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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채식, 주의, 자 (9)

by 곡도




아내 (한숨을 쉬며) 자기는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이건 단지 고기를 먹느냐 안먹느냐의 식습관 문제가 아니야. 말하자면 이건, 이건 말하자면, 존재론적인 문제란 말이야.


손님 (휘파람을 분다)


남편 무슨 문제라고?


아내 생각해 봐. 인간은 몇 백만 년 동안이나 고기를 먹어 왔어. 아니, 고기를 먹으면서 비로소 인간이 되었지.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의 생물학적 근원과, 체질적 본성과, 진화적 계보를 거부하겠다고?


남편 그게 아니라…….


아내 (남편의 말을 가로막으며) 그건 자기 부정이고, 자기혐오고, 자학일 뿐이야.


남편 그렇게 까지 생각할 필요는…….


아내 (남편의 말을 가로막으며) 자연스럽지가 않아. 변태적이야. 일종의 도착이라고.


남편 세상에 맙소사.


아내 그러니까 이건, 그러니까 이건, 그러니까 이건…….


손님 미신적이라구요?


아내 맞아요. 우상숭배나 패티시즘처럼 말이에요.


남편 자기야, 이건 미신이 아니라 소신이야.


아내 천만해. 호랑이가 육식을 거부한다면 그게 소신일까? 토끼가 채식을 거부한다면 그게 소신이야? 그건 일종의 망상장애야. 정신병이라고.


손님 혹시 일종의 휴머니즘이 아닐까요? 휴머니즘에서는 인권이 남자에게서 여자로, 여자에게서 아이로, 아이에게서 소수자로, 소수자에게서 동물로, 동물에게서 식물로, 심지어 식물에게서 무생물로 점점 확대된다고 하던데요.


아내 휴머니즘. 자신의 출신과 본질을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는 이념이죠.


손님 그거야 말로 모든 이념의 출신이자 본질이에요.


남편 저도 휴머니즘 채식주의자를 한명 알고 있습니다. 행여 식물이 고통 받을까봐 땅에 떨어진 곡식과 과일만 먹지요.


손님 세상에, 간디가 따로 없군요.


남편 간디야말로 채식주의자들의 모범이죠. 계란을 먹는니 죽음을 택하겠다고 했을 정도니까요. 그에게는 계란 하나가 인도의 독립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였을 겁니다.


손님 진정한 평화주의자군요.


아내 하, 그러면서 뒤로는 자기 아내를 때렸지.


손님 간디가 아내를 때렸다구요?


아내 그렇다니까요. 오른손으로는 초식동물처럼 채소만 먹으면서 왼손으로는 육식동물처럼 자기 아내를 때렸죠.


손님 믿을 수가 없네요. 혹시, 채소의 부작용같은 게 아니었을까요?


아내 어쩌면요. 모든 식물에는 어느 정도 환각 작용이 있으니까요. 독말풀, 대마초, 양귀비로 강력한 환각제도 만들잖아요? 하지만 돼지고기, 닭고기, 양고기로 환각제 만든다는 소리 들어보셨어요?


손님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왜 육식주의는 없는 데 채식주의는 있을까요?


아내 중독되었기 때문이죠.


손님 채소에요?


아내 아뇨. 채소를 뺀 모든 것에요.


남편 그만. 제발 그런 중상모략은 그만 둬. 당신은 모든 걸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어. 채식주의는 그렇게 대단한 것도, 그렇게 심각한 것도, 그렇게 복잡한 것도 아니야. 단지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뿐이라고. 그게 다야.


아내 무언가를 하지 않는 건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지.


남편 하지만, 하지만, 아 그래, 당신도 오이 안 먹잖아. 그것도 뭐 뭐 중독인가? 오이를 뺀 모든 것에 중독된 거야?


아내 뭐, 오이? 어머, 기막혀. 고기랑 오이가 같니?


남편 뭐가 다른데?


아내 오이는 맛이 없잖아.


손님 이거야 말로 정말 존재론적인 문제군요.


남편 아니요. 존재는 고기나 오이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식재료나 식습관의 문제가 아니라구요. 우리는 오직 사람 간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겁니다. 존재론이란 결국 관계론이에요. 특히 두 사람이 함께 구축해나가는 하나의 사랑 안에서 인간은 가장 선명하게 존재할 수 있죠.


아내 두 사람이 함께 구축해나가는 하나의 사랑이라고? 각자 다른 식사를 차리고, 각자 다른 음식을 먹고, 각자 다른 맛을 느끼면서? 월드컵 한일전을 보면서 내가 치킨이나 족발을 뜯을 때 당신은 당근스틱이나 오이 샐러드를 씹겠다고?


남편 뭐, 고구마 탕수육이나, 양배추 스테이크나, 콩 소시지도 있는데.


아내 세상에나.


손님 그건 뭔가 여장남자 같은 느낌인데요.


아내 내 말이 바로 그거에요. 이건 마치 위장 결혼같다구요.


남편 뭐라고? 단지 먹거리 때문에 우리 결혼 전체가 다 가짜라는 거야?


아내 기억나? 우리는 식당에서 처음 만났지. 함께 감자탕을 먹으면서 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졌어. 만약 그 때 당신이 채식주의자였다면 나는 결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을 거야. 속으로 까다롭고 말라비틀어진 염소라고 비웃었겠지. 당신은 또 어떻고. 돼지 척추뼈를 손에 들고 육즙이 흐르는 살코기를 한 입 가득 씹어대는 나를 보면서 늑대 이빨을 가진 돼지라고 비웃었을 걸. 어쩌면 지금도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남편 그건 억지야. 그래도 나는 분명 당신과 사랑에 빠졌을 거야.


아내 하, 마치 코끼리가 코뿔소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말이지.


손님 잠깐만요. 그건 맞는 비유가 아니에요. 외모가 그래 보여도 코뿔소는 엄연히 초식동물이거든요.


아내 그래요? 음, 그럼, 코끼리가 코브라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말이지.


손님 에, 미안하지만 그건 더 곤란한데요. 여자를 뱀에 비유하는 건 최근들어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아내 그럼, 그러니까, 말하자면, 코끼리가 코요테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손님 아니, 그것도 문제가 될 수 있어요. 신화에 따르면 코요테는 최초의 거짓말쟁이거든요.


아내 그 코요태가 암컷이었나요?


손님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어쨌거나 여자가 낳았을 텐데.


남편 아니, 그럼 남자를 코끼리에 비유하는 건 괜찮구요?


손님 솔직히 코끼리에 비유당하는 걸 싫어하는 남자는 없을 걸요.


아내 아유 참, 그만 됐어요. 요즘은 도대체 비유라는 걸 할 수가 없다니까요.


손님 사실이에요. 이솝이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분명 광화문 한복판에 발가벗겨져서 거꾸로 매달렸을 겁니다.


아내 예전에는 누구나 화내는 척 하느라 화내고 웃는 척 하느라 웃었죠. 과식한 후에 가볍게 가스 활명수를 마시듯이요. 그런데 요즘처럼 진심으로 화내고 진심으로 웃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건 두려운 일이에요. 그들은 팔뚝만한 바늘로 엄지손가락을 따주겠다면서 서로에게 덤벼든다니까요.


손님 그래서 정치인들이 우리의 희망인 겁니다. 오직 그들만이 비유와 풍자를 이해하고 또 그것을 견뎌내죠. 모두가 그들에게 저열하고 쓸모없는 꼴통들이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유머와 여유를 수호하는 게 그들의 진짜 임무거든요. 농담이 아니에요. 그들이 함께 연출해내는 민주주의라는 몽환적인 희극이야 말로 냉혹한 자본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그런데 정치인들마저 진지해지면, 휴, 그 때는 세상에 종말이라도 올 겁니다.


남편 저기, 그럼 저도 한 번 비유로 말해 볼까요?


손님 해보세요. 쉽지는 않겠지만요.


남편 음, 그러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건, 티거와 피글렛이에요.


아내 누구라고?


손님 혹시 곰돌이 푸우에 나오는 티거와 피글렛 말인가요?


남편 맞아요. 그들은 호랑이와 새끼 돼지지만 서로 다정한 친구 사이잖아요. 진정한 관계에 대한 멋진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난 특히 티거를 좋아해요. 온순하고 쾌활한 친구죠. 누구에게나 다정하구요. (‘티거 노래’를 부른다) 티거에 대해 가장 멋진 사실은 바로 세상에 티거는 나 하나뿐이란 거야.


손님 (애니메이션 '곰돌이 푸우' - 티거 노래)

티거에 대한 멋진 사실은 바로

티거는 멋지다는 거야

머리는 고무로 만들어졌고

꼬리는 용수철로 만들어졌지

그들은 탱탱하고, 통통하고, 퉁퉁하고, 팅팅해.

[남편: 재밌어. 재밌어. 재밌어. 재밌어. 재밌어!]

하지만 티거에 대한 가장 멋진 사실은

세상에 티거는 나 하나뿐이라는 거야!

티거는 사랑스러운 친구야.

티거는 너무나 귀엽지.

다들 나를 질투해.

그래서 내가 말하고 또 말할 수밖에.

티거에 대한 멋진 사실은 바로

티거가 대단한 녀석이라는 거야.

그는 힘과 활기가 가득하지.

그는 네 무릎 위로 뛰어오르는 걸 좋아해.

그는 폴짝폴짝, 조마조마, 쿵쾅쿵쾅, 쿵짝쿵짝

[남편: 재밌어. 재밌어. 재밌어. 재밌어. 재밌어!]

하지만 티거에 대한 가장 멋진 사실은

세상에 티거는 나 하나뿐이라는 거야!


손님 하하, 저도 어렸을 때 푸우와 그 친구들을 정말 좋아했어요.


남편 모든 아이들이 그렇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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