고 싶은 음식들을 나열하곤 했어요. 소갈비, 참치회, 보신탕, 낙지탕탕이, 닭찜, 보리굴비, 탕수육, 제육볶음, 고기만두, 삼계탕, 바싹불고기, 곱창구이, 육회...... 자신의 육체가 자기 자신을 먹어치우고 있는 동안에 말이에요.


아내   늙은 부모는 오이디푸스보다 더 지독하죠. 


남편   혹시 부모님이 섹스하는 걸 본 적 있나요? 


손님   아뇨, 그런 적은 없는데…….


아내   난 우리 엄마가 아빠한테 오랄을 해주는 걸 봤어요. 그 뒤로 엄마가 웃을 때마다 이빨 사이에 털이 끼어있지 않나 자세히 살펴보곤 했죠. 새까맣고 꼬불거리는 그 짧은 털 말이에요. 엄마는 가랑이에 팬티를 입듯이 입에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게 좋았을 거예요.  


남편   난 아빠가 포르노를 보면서 자위하는 걸 여러 번 봤어요. 가슴과 입술이 커다란 그 붉은 머리 여자가 내 친엄마일 거라고 상상했죠. 그런데 매번 여자가 바뀌었기 때문에 나는 내 인종을 확신할 수가 없었어요. 


아내   뭐어, 정 원한다면 우리를 엄마, 아빠라고 불러도 좋아요. 그게 당신의 프로이트를 흥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래서 자신이 프로이트라는 걸 잊게 할 수만 있다면 말이에요.


손님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는 좀 혼란스러워요. 마치 모든 단어들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도망가고 있는 것만 같아요. 그것들을 산채로 잡을 수 없다면 죽여서라도 잡아야 할 겁니다. 죄송하지만, 오늘 밤에 대해 확신이 서지를 않네요.  

    

     잠시 침묵.     


남편  믿음을 잃으셨군요.


아내  갑자기 어린아이가 되었거나 늙어버린 거죠.


남편  조루나 발기부전처럼.


아내  자신에 대한 신뢰마저 잃어버린 거예요.


남편  본래 더 원할수록 더 의심스러워지죠.


아내  종종 일어나는 일이에요.


남편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아내  그저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이죠.


남편  하지만 정 마음이 내키지 않으시면 여기서 그만 두셔도 됩니다.


아내  그럼요. 우린 괜찮아요. 물론 좀 아쉽기는 하지만요.


남편  이렇게 멋진 분을 만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아내  거기다가 노래는 얼마나 잘 하시는지.


남편  환상적이죠. 하지만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아내  물론이에요. 절대 그래서는 안 되죠. 


남편   보세요. 문은 활짝 열려있어요.


아내  가고 싶다면 그냥 나가시면 되요.


남편   말리지 않겠습니다.


남편/아내  (손님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시겠어요?     


   손님이 잠시 고민한다. 빅토리아가 손님에게 다가와서 다리에 몸을 비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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