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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채식, 주의, 자 (12)

by 곡도




남편 왜에? 예전에는 고양이 고기도 먹었어.


아내 아, 예전에는 신경통에 좋다며 자기 똥오줌도 먹었지.


남편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고양이를 먹어. 개도 먹고, 말도 먹고, 돌고래도 먹고, 병아리도 먹고, 토끼도 먹지.


손님 토끼요? 토끼를 먹어요?


남편 그럼요. 삶아 먹고, 구워 먹고, 튀겨 먹고, 볶아 먹고, 국을 끓여 먹죠. 토끼로 젓갈도 담가 먹는데요.


손님 피터 래빗, 바니, 미피로... 젓갈을 담근다구요?


남편 맛은 좋다고 하더군요.


아내 참 나, 소, 돼지, 닭이 있는데 뭐 하러 고양이나 개나 말이나 돌고래나 병아리나 토끼를 먹는담?


남편 하, 대체 소, 돼지, 닭은 다른 게 뭔데? 이것들은 어미 뱃속에서부터 아예 고깃덩어리로 태어났나? 이미 머리와 손발이 잘린 채로? 랩으로 포장되어 바코드가 찍힌 채로? 아니, 이들도 모두 똑같이 살아있는 생명이야. 어느 날 불현듯 이 세상에 태어나 어쨌든 살아있는 한은 어떻게든 살아있으려고 하는 생명이란 말이야. 우리 빅토리아처럼.


빅토리아가 돌아본다.


손님 음, 소 눈이 크고 선하긴 하죠.


남편 (빅토리아가 아내에게 다가가 빤히 바라본다) 우리 빅토리아처럼요.


손님 음, 돼지도 정말 똘똘하다고 하더라구요.


남편 (빅토리아가 아내에게 애교를 부린다) 우리 빅토리아처럼요.


손님 음, 닭들이 들판에서 모이를 쪼는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해요.


남편 (아내가 주머니에서 츄르 꺼내 빅토리아 입에 짜서 넣어준다) 우리 빅토리아처럼요.


손님 음, 그러니까 요점은, 빅토리아를 잡아먹자는 건가요?


남편 난 그저 공정함을 요구하는 겁니다.


아내 그만. 그 따위 흑백 논리는 집어 치워. 기계적인 공정함, 그건 세상에서 가장 간사하고 사악한 논리야. 처음에는 신이, 그 다음에는 악마가, 그리고 지금은 인간이 남용하고 있지. 그거야 말로 모든 이데올로기가 혐오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해. 다름에 기생하고, 이간질을 하고, 편을 가르고, 국경을 긋고, 전선을 확대하고, 통일을 방해하고, 멸균에 심취하고, 결벽증에 중독 돼버려. 처음에는 완전무결한 것 같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오염마저 지우려 들지. 결국 자살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거야.


손님 맞아요. 흰색이든 검은 색이든 회색 바탕에서는 모두 오염일 뿐인데 말이에요. 아니, 흰색 바탕에서든 검은 색 바탕에서든 회색은 모두 오염일 뿐이기 때문인가요?


아내 아뇨. 세상에 흰색이나 검은 색이라는 건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남편 어째서 내 말이 흑백논리라는 거야? 그저 당연한 의문일 뿐이잖아. 왜 소, 돼지, 닭고기는 먹으면서 개나 고양이 고기는 먹지 않는지, 왜 개나 고양이 고기는 먹지 않으면서 소, 돼지, 닭고기는 먹는지. 간단한 질문이잖아.


아내 좋아. 그 간단한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해 줄께. 우리가 개나 고양이 고기를 먹지 않는 건..... 우리가 개나 고양이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이야.


남편 뭐라고?


손님 (옛 노래를 떠올리며) 일이면 일이지 둘이겠느냐, 둘이면 둘이지 셋이겠느냐....


남편 질문을 반복하는 게 대답이야?


손님 하지만 결정적인데요. 동어반복을 거부할 논리는 이 세상에 없거든요. (흥얼거리며) 셋이면 셋이지 넷은 아니야, 넷이면 넷이지 다섯 아니야. 랄라랄라랄라....


아내 내가 질문을 대답으로 바꾼 게 아니라 애초에 당신이 정답을 질문으로 바꾼 거야. 마침표 위에 슬쩍 손톱자국을 내서 말이야.


손님 모든 책의 모든 문장이 물음표로 끝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대화가 하나같이 물음표로 끝난다면요? 모든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이 물음표로 끝나면요?


아내 우리가 왜 사람 고기를 먹지 않을까? 그건 우리가 사람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이야. 우리가 왜 개와 고양이 고기를 먹지 않을까? 우리가 개와 고양이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이야. 그냥 그걸 먹지 않기 때문에 그냥 그걸 먹지 않는 거야. 여기에 무슨 질문이 필요해?


남편 그렇게 특정 고기에 대한 사회적인 혐오가 유효하다면 모든 고기에 대한 사회적인 혐오 역시 불가능한 일은 아니잖아? 언젠가는 모든 고기를 먹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될지도 몰라.


아내 당신 말이 맞아. 언젠가는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언제가는 채식주의가 당연해질지도 몰라. 언젠가는 육식 자체가 불법이 될지도 몰라. 언젠가는 나도 채식주의자가 될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남편 아니, 현재는 미래의 과거야. 시간의 중심은 언제나 미래에 있어. 그리고 현재는 이미 임박한 미래에 대한 예감으로 가득 차있지. 넘쳐 흐르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미래로 밀어내고 있는 거야. 나를 봐. 왜 나 같은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겠어? 이미 육식이 더 이상 괜찮지 않기 때문이야. 이미 모든 고기가 피와 고통과 경악으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야. 이미 우리가 그걸 견딜 수 없기 때문이야.


아내 맞아. 결국 인간은 육식을 견딜 수 없게 될 거야. 하지만 장담컨대 그 때까지 백 만년은 걸릴 거야. 그리고 그것은 신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결국 진화를 통해 이루어질 거야. 그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르지도 않을 거야.


남편 그 백만 년 동안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무고하게 죽임을 당할까? 얼마나 많은 생명들과 얼마나 많은 양심들이 썩어 문드러질까?


손님 (알지 못하는 단어인 것처럼) 양심-이요?


남편 아, 당신이 풍미를 높이기 위해 고기 위에 후추처럼 갈아서 뿌리는 것 말이야.


아내 아, 당신이 쓴 영양제처럼 캡슐에 넣어서 맹물과 함께 꿀꺽꿀꺽 삼켜버리는 그것 말이구나.


두 사람은 서로 노려본다.


손님 정말이지 두 분은 백 만년 뒤에 부부가 되는 게 더 나았을 지도 모르겠네요.


남편 그래요. 나는 너무 빨리 태어났는지도 몰라요.


아내 모든 시대의 모든 세대의 모든 여자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하죠. 하지만 백만 년 후에도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을지도 몰라요.


남편 사실 난 말이야, 당신이 여자이기 때문에 날 더 잘 이해해줄 거라고 믿었어.


아내 그건 또 무슨 얘기야?


남편 여자와 채식주의자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약자 사이의 일종의 공감대 같은 것 말이야.


아내 저런, 엄밀히 말해서 채식주의자는 약자가 아니야. 그냥 소수일 뿐이지. 반대로 여자는 소수가 아니야. 그래서 진짜 약자인 거야. 이건 전혀 다른 문제인데, 남자들은 언제나 이 둘을 헷갈리더라.


손님 그러다가 선거 때가 되면 깜짝 놀라곤 하죠.


아내 반작용에 반작용, 그 반작용에 또 다시 반작용 하는 끝없는 반작용의 굴레. 그게 남자들의 패턴이에요.


손님 그럼 여자들에게는 패턴이 없나요?


아내 물론 있죠. 여자들은 반작용에 반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작용에 반작용해요.


남편 하지만 난 여자들의 선천적인 힘을 믿어. 여자들의 부드러운 연민과 섬세한 공감 능력, 그리고 생명을 잉태하고 지키고 키워내는 고결한 모성을 말이야. 실제로 대부분의 채식주의자들이 여자라는 걸 생각해봐. 여성의 사랑은 인간을 넘어 모든 생명에게로 퍼져나가고, 닳고 닳은 남성의 무감각 속에서 점점 낡아가는 이 세상을 흔들어 깨우지. 여성의 자비야 말로 세상을 구원하는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아내 아니, 잠깐. 잠깐만. 그러니까 지금, 고기를 먹는 여자는 별로 여성스럽지 않다는 거야?


남편 뭐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손님 적어도 채식주의를 하는 여자가 더 여성스럽다는 말로 들리긴 하네요.


남편 아냐 아냐,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난 좋은 뜻으로, 그러니까 내 말은, 식용 동물들이 여자들처럼 오랜 세월동안 대대로 착취당해 왔다는 거야.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같은 경험을 가진 여자들이 식용 동물들에게 좀 더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 거라는…….


아내 아, 그러니까 당신은 지금 여자들이 삼겹살한테 정서적으로 공감해야한다는 거야?


남편 뭐? 어떻게 내 말을 그렇게.....


아내 그럼 소세지를 먹을 때 여자들이 죄의식이라도 느껴야 한다는 거야?


남편 그런 뜻이 아니라…….


아내 고기 먹는 여자들은 결국 식인종이나 마찬가지라는 거네?


남편 세상에, 젠장, 그건 피해망상이야.


아내 맞아, 이건 피해망상이야.


손님 그래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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