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솔직해져 봐. 당신은 모순이나 부조리를 치료하려는 게 아니야. 인간에게서 인간을 치료하려는 거지.
남편 그런지도 모르지. 인간이야말로 죽음보다 더 노골적이니까. 그런데 그게 무슨 잘못이야?
아내 잘못은 아냐. 지독한 어리석음일 뿐이지. 모든 완벽주의는 늘 저능하고 전능한 어리석음에서 나오지.
남편 그럼 당신이 말하는 현명함이란 대체 뭔데?
아내 당신은 부조리가 교정할 수 있는 텍스트라고, 정확하게 계산되지 않은 공식이라고, 조정할 수 있는 불협화음이라고, 잘라낼 수 있는 암세포라고, 그러니까 먹지 않으면 그만인 식재료일 뿐이라고 믿고 싶어 하지. 하지만 부조리는 바로잡거나 개선하거나 덧칠하거나 우회하거나 외면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부조리는 결코 줄어들거나 늘어나지 않는 온전한 전체라는 걸 알아야 해.
남편 쳇, 인류가 그런 정신 상태였다면 결코 진보란 없었을 거야.
아내 진보. 또 하나의 골치 아픈 발명품이지. 계속해서 진보로 부조리를 내려치지만 산산 조각난 부조리의 숫자만 더 늘어날 뿐이야. 무게는 달라지지 않아.
손님 아하, 질량보존의 법칙 같은 거군요?
아내 질량보존의 법칙이야 말로 물리학에서부터 심리학까지 모든 학문의 절대 공리죠.
남편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큰 덩어리를 잘게 쪼개는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잖아? 자꾸만 걸려 넘어지는 미끌미끌하고 거친 자갈밭이 아니라, 곱고 평탄한 모래사장을 마음 편히 걸을 수 있다면 쾌적하고 고상한 일 아냐?
아내 아하, 채식주의를 프루테리언, 비건, 락토, 오보, 락토오보, 페스코, 폴로, 플렉시테리언 등등등으로 잘게 쪼개는 것처럼 말이지?
손님 대체 그게 다 무슨 말이죠?
남편 채식주의의 종류를 말하는 겁니다. (빠르게 말하며) ‘프루테리언’은 식물을 뽑거나 자르지 않는 열매나 견과류, 곡식을 먹습니다. ‘비건’은 채소와 과일 등 대부분의 식물을 먹구요, ‘락토’는 식물과 함께 동물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 않은 식품, 그러니까 우유, 꿀, 버터, 치즈 등을 허용합니다. ‘오보’는 유제품 섭취를 하지 않지만 달걀은 허용하구요, ‘락토오보’는 ‘락토’와 ‘오보’가 합쳐진 채식주의로서 달걀, 유제품 등 동물들을 해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식품의 섭취를 허용합니다. ‘페스코’는 채식에 해산물까지는 허용하고, ‘폴로’는 소고기와 돼지고기는 먹지 않지만 닭고기는 가능합니다. 아, 그리고 평소에는 채식을 하지만 상황에 따라 육류 섭취가 가능한 ‘플렉시테리언’이 있지요.
손님 휴우, 정말 그렇게까지 열심히 살아야 하나요?
남편 성취는 언제나 디테일에 있으니까요.
손님 잘못하면 모래사장이 개미지옥이 되겠군요.
아내 젠더하고 비슷하다고 보면 되요. 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죠. 이제 젠더의 종류만 해도 9가지라던가 10가지라던가. 시스젠더, 트렌스젠더, 젠더퀴어, 바이젠더, 안드로진, 에이젠더, 젠더플루이드 등등등. 성별을 남자와 여자로 나누던 시절이 언제였는지 더 이상 기억나지도 않는다니까요. 아마 그런 건 애초에 창조주의 머릿속에나 있었나 봐요.
손님 뭐든지 계획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죠. 신이 계획을 세우면 인간이 웃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아내 이렇게 계속 세분화되다가는 그 누구도 자신과 같은 성적 취향을 가진 상대를 만날 수 없게 될 거예요. 결국 오직 자기 자신만이 자기 자신만을 만족시킬 수 있게 되겠죠.
손님 사실 전 자위가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내 하지만 그 낭만은 거식증에 걸릴 거예요. 우리는 함께 있으면서도 각자 자신만의 꿈 속에서 홀로 자위에 몰두해 있는 야위고 창백한 모래알갱이들이니까요.
남편 아니요, 낭만이란 나침반처럼 정확히 이상을 가리키죠. 자기맞춤, 자기만족, 자기완성이야말로 요즘의 시대정신이예요. 이제 우리는 집단을 이루는 개인이 아니라 개인을 이루는 집단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야합니다. 개인이란 최소 단위가 아니라 최대 단위라는 것을요. 우리는 더 이상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지 않을 겁니다. 자발적이고 감미로운 희생에 중독되지 않을 거예요. 모든 걸 포기하는 대신에 모든 걸 요구할 겁니다. 모든 사람을 허용하는 대신에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을 거구요. 우리는 절대적으로 고독함으로써 더 이상 고독하지 않을 겁니다.
아내 그건 시대정신이 아니야. 부조리를 부정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집단 결벽증, 집단 편집증, 집단 강박증일 뿐이지. 그리고 그건 전혀 새로운 일도 아니야. 인류는 언제나 결벽증과 편집증과 강박증에 시달려 왔으니까. 문제는 요즘 사람들은 치료받기를 거부한다는 거야. 심지어 그게 장애라는 걸,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걸 부인해버리지. 아니, 그것도 모자라서 오히려 정상을 장애로, 정상인을 장애인으로 뒤바꾸려 한다니까. 평균 이상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평균을 자기 밑으로 끌어내려서라도 말이야. 모든 잣대가 사라지거나 모두가 비정상이 되면 정말 평등하고 행복한 세상이 될 거라고 믿는 거야?
남편 경계와 싸우면 오히려 경계를 강화시킬 뿐이라는 걸 마침내 깨달았거든. 우리가 벽을 넘기 위해 쌓았던 발판들이 오히려 벽을 더 견고하고 성대하게 드높였던 거야. 그건 그저 경계를 서사적인 한계로 확정하기 위한 경계 자신의 전략일 뿐이었지. 그러니 이제 우리는 경계를 없애기 보다는 ‘경계’라는 개념 자체를 무력화시켜야 해. 마치 멱살을 잡고 있는 쌍둥이들을 반의어가 아닌 동의어로 취급하는 것처럼, 마치 그들이 싸움을 하는 게 아니라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아내 쌍둥이들을 춤 추게 하는 게 싸움을 붙이는 것보다 더 폭력적이라는 걸 모르나봐?
남편 결국 당신은 둘 중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발 밑에 무릎을 꿇어야만 속이 시원한거지?
손님 제게는 수술을 거부하는 청각장애 친구가 한 명 있어요. 그는 자신에 대한 일말의 부정도 없는 한없는 긍정 속에서 자신의 장애가 장애가 아닌 정체성, 개성, 능력, 가치, 심지어 축복인 것처럼 말하더군요. 청각장애가 ‘귀머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유산이라도 되는 것 처럼요. 자신은 원래 이대로의 완전한 완성품이라면서, 귀가 들리는 사람들이 민족우월주의적인 잣대로 그것을 ‘장애’나 ‘비정상’이라고 규정해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수술만 하면 충분히 다시 들을 수 있는데도 오로지 '귀머거리'로 실존하기 위해, 장애로 이루어진 정상을 성취하기 위해, 부정을 부정하기 위해 그는 수술을 거부했습니다.
아내 또 한 명의 신이군요. 우리와 똑같이 말이에요. 문제는 오늘 날 세상에는 80억 명의 신이 있지만 신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거예요.
남편 그게 바로 민주주의죠.
아내 현존하는 유일한 종교구요.
손님 미신 중의 미신이에요.
아내 부조리 중의 부조리죠.
손님 마치 데자뷰의 데자뷰의 데자뷰에 사로잡히는 악몽 같아요.
아내 하지만 우리가 가진 유일한 것이고 또 모든 것인 걸요.
남편 어쨌거나 당신도 민주주의가 진보의 산물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걸.
아내 아니, 오히려 진보가 민주주의의 산물이지. 그런데 진보는 처음에는 민주주의에 유용하다가, 곧 거추장스러워지고, 결국 방해가 되고 말아. 이제는 진보가 민주주의의 목을 조르고 있어.
남편 무슨 소리야. 민주주의야말로 처음에는 진보에 유용하다가, 곧 거추장스러워지고, 결국 방해가 되고 있는데. 이제는 민주주의가 진보의 목을 조르고 있다고.
손님 세상에, 민주주의와 진보, 꼭 여러분처럼 부부사이인가 보군요.
남편과 아내가 손님을 노려본다.
손님 저기, 자아, 여러분. 에, 이러지 마시고, 네, 그래요. 잠시라도 한 번 옛 기억을 되살려 보면 어떨까요. 여러분도 한 때는 서로를 열렬히 사랑했던 시절이 있었잖아요? 상대방의 모든 게 좋아 보이고 세상 전체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던 시절 말이에요. 둘이 함께라면 결핍도, 장애도, 두려움도 한 때의 착각이나 착오였던 것처럼 사라져버리고, 모든 우연들과 모순들이 익숙한 형체와 의미 속에서 환하게 빛을 발하죠. 사랑에 빠지면 부조리도 그저 보물 지도에 표시해 놓은 가위표와 같잖아요. 사실은 동그라미를 뜻하는, 정직하지만 동시에 기만적인 가위표 말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뭐, 일종의 암호화폐랄까요? 가장 부조리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그게 바로 사랑이잖아요?
(뮤지컬 '캣츠' – 메모리)
메모리. 달빛을 바라봐요.
아름다운 추억에 마음을 열어요.
그 곳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새로운 날 올거야
(남편: 메모리) 아름다웠던 날들
웃고 있던 내 모습
모두 꿈만 같아
행복했던 그때에 나를 기억해요
돌아갈 수 있다면
안개 속에 길을 잃고 헤매던 지난날
저 어둠이 지나면 새벽빛에
또 아침이 밝아오네
(아내: 터치 미) 나는 살아있어요
혼자 남겨진 나의 손을 잡아줘요
함께라면 행복이 뭔지 알 거예요
(남편: 자, 새로운 나를 위해)
(아내: 새로운 나를 위해)
남편 (아내의 손을 잡으려 하며) 새로운 나와 함께.
아내 (남편의 손을 물리치면서) 아니, 역시 안 되겠어.
남편 자기야.
아내 만약 우리가 단지 친구 사이라면 나도 채식주의자인 당신과 얼마든지 어울릴 수 있어. 티거와 피글렛처럼 말이야. 열린 마음으로 친구를 대하고 그의 선택을 응원해 줄 거야. 하지만 내 남편이 채식주의자라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알아야 해.
남편 아니,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어. 우리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한 침대에서 사랑을 나눌 거야.
아내 상대방의 접시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말이지?
남편 우리가 상대방의 단점들을 모른 척 하는 것처럼.
아내 아니, 그건 불가능 해. 당신은 이제 ‘채식주의’라는 제목이 크게 적혀있는 표지의 책과 같아. 그 밑에 있는 작가의 이름보다 책제목이 훨씬 더 잘 보이는 법이지.
남편 아니, 우리는 결국 익숙해질 거야.
아내 아니, 우리는 그저 침묵하게 될 거야.
남편 아니, 우리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될 거야.
아내 아니,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결딜 수 없게 될 거야.
손님 아니, 제발 그 ‘아니’ 좀 그만 해주시면 안 될 까요? 멀미가 날 것 같아서…….
아내 결국 우리는 서로를 개종시키려고 할 거야. 서로를 오염시키려고 할 거라고. 아무리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애써도 저절로 그렇게 될 거야. 서로 눈치를 주고, 암시를 하고, 신경전을 벌이고, 핀잔을 주고, 암호를 만들겠지. 당신은 내가 야채를 먹을 때마다 흐뭇한 눈길로 윙크를 해서 내 속을 뒤집어 놓을 거고, 나는 일부러 소시지 굽는 냄새를 온 집안에 풍기며 당신 속을 뒤집어 놓을 거야. 급기야 당신은 내게 콩고기를 고기라고 속여서 먹이거나, 나는 당신의 된장국에 몰래 소고기 육수를 집어넣을지도 몰라.
손님 결국 집은 전쟁터가 되고 식탁은 최전선이 되겠군요.
남편 당신 정말 너무 하는군. 나를 위해서 조금만 노력해 줄 수 없어? 난 대단한 걸 요구하는 게 아냐. 약간의 공감을 바랄 뿐이지.
아내 나야말로 당신에게 똑같이 말하고 있잖아. 나를 위해 고기 좀 먹어주면 안 돼? 독이 든 것도 아닌데. 정 비위가 상하면 진한 소스를 좀 뿌리거나 야채를 많이 곁들이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남편 하, 당신이라면 빅토리아의 고기를 먹을 수 있겠어? 빅토리아의 목을 칼로 따서 핏물을 빼고 껍질을 벗긴 뒤에 발라낸 허벅지 살로 스테이크를 구워서 진한 소스를 좀 뿌리거나 야채를 많이 곁들여서 먹을 수 있겠냐고. 왜, 빅토리아 고기 좀 먹으면 안 돼? 독이 든 것도 아니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아내 (빅토리아에게 달려가 귀를 막으며) 아니, 왜 우리 빅토리아를 끌어들이는 거야? 이제 정말 막 가자는 거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