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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Nov 29. 2024

[희곡] 채식, 주의, 자 (7)




손님   에잇, 저는 남겠습니다. 도망가지 않겠어요. 이대로 꽁무니를 뺀다면 부끄러울 겁니다. 오늘 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영원히 수치스러울거예요. 저는 모험을 찾아 이곳에 왔고 모험이란 완전하게 불완전한 미래를 감수하는 것이니까요. 진정한 모험가라면 의심스러울수록, 아니, 의심스럽기 때문에 오히려 차라리 아예 감히 함부로 마구 달려들어야 하는 것이죠. 게다가 이렇게 멋진 분들과 함께라면 아무리 높고 거친 파도가 몰아쳐도 거뜬히 헤쳐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 저를 수평선 너머로 데려가 주세요. 그게 어디든, 어딘가 아주 멀리,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요.     


   모두 얼싸안고 환호성을 올린다.     


남편  좋아요. 이제 무를 수 없는 겁니다. 가고 싶다고 해도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


아내  맞아요. 이제 도망 못가요. 문과 창문을 모두 잠가버릴 거예요. 


남편  의자에 꽁꽁 묶어둘 겁니다.


아내  빅토리아처럼 목에 꽉 끼는 목걸이를 채우겠어요. 


손님  마음껏, 마음대로 하세요. 가두던 묶던 채우던 이제 저는 여러분의 소유니까요. 제발 부탁이니 저를 다른 사람으로, 다른 물건으로, 다른 내일로 만들어 주세요. 저는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남편   변신이야 말로 본질과 실존을 앞지르죠.


아내   부활은 틀림없이 약속되어 있어요.


남편   언제나 내일에, 영원히 오지 않을 내일에 말입니다.


아내   오늘 밤 우리는 내일로 가는 거예요.


남편   자, 다 함께 갑시다.


손님  (레미제라블 – 내일로)

내일로

또 다른 날 또 다른 운명이

이 길은 끝이 없는 가시밭

날 잡으려는 추적자는 포기라곤 모른다 

[내일로]

너를 만나 바뀐 인생

너 없이 어찌 살아갈까 

[내일로] 

내일 우린 다른 길로 

우리 만남 시작했는데 

하루 가도 나 홀로 

[다시 못 봄 어쩌나] 

하루 가도 그는 멀리 

[우리 함께 할 운명]

나야 어찌 되어도

[운명 함께 할 우리] 

그는 상관없는 일 

폭풍 와도 내일은 

그녀 따라 떠날까 

바리케이트에 자유 온다 

동지들을 따를까

전열 맞춰 나갈 때 

가느냐 머무느냐 

나와 함께 싸우자

때가 왔다 그날 왔다

내일로

[아내: 내일되면 반란의 날

싹을 미리 자르자 

학생놈들 애송이들 

피로 물들이리라]

내일로 

[남편: 다들 맛 갔나

다들 죽을 판

몽땅 죽어 준다면 우린 좋지 

여기서 슬쩍 저기서 왕창

기왕 죽을 목숨 크게 써 보셔]

내일이면 시작되리

[깃발 높이 올려라] 

민중들이 깨어나 

[민중들이 깨어나] 

새로운 세상 열리는 날

[새로운 세상 열린다]

너는 듣고 있는가 

여기 남아 함께 싸운다

내일로 

[아내: 저들 틈에 합류하며

저들 뒤를 따르며]

하루가도 나홀로

나야 어찌 되어도

[아내: 저들 속셈 알아내어

저들 파악하겠다]

너를 만나 바뀐 인생

너 없이 어찌 살아갈까

내일 우린 다른 길로 

우리 만남 시작했는데

[아내: 내일 되면 반란의 날 

싹을 미리 자르자

학생 놈들 애송이들]

[남편: 다들 맛 갔나 

다들 죽을 판

몽땅 죽어 준다면 우린 좋지]

내일은 멀리 떠나리 

내일은 정의 세울 날

내일이 오면 신의 뜻한 바를 알게 되리라

[내일엔]

[내일은]

[내일로]     


  혁명 투사들처럼 모두 손에 손을 잡고 허공으로 힘차게 쳐든다. 그 때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아내  아, 배달 음식 왔나보네. 


남편  좋았어. 금강산도 식후경이니까. 일단 배부터 채우자고.


아내   내가 음식 받을 테니까 자기가 탁자 좀 치워 줘. 


남편  일단 애피타이저로 저녁식사부터 하고 (손님을 바라보며 성적인 뉘앙스로) 메인 요리와 디저트는 천천히 즐기자구요.     


    또 다시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아내  네, 나가요.      


   치킨 배달부가 뒤편에서부터 관객석을 가로지르며 무대 앞으로 다가간다. 치킨 냄새가 최대한 관객석 전체에 퍼지도록 한다. 아내가 무대 한쪽에서 치킨 상자를 받고 돈을 치르는 동안 남편은 탁자 위를 정리한다. 이윽고 아내가 치킨 상자를 들고 탁자로 돌아온다. 치킨 상자에는 통닭 두 마리가 들어있다. 모두 탁자에 모여 앉는다. (아내와 남편은 탁자 양쪽에, 손님은 관객석을 바라보며 가운데 앉는다.)   

  

남편  (화들짝 놀라며) 이게 무슨 냄새지?


아내  짜잔. 


남편  어어, 이거, 치킨 아냐?


아내  응, 완전 맛있겠지?


남편  하지만, 저기, 나는 비빔밥을 시켰는데.


아내  자기가 요새 통 입맛이 없는 것 같아서 내가 이걸로 시켰어. 입맛이 없을 때는 뭐니 뭐니 해도 치킨이 최고잖아. 역시 자기 생각하는 건 나 밖에 없지?    

  

    아내가 닭다리 하나를 찢어서 남편에게 내민다.      


아내  (다정하게) 자, 우리 자기, 이거 하나 먹어 봐.      


    그러나 남편은 닭다리를 바라볼 뿐 받지 않는다. 아내와 남편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서 손님은 아내와 남편을 번갈아 바라본다.      


아내  왜 그래? 


남편  자기야, 실은 나 자기한테 고백할 게 있어.


아내  고백?


남편  어.


아내  지금?


남편  적절한 때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1초라도 더 자기에게 숨기고 싶지 않아.


아내  심각한 문제야?


남편  어.


아내  얼마나?


남편  자기가 엄청 충격 받을 거야.


아내  여자 문제니?


남편  뭐? 아니야. 그럴 리 없잖아.


아내  그럼 남자니?


남편  자기 요새 영국 드라마 너무 보더라. 당연히 아니지.


아내  그럼 주식했니? 또 삼성 주식 샀어? 


남편  아냐, 나 주식 끊었어. 진짜야.


아내  그럼 이번엔 비트코인이구나? 그렇지?


남편  미쳤어? 그건 마치 죽은 사람 입에 노잣돈으로 넣어주는 동전 같은 거잖아. 


아내  아, 이제 알겠네. 또 누구 돈 꿔줬구나? 맞지? 내가 못살아. 저 번에 후배한테 꿔준 돈도 아직 못 받았으면서 어쩌려고 그래? 


남편  아니야, 자기야. 나도 염치가 있지. 그리고 자기가 통장이랑 카드랑 다 뺐어갔는데 내가 어떻게 돈을 꿔줘.


아내  어머, 그럼 자기 누나, 아주버님하고 또 부부싸움하고 여기 와 계시겠데? 작년에 한 달이나 여기 있을 때 나 완전히 돌아버릴 뻔한 거 알지? 나 더는 못 참는다?


남편  아냐, 누나하고 매형도 요즘은 잠잠해. 이제 매형 기운이 딸리잖아. 저번에는 매형이 집을 나갔다고 하더라고. 


아내  그럼 이제 딱 한가지 밖에 없네. 당신 결국 나 몰래 플레이스테이션5 샀구나? 내가 절대 안된다고 분명하게 말했는데, 나 무시하니?


남편  아냐, 아냐, 그런 거 아냐.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 장바구니에 담아놓기는 했지만 구매하지는 않았어.


아내  장바구니에 담아놓았다는 건 사려고 한다는 거 아냐.


남편  아니라니까. 그냥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지웠다가 다시 담았다가 지우고 하는 거야. 기분이라도 내려고 말이야. 진짜야.


아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세상에, 그럼 대체 뭔데?   


남편  (잠시 침묵하다가) 나, 채식주의자야.     


   충격을 받은 아내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비명을 지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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